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푸른숲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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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통해 작가를 알아간다는 건 오프라인에서의 직접적인 만남과 온라인상의 간접적인 만남의 중간쯤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한 작가가 쓴 작품이 여러 권이라면 먼저 어떤 작품을 읽느냐에 따라 그 작가와의 인연이 좀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아주 짧게 막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지요. 오프라인에서의 만남도 그러하듯 첫인상이 안 좋았던 사람은 그와의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가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은 것처럼 말이지요.

 

중국 작가 위화를 처음 알게 된 건 그의 작품 <인생>을 통해서였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었던 푸구이의 기구한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었지요. 계속되는 가난과 불행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꺾지 않는 푸구이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의 저서 <허삼관 매혈기>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음으로써 작가와의 인연을 길게 이어갔으니 말입니다. 그 외에도 국내에 번역된 그의 작품은 더 있는 걸로 알지만 차츰 읽기로 하고 미뤄두었는데 그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나도 모르게 구매 버튼을 누르고 말았습니다.

 

위화의 신작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했던 특강이나 좌담을 모은 책입니다. 그런 까닭에 겹치는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어보면 수십 년에 달하는 오랜 시간 동안 위화라는 소설가가 어떻게 탄생하고 성장해 왔는지 잘 알게 됩니다.

 

1장 '읽고 쓰기', 2장'사람으로 살기'의 총 2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에 대한 모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많은 관객을 앞에 두고 했던 강연이거나 같은 업종의 사람들과 나눈 좌담이었기에 감춰야 했던 비밀 한두 가지쯤은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는 성인이 될 때까지 책다운 책 한 권 읽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루쉰의 작품 속에서 성장했으면서도 루쉰을 싫어했던 그가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루쉰을 재발견하게 되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세계적인 고전을 찾아 읽고, 생각하고, 쓰고 문학을 재해석하는 과정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책이 없던 문화대혁명 시대에 성장했고, 제가 진정으로 진지하게 문학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소설을 쓰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글을 썼던 셈입니다." (p.38)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작가들도 여럿 등장합니다. 톨스토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카프카, 헤밍웨이 등. 물론 자신이 쓴 작품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이 뒤따릅니다. 작품이 처음 실렸던 잡지사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편집자들과 얽힌 일화, 그리고 소설가로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삶의 철학에 대해 들려줍니다. 치과의사였던 그가 소설가가 되고자 분투했을 지난한 세월을 생각해보면 그에게도 무리 모두에게도 인생에서 거저 얻어지는 건 없나 봅니다.

 

"가장 훌륭한 독서는 마음을 비운 독서, 꾸밈없는 마음으로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 독서입니다. 아무런 선입견도 갖지 않는 그런 독서는 사람들의 인식을 더욱 넓혀주지요. 선입견을 가지고 하는 독서는 음식을 골라 먹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의 인식을 더욱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p.159)

 

그가 소설의 지평을 넓혀갔던 과정은 아주 단순했던 듯합니다. 분량으로 보자면 단편소설에서 중편소설로 그리고 중편소설에서 장편소설로 옮겨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 범위에서 그동안 써보고 싶었던 여러 주제 중 하나를 고르고, 앞에 놓인 많은 장애물을 하나하나 넘어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소설가로서 성장하는 일반적인 발전 단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눈앞의 장애물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도 않았던 까닭에 지금의 위화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건 어떤 분야에서건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기본 덕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편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게다가 이 모든 편견이 진리의 옷을 입고 있지요. 진리라는 것은 수시로 우리가 갈아입을 수 있는 겉옷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옷장에는 각양각색의 그럴듯한 옷이 가득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편견에 반기를 들어도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이미 옷을 갈아입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페터 한트케가 배운 보스니아어 욕으로 그들에게 반격을 가하는 것이지요. 너희 집, CNN에 나왔더라! 이 말은 대단히 수준 높은 욕입니다. 중국 속담으로 표현하자면 욕인데도 더러운 단어가 없는 셈이거든요." (p.374)

 

