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벚나무 가로수는 그 쓰임이 오직 꽃에 한정되는 까닭에 꽃이 지고 까맣게 열매를 맺는 늦봄이면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한다. 오늘처럼 바람 불어 까만 버찌가 인도를 가득 메운 날이면 무심한 행인의 발에 밟혀 어수선한 보도블록 위로 버찌 과즙이 그려내는 보라색 추상화 물결이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잡는다. 초록의 잎새 사이로 점점이 박힌 버찌. 횡재를 한 참새만 온종일 즐겁고, 어린 은사시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뒤집힌다. 나뭇잎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부서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 온 뒤의 짙어진 하늘이 언뜻언뜻 비친다.

 

무심한 듯 더없이 찬란했던 하늘을 보며 문득 들었던 생각은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의 유불리를 알 만한 나이가 되면 우리는 좋든 싫든 어느 한 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이었다. 지난 24일 최영함 입항 행사 중 발생한 홋줄 사고로 숨진 최종근 하사를 조롱하는 워마드 회원들과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일반 국민들, 한-미 정상 간의 통화 내용 유출을 외교기밀 유출로 보는 대다수의 국민과 공익제보라고 우기는 몇몇 자유당 의원들, 그 모든 게 남과 여의 성별에 의한 나뉨이든, 보수와 진보에 의한 이념의 구분이든 각자의 선택에 따라 어느 한편에 서게 됨은 피할 수 없는 일, 결국 '객관'이나 '상식'은 우리 곁에서 저만치 멀어지는 게 아닌가.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봉준호 감독도 지난 박근혜 정권하에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몇 년 동안은 상당히 악몽 같은 기간이었다. 한국 예술가들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말했던 봉준호 감독. 필요한 정보가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객관'이나 상식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어쩌면 그 중심에는 극우 정신병자들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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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행복한 수채화 캘리그라피
박나미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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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해진다는 건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여러 생각 중 단 하나의 생각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건 그야말로 능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원한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몰입'도 이와 같은 능력이다.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도통 딴생각이 나지 않는 상태를 '몰입'이라고 한다면 결국 '몰입'이나 '집중' 혹은 '단순한 상태'는 능동적으로 선택하기는 어렵지만 재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수동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는 데서 우리는 일말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젊은 시절에야 재미있는 게 너무나 많아 어떤 걸 선택해야 할지 오히려 그게 더 어려운 문제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웬만한 일은 이미 다 한 번 이상의 경험이 있는 터라 젊은 시절처럼 쉽게 재미를 발견할 수가 없다. 시도도 해보기 전에 '저거 내가 해봤는데 별 재미도 없었어.' 하는 생각이 먼저 들고,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시도는커녕 관심조차 갖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러니 안 하던 어떤 일을 시도한다는 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게다가 돈벌이와 직결되지 않는 취미나 봉사 등 단순히 재미나 삶의 보람과 같은 심리적 안정을 목적으로 하는 일들은 일단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게 당연할 터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내가 취미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던 건 직장으로 인해 주말부부로 살게 되면서부터였다. 일을 하지 않는 여유 시간에도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했던 나는 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그도 아니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시간을 함께 보내줄 사람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큰둥한 상태가 된 후로는 도무지 삶의 재미라곤 발견하기 힘든 무미건조한 나날들이 계속되었고, 그때 찾은 취미가 그림 그리기였다. 학창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에는 젬병이었던 나로서는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래서인지 조금의 성취에도 기뻐할 수 있었고, 기쁨은 곧 잘하지도 못하는 그림 그리기를 지속 가능한 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그림 그리기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그와 함께 스트레스는 나날이 쌓여가던 와중에 새로운 책에 시선이 꽂혔다. 그것은 바로 박나미의 <생활 속 행복한 수채화 캘리그라피>. 손글씨도, 그림 그리기도 재능이 없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시도할 수 있게 하는 책.

 

"잘 그려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리고 쓰면서 느끼는 행복을 담아 보세요. 글과 그림은 서로 도와가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고 빛내 주며, 효과적으로 의미를 전달해 주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렵지 않고 재밌게 수채화 캘리그라피 소품을 완성하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해 보세요. 바쁜 생활에 지쳐 잠시 잊고 있었던 따뜻한 감성이 살아남은 물론,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Prologue' 중에서)

 

저자인 박나미 역시 회계학과를 졸업한 후 공기업과 증권회사에서 10년을 근무한 평범한 직장인이었단다. 캘리그라피와의 인연이라곤 어렸을 때 서예학원에 다녀본 것이 전부란다. 취미로 시작한 수채화와 캘리그라피에 큰 매력을 느껴 2016년부터 재피공방을 열었고 최근에는 울산으로 이사하여 공방을 계속 운영하며 수강생에게 저자가 느낀 즐거움과 노하우를 알려주고 있단다.

