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듣던 밤 - 너의 이야기에 기대어 잠들다
허윤희 지음 / 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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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닌데 학창 시절의 기억은 때론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그 시절을 경계로 아날로그 시대는 종말을 고했는지도 모른다. 친구들은 모두 라디오 프로그램을 줄줄이 꿰고 있었고, 우편엽서에 사연과 함께 신청곡을 자필로 꾹꾹 눌러 담아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에 줄기차게 보내고, 혹시나 자신의 사연이 소개될까 싶어 이제나저제나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은 물론 유행하는 노래를 테이프에 담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곤 했었다. 투박하지만 순수한 낭만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귀로 듣는 것이 더 좋았던, 눈을 감고도 세상의 흐름을 잘 감지할 수 있었던 그 시절에는 나이를 먹는 것도 무척이나 더뎠고 그만큼 사람들의 심성 또한 순하고 부드러웠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도 음악다방을 찾았다. 듣고 싶은 곡을 쪽지에 적어 DJ에게 전달하는 일과 LP판에서 울려 퍼지는 은근한 감성으로 인해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음악에 빠져드는 일은 라디오 방송국에 사연을 보내고 자신의 신청곡을 기다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되는 CBS 방송국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 '허윤희의 꿈과 음악 사이에'를 진행하고 있는 허윤희 DJ가 최근에 낸 책 <우리가 함께 듣던 밤>을 읽다 보면 그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통신수단이나 방송환경이 그때에 비하면 천양지차로 달라져 있기는 하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을, 삶의 허기를, 실연의 아픔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라디오를 듣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다.

 

"정답이 아닌 위로가 필요한 니들에게/끝이 보이지 않는 긴 어둠 속에서/함께 걸을 누군가를 만나는 일만큼 간절한 게 있을까.//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지 않더라도/같은 상황에 처해 있지 않더라도/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보폭으로 걷고 있음을/느낄 수 있는 사람.//드디어 도착한 긴 터널의 끝에서/웃으며 서로의 등을 토닥여줄 수 있는 사람./단 한 명이면 된다.// (p.98)

 

1부 '우리는 매일 부끄러움을 먹고 자란다', 2부 '선인장처럼 묵묵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3부 '잊지 않고, 아프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4부 '걸림돌이라 생각했던 게 실은 디딤돌이었다', 5부 '한때 내게 머물던 것들이 길을 물어 돌아올 수 있다면', 6부 '내가 머물던 세상은 어느덧 한 뼘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의 총 6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애청자들이 보내준 사연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덧붙였다. 12년째 음악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는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직업인으로서 그녀의 애환을 알게 되고 그녀 역시 다른 누군가와 자신의 아픔을 공유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기에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살았다. 매 순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안도하고 또 불안해했다. 수많은 따뜻한 사연 속에 톡 튀어나온 날카로운 글 하나를 온종일 붙잡고 괴로워했다. 피곤하고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 날은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p.192)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장 외롭고, 자신이 가장 슬프며, 자신이 가장 뒤처졌으며, 자신이 가장 약하며, 자신이 가장 한심하다고 여기는 까닭에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이 그리운 것이리라. 누군가 나에게 나누어줄 따뜻한 체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등을 토닥이는 웅숭깊은 위로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우리는 그런 모습을 차마 보일 수가 없다. 부끄럽기도 하려니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랬던 우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인해 나를 단단하게 둘러싸던 방어막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진심 어린 한마디의 위로에 감사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해지려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토닥여주는 공감과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걸 아는 나이가 되면 자신에게 남은 날들을 헤아려보게 된다. 그리고 겁도 없이 살아온 지난날보다 자신의 앞에 놓인, 앞으로 살아내야 할 날들이 더욱 아득하게만 보인다. 백 세 시대라는 말은 축복이 아니라 악몽처럼 다가오게 마련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과 같이 늙어간다는 게 과연 축복이기만 할까.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하는 진심 어린 위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 위로가 점점 줄어드는 야박한 세상이 되다 보니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밤 뜬 눈으로 지새우며 열심히 라디오를 듣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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