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이다 - 세스 고딘의
세스 고딘 지음, 김태훈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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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카루스 이야기>를 관심 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 구루이며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세스 고딘을 알게 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카루스 이야기>의 저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세스 고딘에 대한 기억은 내게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런 까닭에 세스 고딘의 이름이 붙은 책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케팅이다>와 같은 뜬금없고 생뚱맞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세스 고딘의 신간 <마케팅이다>를 읽으면서 나는 경제학을 전공했던 나의 오래전 기억을 억지로 소환해야만 했다. 기억마저 희미해진 해묵은 지식은 별 도움이 되지도 않았지만.

 

"이 책은 바로 그 뿌리에 대한 이야기다. 꿈과 욕망 그리고 당신이 섬기고자 하는 공동체에 당신이 하는 마케팅을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문제를 다룬다. 사람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게 하고, 당신이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장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이끄는 문제를 다룬다." (P.11)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케팅 책을 읽지는 않는다. 마케팅이나 경영에 관련된 책을 읽는 시기는 오히려 장사를 계획할 때 잠깐일 뿐이다. 그러므로 막상 장사를 시작하고서부터는 계획이나 전략에 의존하기보다 운이나 인맥에 상당 부분 의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장사가 잘 돼도 운이 좋은 것이요, 장사가 안 돼도 운이 나쁜 탓일 뿐이다. 자신의 마케팅 실력이나 경영 전략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내 주변에도 지금 실제로 장사를 하고 있거나 머지않은 장래에 장사를 하려고 계획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까닭에 그들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마케팅 관련 서적은 실전이 아닌 이론일 뿐이다. 마치 실전 경험이 없는 공무원이 책상머리 대책을 내놓는 것처럼.

 

총 23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장마다 펀딩 프로젝트의 담당자, 연봉을 협상하는 회사원, 부서를 키우려는 팀장, 혹은 스스로 고객을 관리하는 프리랜서 등 사례별로 적용할 수 있는 마케팅 전략을 세세하게 담아냈다. 하루 밤에 1억 100만 달러를 펀딩한 로빈 후드 재단, 1만 8000 유튜브 조회수를 갖게 된 영화 제작자 케이시 네이스탯 등의 사례를 통해 저자는 마케팅의 이론적 고찰을 꾀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부합할 수 있는 트렌디한 마케팅 방법을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핵심은 당신이 진입하려는 시장, 그 시장에 존재하는 필요, 경쟁자, 기술 표준, 과거의 성공사례 및 실패사례다. 구체적일수록 좋다. 현장의 지식이 많을수록 좋다. 이야기가 생생할수록 좋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점은 당신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분명하게 밝히고, 당신의 가정에 대한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 것이다. 이 부분은 당파적이지 않다. 즉,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실정을 기술한다." (P.210)

 

우리는 현실과 이론이 서로 부합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서로를 이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실 참여자에게 이론은 그저 책 속의 이론으로 존재할 뿐이다. 어쩌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있어 그와 같은 이론은 지극히 허무맹랑하거나 현실에서는 한참이나 멀어진, 그야말로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이야기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스 고딘의 통찰과 맛깔나는 입담은 그동안 우리가 지속해왔던 통념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는 지식이 우리의 현실적인 고민을 해결하고 나아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다시 꿈꾸게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한다.

 

"당신이 빚은 그릇이 가마에서 깨졌다고 해서 당신이 좋은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단지 그릇이 깨졌고, 도예 수업을 받으면 실력이 나아질 것이라는 뜻일 뿐이다. 당신은 더 잘할 수 있다. 마케터로서 당신이 적절한 사람들에게 가르치거나 팔려는 더 나은 것이 당신이 매기는 가격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선기금을 모으려 한다면, 100달러나 1,000달러 또는 100만 달러를 기부하는 사람들은 그 비용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을 때만 기부할 것이다. 1,000달러에 기기를 팔려한다면, 그 기기가 1,000달러보다 가치 있다고 믿는 사람들만 살 것이다. 마케팅은 세상에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호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당신이 기여하고자 하는 변화를 마케팅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훔치고 잇는 것이다." (P.359)

 