내일은 일 년 24절기 중 스물두 번째 절기인 동지.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기도 하지요. 반대로 말하면 모레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낮이 길어진다는 뜻이겠지요. 문화대혁명의 시대를 잘 견뎌온 위화 작가도 그 어둠의 시기를 딛고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왔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 역시 자신을 의지하여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꾀를 부리거나 엄살을 떨지 않고 두려움 없이 나아갈 때 각자가 닿는 종착지에는 선물처럼 뭔가 주어지는 게 있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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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진료를 받기 위해 대학 병원 안과를 방문했었다. 눈의 상태만 확인하는 간단한 진료였다. 그러나 진료를 받기 위해 내원한 환자들이 어찌나 많던지 오전을 거의 다 소진하고서야 진료를 마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신체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어서 세월의 풍파에 속절없이 스러지게 마련인데 너나 나나 가릴 것 없이 어디 한 군데 탈이라도 날라치면 무조건 병원부터 찾는 걸 보면 '우리나라 경제가 안 좋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싶기도 하고,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불황의 전조를 주로 인간성 상실에서 찾고는 한다. 어떤 이론에 근거하는 건 아니다. 전체 국민 중 '저게 인간인가?' 싶은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면 그 나라는 필연적으로 불황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왜인고 하니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개인이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 거대한 공권력을 타깃으로 삼아봐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 화를 풀기는커녕 오히려 화만 쌓이기 십상이고, 그보다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개인을 타깃으로 삼아 화가 풀릴 때까지 별 이상한 짓거리를 다 하다 보면 어느 정도 화가 풀리는 까닭에 멀쩡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들이 꼭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돌+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타깃으로 삼는 분풀이 대상은 비록 자신과 철천지 원수를 진 건 아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 나쁘다고 하거나 그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유명세가 있는 개인을 타깃으로 삼아 마음껏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이유? 이유는 딱히 없다.

 

그 대상은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딱히 상관은 없다.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얼마나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느냐만 중요하다. 그러므로 최근에 발생한 대형 사고의 희생자들은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다. 현시점에서 국민 대다수의 관심을 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대상을 조롱함으로써 자신들의 개인적 화를 풀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다. 물론 자신들이 이상한 사람(돌+아이)이 아니라고 포장하고 싶은 까닭에 정치적 성향을 내세우거나 페미니즘과 같은 손쉬운 도구로 포장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강릉의 한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학생들의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많은 국민들이 슬퍼하며 안타까워하는 마당에 그들마저 조롱이나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다는 건 인간 이하의 짓이다. 대한민국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걸 보니 불황의 전조가 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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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0 17: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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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1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가 함께 듣던 밤 - 너의 이야기에 기대어 잠들다
허윤희 지음 / 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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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닌데 학창 시절의 기억은 때론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그 시절을 경계로 아날로그 시대는 종말을 고했는지도 모른다. 친구들은 모두 라디오 프로그램을 줄줄이 꿰고 있었고, 우편엽서에 사연과 함께 신청곡을 자필로 꾹꾹 눌러 담아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줄기차게 보내고, 혹시나 자신의 사연이 소개될까 싶어 이제나저제나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은 물론 유행하는 노래를 테이프에 담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곤 했었다. 투박하지만 순수한 낭만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귀로 듣는 것이 더 좋았던, 눈을 감고도 세상의 흐름을 잘 감지할 수 있었던 그 시절에는 나이를 먹는 것도 무척이나 더뎠고 그만큼 사람들의 심성 또한 순하고 부드러웠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도 음악다방을 찾았다. 듣고 싶은 곡을 쪽지에 적어 DJ에게 전달하는 일과 LP판에서 울려 퍼지는 은근한 감성으로 인해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음악에 빠져드는 일은 라디오 방송국에 사연을 보내고 자신의 신청곡을 기다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되는 CBS 방송국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 '허윤희의 꿈과 음악 사이에'를 진행하고 있는 허윤희 DJ가 최근에 낸 책 <우리가 함께 듣던 밤>을 읽다 보면 그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통신수단이나 방송환경이 그때에 비하면 천양지차로 달라져 있기는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을, 삶의 허기를, 실연의 아픔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라디오를 듣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

 

"정답이 아닌 위로가 필요한 니들에게/끝이 보이지 않는 긴 어둠 속에서/함께 걸을 누군가를 만나는 일만큼 간절한 게 있을까.//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지 않더라도/같은 상황에 처해 있지 않더라도/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보폭으로 걷고 있음을/느낄 수 있는 사람.//드디어 도착한 긴 터널의 끝에서/웃으며 서로의 등을 토닥여줄 수 있는 사람./단 한 명이면 된다.// (p.98)

 