 

 

책의 내용이나 구성은 마음에 쏙 들었다. '수채화 입문하기', '캘리그라피 입문하기', '수채화 캘리그라피 디지털화하기', '수채화 캘리그라피 생활 속에서 활용하기'의 총 네 파트로 구성된 이 책은 진작부터 내 맘을 사로잡았지만 정작 나는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가족 행사도 많았고 챙겨야 할 기념일도 많았던 5월, 나는 먼지 쌓인 그림 도구를 꺼내 놓고 필요한 붓펜과 샤프, 피그먼트펜 등 필요한 도구를 겨우 구입했을 뿐이다.

 

나날이 열기를 더해가는 날씨.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여름을 건강하게 나기 위해서 나는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어쩌면 날씨를 잊고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순해진다는 건 여름을 건강하게 날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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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더위가 전국 곳곳을 후끈 달구고 있다. 이런 날씨에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니라면 웬만한 소식은 모두 짜증부터 나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사실을 감정이 두 겹 세 겹 에워싸는 꼴인데 이게 꼭 오늘처럼 날씨가 몹시 더울 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닌 듯하다. 게다가 어떠한 사실을 이념이나 감정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사실을 사실 그대로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사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담백한 심성을 갖는다는 건 개인의 수양이나 지적 소양, 또는 강한 인내심의 발현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최근에 벌어진 일들만 보아도 그렇다. 자유당의 모 국회의원이 한미 정상 간의 통화 내용을 유출함으로써 국익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음은 물론 그것은 자유당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수 있을 듯한데 그것마저 공익이나 국민의 알 권리 운운하며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뿐만이 아니다. 지난 12일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에서 황 대표가 합장 등 불교의식을 따르지 않았던 게 사실인데 그걸 굳이 종교의 자유로 변명을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차라리 자신의 종교는 개신교이고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그럴 리는 없겠지만) 불교와 가까이할 의사가 없다고 떳떳이 밝히는 게 더 자연스럽다. 최근에 공개된 '최순실-박근혜=정호성 녹음파일'을 들어보더라도 지난 정부는 박근혜가 아닌 최순실이 실질적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마저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실은 그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이태동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여름 소나기의 정열이나 자연과 함께 하는 데서 느낄 수 있는 풍요로움으로 인해 일 년 사계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고 썼다.

 

"그러나 풍요로운 여름은 낭만의 계절만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먹구름과 천둥소리 속에 무덥고 길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름은 그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밀어낼 수 있는 수많은 전설을 잉태하고 있다. 이렇게 내가 여름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은 뭇 생명들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고 삶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뜨거운 생명력이 이 계절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묘지 위의 태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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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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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소설집에 실린 여러 편의 단편소설 중 한 편만 겨우 읽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그래도 그게 꽤나 의미 있는 일로 여겨졌던 건 아마도 이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과 개중에는 나의 취향에 맞는 소설 유형을 발견하기도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건 어쩌면 유불리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말하자면 놀이나 유흥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어내기 위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아깝다거나 불편하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작가 탐색에 나선다는 게 맞다. 많은 작가를 안다는 게 더 이상 자랑거리도 아니고 또래의 다른 친구들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게 자랑거리였던 시절은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우리는 종종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들도 먼 훗날의 어떤 시점에서 흐릿한 기억에 의지하여 차근차근 되짚어볼 때 기억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감정을 확연하게 깨닫게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현재'라는 이 시간은 오직 '나'에게만 매여 있고 나 외에는 눈길을 줄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지금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출입이 허용되는 과거의 어떤 시점이 되는 까닭에 우리는 그때 왜 그랬느냐? 고 상대방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 분들, 농담을 주고받기가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p.93)

 

미국 작가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포함하여 열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로 인해 단편 부문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하였고, 미국 현대 문학의 기수로 떠올랐다. 신예 작가가 그것도 데뷔작만으로 이런 놀라운 성취를 이뤘다는 건 꽤나 놀라운 일이지만 그의 여리고 섬세한 문체는 책을 읽는 독자들의 오래된 기억을 건드리고, 잊고 있었던 상처를 주무르며, 이따금 북받쳐 오르는 슬픔으로 인해 눈물 한 방울쯤 흘리게 한다.