우리는 종종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마케팅 기술이나 노하우가 단지 책 속의 허황된 주장이나 이야기쯤으로 인식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마케팅 관련 서적이 내가 처한 눈 앞의 현실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지기도 하거니와 순간순간 변하는 현실의 시장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론보다는 임기응변의 순발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까닭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다소 딱딱하게 읽힐 수 있는 마케팅 관련 서적이 에세이처럼 술술 읽혔던 것은 아마도 여러 사례를 통한 현실적 기술과 저자의 쉬운 설명이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저자의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 혹은 마케터가 자신의 진심이 통하지 않거나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당신의 '존재 이유'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며 단지 중요한 일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서 하나의 경로가 제외된다는 뜻일 뿐'이라고 위로한다. '이제 새로운 길을 찾으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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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 - 제9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2
황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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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내서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이 더러 있다. 놀라움은 대개 그런 것들에서 비롯된다. 아무도 볼 수 없으니 그러려니 무시하고 지내다가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국면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겨우 알아채는 것들. 자녀를 키우다 보면 그와 같은 일들을 수시로 겪게 된다. 걱정과 불안 속에 시작되는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형성되는 교우관계, 담임 선생님과의 관계 등 아이의 사회성에 대한 의심과 걱정은 고등학생이 되어도 끝나지 않는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아들 역시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성장했다. 사회성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숫기가 없는 아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짝처럼 붙어다녔던 두 명의 절친이 있다. 그러나 올해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한 명은 같은 학원에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번꼴로 얼굴을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황영미 작가의 소설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는 중학교 2학년인 주인공 다현을 통해 아이들 세계의 관계맺기와 만연한 따돌림, 그리고 청소년기의 고민과 피할 수 없는 여러 과정, 이를 극복하면서 맞는 한뼘 성장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 준다. 작가는 현실감 있는 언어와 어색하지 않은 상황 설정을 통해 청소년기의 학생뿐 아니라 다른 어떤 세대의 사람이 읽어도 이야기에 쉽게 동화될 수 있도록 한다.

 

소설은 중학교 2학년이 된 다현의 반 배정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 시절 은따를 경험한 바 있는 다현은 친구를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단톡방 '다섯 손가락'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행운으로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반 배정은 그닥 나쁘지는 않았다. '다섯 손가락' 멤버 중 미소와 설아는 각자 다른 반이 되었지만 아람이와 병희가 한 반이 되었고, 담임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다섯 손가락'이 선정한 밉상 2위인 노은유가 짝이 되면서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국어 선생님인 담임이 반 아이들에게 모둠 과제로 마을신문 만들기를 내주었다. 다현의 모둠이 된 아이는 모두 네 명. 다현과 그녀의 짝인 노은유, 시후와 해강이 모둠으로 정해졌다. 같은 모둠이기는 하지만 '다섯 손가락' 멤버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은유와 가까이 지내기라도 하면 단톡방 멤버들로부터 압박을 받을 게 뻔한 상황. 설상가상으로 모둠의 회의 장소가 은유네 집으로 정해지면서 다현은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첫날 모임은 치과 예약을 핑계로 빠지기로 했다. 그러나 모둠 멤버들과 딱 마주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은유네 집으로 가게 되는데...

 

"은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파편처럼 와서 나한테 박혔다. 저렇게 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경지를 나는 안다. 저 말에 실린 무게도, 그것은 말이 아니라, 켜켜이 쌓인 그리움이다." (p.82)

 

변호사인 은유의 아버지는 이따금 방송에도 출연하는 유명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은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남에 살던 은유네는 고모가 사는 아파트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은유는 그때의 충격으로 대인기피증을 앓는 것처럼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다. 엄마가 없는 은유네 집은 공간은 넓지만 꾸미거나 정리가 되지 않은 듯 황량했다. 은유와의 만남이 계속되면서 '다섯 손가락' 멤버들과의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 단톡방에서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고, 멤버들이 밉상 1위로 꼽았던 황효정이 자신을 대신해 멤버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영화를 좋아한다는 은유 역시 가곡이랑 클래식을 좋아하는 다현만큼이나 '진지충'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다.

 

"체리필터의 <낭만 고양이>. 내 비공개 블로그 '체리새우'의 배경음악이다. 배경음악은 자주 바뀐다. 이 노래 말고도 좋은 노래를 많이 올려 놓았다. 책 읽다가 발견한 좋은 문장이나 내가 찍은 동네 풍경도 있다. 체리새우 블로그는 내가 좋아하는 걸 다 말하는 공간이다. 물론 비공개로." (p.20)

 

학원도 다니지 않고, 혼자 있어도 어색하지 않으며, 독립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은유. 사고로 아빠를 잃은 후 마을에서 조그만 우동 가게를 하는 엄마와 함께 알콩달콩 살아가는 다현. 다현 역시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모둠의 만남이 늘어갈수록 은유 쪽으로 살짝 마음이 기우는 다현. 다현은 자신을 '다섯 손가락'의 멤버로 이끌어주었던 설아에게 은유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심정과 짝사랑하는 남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러나 자신의 비밀을 지켜주리라 믿었던 설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야기가 단톡방에서 오가는 것은 물론 밉상이라던 황효정을 다현의 짝남과 맺어주려 하는 걸 보면서 다현은...