1부 '우리는 매일 부끄러움을 먹고 자란다', 2부 '선인장처럼 묵묵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3부 '잊지 않고, 아프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4부 '걸림돌이라 생각했던 게 실은 디딤돌이었다', 5부 '한때 내게 머물던 것들이 길을 물어 돌아올 수 있다면', 6부 '내가 머물던 세상은 어느덧 한 뼘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의 총 6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애청자들이 보내준 사연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덧붙였다. 12년째 음악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는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직업인으로서 그녀의 애환을 알게 되고 그녀 역시 다른 누군가와 자신의 아픔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기에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살았다. 매 순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안도하고 또 불안해했다. 수많은 따뜻한 사연 속에 톡 튀어나온 날카로운 글 하나를 온종일 붙잡고 괴로워했다. 피곤하고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 날은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p.192)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장 외롭고, 자신이 가장 슬프며, 자신이 가장 뒤처졌으며, 자신이 가장 약하며, 자신이 가장 한심하다고 여기는 까닭에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이 그리운 것이리라. 누군가 나에게 나누어줄 따뜻한 체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등을 토닥이는 웅숭깊은 위로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우리는 그런 모습을 차마 보일 수가 없다. 부끄럽기도 하려니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랬던 우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인해 나를 단단하게 둘러싸던 방어막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진심 어린 한마디의 위로에 감사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해지려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토닥여주는 공감과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걸 아는 나이가 되면 자신에게 남은 날들을 헤아려보게 된다. 그리고 겁도 없이 살아온 지난날보다 자신의 앞에 놓인, 앞으로 살아내야 할 날들이 더욱 아득하게만 보인다. 백 세 시대라는 말은 축복이 아니라 악몽처럼 다가오게 마련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과 같이 늙어간다는 게 과연 축복이기만 할까.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하는 진심 어린 위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 위로가 점점 줄어드는 야박한 세상이 되다 보니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밤 뜬 눈으로 지새우며 열심히 라디오를 듣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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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자신이 마치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국가의 미래나 국민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양 거짓 충성을 보이는 자들이 유독 많은 이유는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사이비 언론이 많기 때문이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그 많은 언론사가 존재한다는 것도 아이러니이지만 그들이 여전히 입에 풀칠을 하며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도 신기하다. 5 공화국 시절도 아닌데 말이다.

 

과거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언론들이 참으로 많았었다. 말이 언론이지 사기꾼 집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론사 대표는 직원들에게 월급은 물론 밥값조차 주지 않았고 직원들 역시 그것까지 요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회사 차원의 기자증 하나 발급해 줌으로써 모든 게 해결되었다. 직원들은 영세하고 어수룩한 회사를 방문하여 불법 폐수 방출 사진이나 불법 벌채 사진을 몇 컷 찍어서 기사로 쓰겠다며 으름장을 놓거나 협박을 하여 돈을 뜯어내는 식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과거에는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자증은 경찰들에게도 위협적인 도구였다. 교통위반 단속에 걸려도 기자증만 보여주면 무사통과였다. '00 환경신문' 등 이름도 거창한 사이비 언론들이 그 시절에는 차고 넘쳤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 뭘 하며 살고 있을까? 대개는 시대에 걸맞게 유튜브라는 첨단의 도구로 변신한 듯하다. 물론 신문 같지도 않은 신문으로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는 자들도 있지만 말이다. 며칠 전에 보도된 김 모 수사관의 기사를 보면서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사이비 언론이 여전히 판을 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비리 혐의로 청와대에서 퇴출되었음에도 자신이 마치 정권의 희생양인 양, 거대 권력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인 양 떠드는 그를 사이비 언론은 사실관계도 없이 옳다구나 대대적으로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청와대와 정부에 흠집을 내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제4차 산업혁명을 꿈꾸는 첨단의 시대에도 사이비 언론은 그 명맥을 꿋꿋이 유지하고 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과거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범법자를 협박하고 회유함으로써 돈을 뜯어냈지만, 최근에는 비리 혐의자를 갑자기 영웅으로 탈바꿈시켜 주겠다는 식으로 생존의 방법이 180도 달라졌을 뿐이다. 당신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누군가 당신을 영웅으로 탈바꿈시켜주겠다며 은밀히 접근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사이비 언론사의 기자는 아닌지 한 번쯤 의심해 볼 일이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경찰차 위에서 폭력을 행사하던 범법자도 그들은 영웅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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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골든아워 1~2 세트 - 전2권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골든아워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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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게 습관처럼 배어 있는 나로서는 등산로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고를 목격하는 일이 그리 낯설지가 않다. 발목이 삐거나 접질리는 일은 다반사, 그보다 훨씬 심한 부상을 입고 소방대원의 들것에 실려 산을 내려가는 모습도 이따금 보게 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분초를 다투는 치명적인 사고를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오르는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서 그런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등산객들이 몰리는 봄과 가을이면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걸 보면 무작정 안심할 일도 아닌 듯하다. 이를테면 사고는 우리의 시선 뒤편에서 이제나저제나 시기만 기다리는 유예된 위험이기 때문이다.