 

브라운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헤더. 그녀는 가을학기 기말 고사장에 있다. 시험지에는 달랑 하나의 어려운 방정식 문제가 적혀 있었고, 학생들은 항의의 표시로 다들 나가버렸다. 마지막까지 문제를 풀었던 건 헤더가 유일했다. 헤더보다 30살이나 많은 로버트 교수는 차나 한 잔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아내와 별거한 채 혼자 살고 있는 로버트. 그의 아파트는 대학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로버트는 헤더에게 크리스마스와 방학 계획에 대해 묻는다. 그것을 계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

 

"이제 로버트와 나는 더 이상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들 삶의 내밀한 사정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 우리를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우리가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추억하기조차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유년의 순간들.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에는 자유가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하는 얘기는 절대 그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p.108)

 

로버트는 헤더에 대해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던 까닭에 헤더가 어떤 말을 하건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거나 헤더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로버트와의 만남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던 건 헤더가 남자친구를 사귀면서부터였다. 의과대학 예과 졸업반이었던 콜린은 총명하고 야심찬 친구였다. 수영부의 선수로도 활동하고 있던 콜린은 헤더의 기숙사에 드나들게 되고, 헤더는 콜린의 눈을 피해 로버트와의 만남을 어렵게 이어간다. 학생과 교수의 만남이 알려지면 파면이 될 수도 있는 까닭에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로버트의 아파트에서 이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술 한 잔 하자는 로버트의 느닷없는 제안에 따라나섰던 헤더. 그날은 콜린이 수영부 뒤풀이에 참석했던 날이었다. 로버트와 헤더가 찾아간 술집에서 콜린과 마주치게 되고...

 

"돌이켜보면, 그날 밤 이후 내가 우울증에 빠졌다고 여겨질 수 도 있겠으나, 나는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던 내 삶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의사의 아내였고, 이제 큰 이변이 없는 한 나 역시 의사의 아내가 될 터였다." (p.119)

 

헤더는 결국 로버트와 헤어진 후 콜린과 결혼한다. 존스 홉킨스 의대 본과에 진학하기 위해 콜린과 헤더는 볼티모어로 이사한다. 헤더는 졸업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헤더는 편지를 통해 로버트와의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콜린이 졸업반이던 해 뜸하던 편지마저 끊기고 만다. 대학을 졸업한 콜린은 수련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한다. 잠자는 시간도 부족할 만큼 바빴던 콜린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수련의 과정도 끝나가던 어느 날 한때 물리학을 공부했던 콜린의 동료로부터 로버트 교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날 헤더는 콜린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펑펑 울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p.129)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에게 끌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판단은 많아지고, 그 판단에 근거하여 간섭도 늘어난다. 결국 관계를 망치는 가장 큰 적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인 셈인데,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기대는 커지게 마련이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예컨대 아이는 부모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지만, 부모는 아이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까닭에 부모는 아이를 좋아할 수밖에 없고 아이는 부모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연인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헤더가 로버트를 좋아했던 건 로버트가 헤더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대방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기대가 크지 않으면 오히려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청개구리 심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튼 사람의 심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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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인생에 단 한 번 또래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게 자랑이 되는 시기를 지나치게 된다. 그저 스치듯 보았던 것도, 한참이나 나이 든 후에는 고도의 집중력으로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아주 상세히 기억하던 그 시기에 우리는 필요가 아닌 경쟁을 목적으로 지식을 쓸어 담는다. 마치 노름판에서 숨겨놓았던 자신의 패를 뒤집는 것처럼 비록 언제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조만간 있을지도 모르는 대결에서 남들이 모를 만한 비장의 지식을 선보이겠다는 야심. 그런 허황된 꿈이 그 나이대에 있음 직한 여러 유혹들을 뿌리치게 하던...

 

그러나 많이 안다는 게 또는 남들보다 많이 기억한다는 게 부담스럽거나 죄스러워지는 시기가 오고야 만다. 견딜 수 없는 죄스러움으로 인해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 덜어내는 어느 치매 환자의 서글픈 노력에서 우리는 망각의 미덕을 떠올리게 된다. 기억하는 것도, 기억을 털어내는 것도 어느 시기에는 꼭 필요한 일이구나, 깨닫는 건 꽤나 쓸쓸한 일이다. 자신의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기억하는 일도, 기억을 지우는 일도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진행된다는 걸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은 오늘, 오늘은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이 있는 날.

 

기억은 때로 사람의 육체마저 무겁게 하는 까닭에 삶의 무게는 기억의 무게에 비례하여 증가하지만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건, 세상에 없는 누군가와의 추억을 가슴에 품는다는 건 '그리움'으로 포장된 또 다른 업(karma). 누구나 인생에 단 한 번 기억이 자랑이던 시기를 지나쳐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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