 

"어차피 우리 모두는 나무들처럼 혼자야. 좋은 친구라면 서로에게 햇살이 되어 주고 바람이 되어 주면 돼. 독립된 나무로 자라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 그러다 보면 과제할 때 너희처럼 좋은 친구도 만나고, 봉사활동이나 마을 밥집 가면 거기서 또 멋진 친구들을 만나. 그럼 됐지 뭐." (p.156~p.157)

 

다현은 이제 비밀글로 하던 자신의 블로그를 공개로 전환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시선이 어떻든 간에 '그래, 나 진지충이다. 어쩌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향해 한 발 나아가는 다현. 그런 다현을 위로하는 댓글들이 다현의 블로그에 올라온다. 몸집이 자랄 때마다 주기적으로 탈피를 한다는 체리새우처럼 소설 속 다현이도 자신의 블로그를 공개함으로써 '비밀'이라는 껍질을 벗고 세상으로 나아갔던 게 아닐까. 어른들의 걱정과 불안이 우리의 아이들을 세상으로부터 꽁꽁 가두고, '비밀'이라는 껍질 속으로 숨어들게 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아이들로부터 그들의 '실수할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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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꼭 하나 배우고 싶은 기술이 있습니다. '과거를 다루는 기술'입니다. 인생 전체를 통해서도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기술이기도 하고, 아무리 갈고닦아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충격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도 아주 손쉽게 무뎌질 수 있는 허약한 기술이기도 하지요. 예컨대 질병이나 죽음, 경제적 파산이나 돌이킬 수 없는 사고 등으로 인한 충격은 아름답기만 하던 과거를 무지막지한 괴물로 변신시키는가 하면 그 괴물이 한 사람의 잔여 삶 전체를 통째로 삼켜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라는 괴물 앞에서 아주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통제하고 언제든 과거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꼼꼼히 기록함으로써,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곤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벌어진 가수 정준영의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전자 기계에 남겨진 자신의 기록으로 인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무너지거나 큰 타격을 감수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과거 기록을 철저히 소각하거나 지우려 했던 전두환에게서 보는 것처럼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과거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게도 되고, 자신의 과거를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마치 남의 일인 양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나의 과거이지만 나의 의지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나는 과거라는 게 그 자체로서 생명을 가진 별개의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과거라는 존재와 나는 내가 생명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서로 협조하고 상생하면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다루는 기술'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기술이지만 아무도 연마할 수 없는 허황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력을 과거라는 존재에 조금씩 빼앗기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넘겨줌으로써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닐지... 봄볕 완연한 휴일 오후, 아슴아슴 졸음이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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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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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하루가 또 그렇게 아슬아슬한 시간 속으로 사라집니다. 문명의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적과 아군,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뚜렷이 한다는 것이고, 그와 같은 경계를 높이 세울수록 우리 곁에서 평화는 멀어진다는 것이요, 생명에 대한 우리의 도덕성은 한없이 추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문명의 공간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위태로운 시간들을 함구한 채 비겁의 시간을 견뎌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2003년 노밸문학상 수상 작가인 J.M. 쿳시의 대표작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문명의 역사를 쓰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뒷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영어권 소설가 중 가장 유명한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쿳시는 그의 다른 작품 <추락>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품위와 야만성을 가장 밑바닥까지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때로는 그의 묘사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참혹한 것이어서 질끈 눈을 감고 싶을 때도 더러 있지만 작가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습니다.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지금은 야만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p.66)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어느 제국의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입니다.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 경작지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변경의 하급 관리를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법정업무를 주재하는 게 '나'의 주된 업무입니다.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살다 가는 것 이상을 바란 적 없는 소박한 야망의 소유자이기도 한 '나'는 야만인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변경의 치안판사로서 야만인들에 대한 경계보다는 상생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정의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는 '나'의 철학에 기초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가 누리던 평화는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야만인 부족들이 연합전선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징후와 함께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변경의 불안한 징후를 잠재우기 위해 수도에서 파견한 보안청 소속의 졸 대령과 경찰들은 변경의 유목민들이나 원부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특별한 죄목도 없이 고문을 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취조를 합니다. 졸 대령이 보고를 하기 위해 수도로 돌아간 후'나'는 졸 대령이 끌고 왔던 야만인 여자를 돌봐주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당해 눈이 멀고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비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나'는 야만인 여자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과 동정심, 남자로서의 성적 욕망을 동시에 느낍니다. 졸 대령이 수도로 떠난 후 겨울, '나'는 야만인 여자를 '나'의 숙소에 머물게 합니다. '나'는 예전처럼 고전을 읽고, 수집한 유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호숫가에서 영양을 사냥하는 등 평화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녀를 어루만지는 행위를 하다가 도끼로 찍힌 것처럼 잠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녀의 몸 위에 엎어진 채 망각 속으로 빠져들다가 한두 시간 후에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목이 마른 상태로 잠에서 깬다. 꿈조차 꾸지 않는 이 상태가 나에게는 죽음, 혹은 시간 밖에 존재하는 텅 빈 황홀경 같다." (p.54)