 

이국종의 <골든아워1, 2>를 읽었던 건 최근의 일이다. 언제부턴가 뉴스에 오르내릴 만한 굵직한 사건 사고가 있을 때마다 인터뷰에 응하던 그를 TV 화면에서 종종 보아왔었기에 나는 사실 그에 대한 이미지가 그닥 좋지 못했다. 말하자면 나는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하여 책을 내는, 소위 깜냥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주제넘게 다른 분야를 넘보는 꼴을 너그럽게 바라볼 수도 없었고, 그런 까닭에 그와 같은 책을 볼라치면 더더욱 멀리했다. 예컨대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연예인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건 책을 내는 것과 같은... 그런 책을 볼 때마다 '아이고, 하던 일이나 잘하세요. 괜한 욕심부리지 말고.'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벌목을 하며 힘들게 돈을 버는 지인 한 분이 <골든아워>를 읽어보라며 적극 추천하는 게 아닌가. 그분 역시 벌목용 전기톱날에 다리를 다쳐 오랫동안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게 벌써 수년 전의 일이다. 나도 그때 시간을 내어 병문안을 갔었는데 그분은 내게 이르길 조금만 지체했더라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거라며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갈리는 것이니 너무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는 선문답식의 모호한 말을 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그분은 내게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골든아워>를 선물로 사주고 싶다며 주소를 불러달라고도 했었다. 결국 나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골든아워>를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분의 강권 때문이었다.

 

"봄이 싫었다. 추위가 누그러지면 노동 현장에는 활기가 돌고 활기는 사고를 불러, 떨어지고 부딪혀 찢어지고 으깨진 몸들이 병원으로 실려왔다. 봄기운에 밖으로 이끌려 나온 사람들이 늘었고, 늘어난 사람만큼 사고도 잦아 붉은 피가 길바닥에 스몄다. 병원 밖이 형형색색 꽃으로 물들 때, 나는 무영등 아래 진득한 핏물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1권 p.17)

 

서문과 목차를 지나 본문의 시작은 위와 같았다. 김훈 작가를 흠모하여 그의 문장을 좇으려 애썼다는 저자의 고백처럼 간결하고 무심한 듯한 어투가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닮아 있는 듯했다. 해군에서 군생활을 했다는 그의 특이한 이력과도 잘 어울리는 듯했고, 서서히 책에 빠져들면서 나는 처음에 가졌던 편견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책은 2002년부터 2013년의 기록을 담은 1권과 2013년부터 2018년을 기록한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합 16년의 방대한 기록이 지루함 없이 읽혔다.

 

그가 기록한 책의 내용은 비단 생명을 살리는 일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의사로서 응당 그러해야 옳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가 맡고 있는 중증외상센터는 국민적 편견과 부실한 제도, 부족한 예산과 인력 부족 등 의료계의 온갖 문제를 품고 있는 문제의 온상이자 발원지나 마찬가지였다.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만 집중해야 할 의사가 부실한 의료체계의 확립을 위해 분투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언론에 나가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의사로서 너무 나대는 거 아니야?' 생각했던 것이 순전히 나의 편견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상외과 의사로서 아픈 기억들은 켜를 이루며 쌓여간다. 많은 의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술적 치료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은 끊임없이 찾아오고, 뼈아픈 기억들은 의사에게 보수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 틀리지 않다. 환자의 죽음과 보호자들이 쏟는 눈물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내 환자들이 숨을 거둘 때 나 또한 살이 베어나가듯 쓰렸고, 보호자들의 울음은 귓가에 잔향처럼 남았다." (1권 p.329)

 

간 재생 연구를 하던 외과 의사가 자리가 없어서 결국 신설 분과였던 '외상 외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학비가 없어 휴학하고 군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1권에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면을 언뜻언뜻 보여준다. 그리고 의사로서 죽어가는 환자의 생명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많은 기억들을 이 책에 쓰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그만두고 싶었던 심정을 여러 번 피력한다. 그도 그럴 것이 1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사투를 벌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사로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부와 명예를 거머쥘 다른 기회가 얼마든지 주어지기 때문일 터였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중증외상센터에서 오직 자신의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거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고지식하고 답답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맡겨지는 중증 외상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쩌면 그도 중증 외상 환자의 대부분이 일용직 노동자이거나 소외계층인 까닭에 자신마저 그들을 버리면 이 땅에 그들을 돌볼 의사가 없어지지나 않을까 크게 염려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 ……. 나는 정경원이 서 있는 한 버텨갈 것이다. '정경원이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을 이끌고 나가는 때가 오면'이라는 생각을 나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그때를 위해서 하는 데까지 해보아야 한다. 정경원이 나아갈 수 있는 길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가 나의 종착지가 될 것이다." (2권 p.316)

 

이국종, 그에게 쏠린 대중적 관심과 유명세가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책을 읽고 나서 그런 우려가 말끔히 사라지기는커녕 한층 더 깊어졌다. 나의 이런 오지랖은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본분에 투철한, 의사다운 의사를 제대로 만나본 적 없는 까닭에 그의 존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에서 영리 병원 개원이 허가되면서 대한민국의 의료 양극화가 촉발되는 게 아닌지 온 국민이 걱정하고 있는 요즘, 다른 어떠한 유혹에도 자신의 사명과 본분을 잊지 않는 의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이국종,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이유는 그는 대한민국의 의사이기 이전에 자신의 철학을 지키는 직업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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