 

변경에서 삼 년간의 복무연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을 대체할 징집병 파견부대가 도착을 했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나'는 야만인 여자를 그녀의 부족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두 명의 파견병과 사냥꾼 한 명을 대동하고 말이죠. 잔혹한 날씨와 험한 지형을 뚫고 마침내 '나'는 여자를 그녀의 부족에게 인계한 후 무사히 되돌아 옵니다. 그러나 보고도 없이 여러 날 자리를 비웠던 게 화근이 되어 '나'는 곧바로 수감됩니다.

 

"나는 처음 감방에 들어와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건 큰 고통이 아닌 듯했다. 생각과 기억을 갖고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p.142)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나'는 잔인한 고문과 갖은 수모를 겪게 됩니다. 내가 수감되어 고초를 겪는 동안 졸 대령이 이끄는 정규 부대는 야만인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을 합니다. 마을에 남겨진 군인은 많지 않았습니다. 원정을 떠난 부대로부터는 연락이 없고 야만인들의 반격이 있은 후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게 됩니다.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농사를 망친 까닭에 사람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마을을 떠납니다. 간수들도 이제 '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떠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겨울을 대비합니다. '나'는 이제 치안 판사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야만인들에게 패한 후 졸 대령 일행이 초라한 모습으로 복귀하는데...

 

"그들은 언젠가 자기들도 아버지처럼 강해지고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잘 낳을 것이며,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잘 살다가 늙어가리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 사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걸까?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p.219)

 

문명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언제나 '야만인'이라는 가상의 적을 상정하곤 합니다. 가까운 과거의 기록을 보더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나 시리아 내전이 그러했고, 최근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총기 테러 사건이 그렇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남과 북 역시 각자의 마음 속에 가상의 야만인을 품은 채 서로에 대한 적대감만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쿳시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나'를 통해 말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이며, 정의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작가는 우리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역사의 바다에 저마다의 부표를 띄운 채 영역 밖 야만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역사의 바다를 항행하는 우리들의 불안한 하루가 아슬아슬한 시간 속으로 또 그렇게 무참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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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국회에서 나경원 원내대표의 연설이 있어서 하는 얘기지만 공인이라면 누구든 피해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가족관계나 친일의 이력, 혹은 성형과 같은 사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감추고 싶었던 비밀도 대중에게 그 일단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로 인해 붙여지는 별명은 일종의 낙인찍기와 진배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끝없이 전파된다는 점에서 비밀의 탄로보다 더 괴로울지도 모른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대통령을 향해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이라고 했던 것에 대해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다.

 

나경원 원내대표 역시 이와 같은 별명에서 자유롭지 않다. 일본식 냄비요리 나베를 포털에서 검색하면 '나경원 나베'가 연관 검색어로 뜨기도 하고, '자위녀', '국썅' 등 입에 담기도 좀 뭣한 별명들이 검색어에 줄줄이 올라온다. 나베는 일본 극우 아베 자민당을 벤치마킹하자는 나경원 원내대표를 합친 말이고, 자위녀와 국썅은 2004년 서울의 모 호텔에서 개최된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장에 참석하면서 얻게 된 별명이다.

 

사실 어제의 원내대표 연설은 연설문이라기보다 그동안 쌓아온 감정의 배설이나 다름없었다. 연설문을 본인이 썼는지 아니면 보좌관이 써줬는지 알 수 없지만 초등학생의 반장 선거 연설문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준 낮은 연설문이었다. 물론 나경원 원내대표의 어제 모습으로 봐서는 연설문의 격이나 수준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일본의 거대 커뮤니티 5CH(5 채널)에서는 나경원 원내대표의 국회 연설로 난장판이 됐다는 소식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고 한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에 대한 혐한 성향의 일본 네티즌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어제 있었던 나경원 원내대표의 연설은 그녀 스스로 자신이 친일 자위녀임을 제대로 시인한 셈이었다. 그런 면에서 어제의 국회 연설은 자위녀의 커밍아웃 현장이나 진배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본인도 만족했는지 그녀는 환한 얼굴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퇴장했다. 국민들의 생각이야 어떻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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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3-1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베의 프레임에 말려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선거법 개정 패스트트랙에 태울 테니
공언한 대로, 모두 총사퇴해주시면 좋겠네요.

꼼쥐 2019-03-16 19:10   좋아요 0 | URL
선거법을 패스트트랙에 태우는 것도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총사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