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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한 권의 소설집에 실린 여러 편의 단편소설 중 한 편만 겨우 읽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그래도 그게 꽤나 의미 있는 일로 여겨졌던 건 아마도 이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과 개중에는 나의 취향에 맞는 소설 유형을 발견하기도 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건 어쩌면 유불리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말하자면 놀이나 유흥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어내기 위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아깝다거나 불편하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작가 탐색에 나선다는 게 맞다. 많은 작가를 안다는 게 더 이상 자랑거리도 아니고 또래의 다른 친구들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게 자랑거리였던 시절은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지만 말이다.
우리는 종종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들도 먼 훗날의 어떤 시점에서 흐릿한 기억에 의지하여 차근차근 되짚어볼 때 기억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감정을 확연하게 깨닫게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현재'라는 이 시간은 오직 '나'에게만 매여 있고 나 외에는 눈길을 줄 수 없는 게 사실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지금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출입이 허용되는 과거의 어떤 시점이 되는 까닭에 우리는 그때 왜 그랬느냐? 고 상대방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 분들, 농담을 주고받기가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p.93)
미국 작가 앤드루 포터의 단편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포함하여 열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소설로 인해 단편 부문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하였고, 미국 현대 문학의 기수로 떠올랐다. 신예 작가가 그것도 데뷔작만으로 이런 놀라운 성취를 이뤘다는 건 꽤나 놀라운 일이지만 그의 여리고 섬세한 문체는 책을 읽는 독자들의 오래된 기억을 건드리고, 잊고 있었던 상처를 주무르며, 이따금 북받쳐 오르는 슬픔으로 인해 눈물 한 방울쯤 흘리게 한다.
브라운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헤더. 그녀는 가을학기 기말 고사장에 있다. 시험지에는 달랑 하나의 어려운 방정식 문제가 적혀 있었고, 학생들은 항의의 표시로 다들 나가버렸다. 마지막까지 문제를 풀었던 건 헤더가 유일했다. 헤더보다 30살이나 많은 로버트 교수는 차나 한 잔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아내와 별거한 채 혼자 살고 있는 로버트. 그의 아파트는 대학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로버트는 헤더에게 크리스마스와 방학 계획에 대해 묻는다. 그것을 계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
"이제 로버트와 나는 더 이상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들 삶의 내밀한 사정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 우리를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우리가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추억하기조차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유년의 순간들.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에는 자유가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하는 얘기는 절대 그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p.108)
로버트는 헤더에 대해 미래를 기대하지 않았던 까닭에 헤더가 어떤 말을 하건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거나 헤더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로버트와의 만남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던 건 헤더가 남자친구를 사귀면서부터였다. 의과대학 예과 졸업반이었던 콜린은 총명하고 야심찬 친구였다. 수영부의 선수로도 활동하고 있던 콜린은 헤더의 기숙사에 드나들게 되고, 헤더는 콜린의 눈을 피해 로버트와의 만남을 어렵게 이어간다. 학생과 교수의 만남이 알려지면 파면이 될 수도 있는 까닭에 그들의 만남은 언제나 로버트의 아파트에서 이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술 한 잔 하자는 로버트의 느닷없는 제안에 따라나섰던 헤더. 그날은 콜린이 수영부 뒤풀이에 참석했던 날이었다. 로버트와 헤더가 찾아간 술집에서 콜린과 마주치게 되고...
"돌이켜보면, 그날 밤 이후 내가 우울증에 빠졌다고 여겨질 수 도 있겠으나, 나는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던 내 삶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의사의 아내였고, 이제 큰 이변이 없는 한 나 역시 의사의 아내가 될 터였다." (p.119)
헤더는 결국 로버트와 헤어진 후 콜린과 결혼한다. 존스 홉킨스 의대 본과에 진학하기 위해 콜린과 헤더는 볼티모어로 이사한다. 헤더는 졸업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헤더는 편지를 통해 로버트와의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콜린이 졸업반이던 해 뜸하던 편지마저 끊기고 만다. 대학을 졸업한 콜린은 수련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한다. 잠자는 시간도 부족할 만큼 바빴던 콜린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수련의 과정도 끝나가던 어느 날 한때 물리학을 공부했던 콜린의 동료로부터 로버트 교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날 헤더는 콜린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펑펑 울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p.129)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에게 끌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판단은 많아지고, 그 판단에 근거하여 간섭도 늘어난다. 결국 관계를 망치는 가장 큰 적은 상대방에 대한 기대인 셈인데,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기대는 커지게 마련이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예컨대 아이는 부모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지만, 부모는 아이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까닭에 부모는 아이를 좋아할 수밖에 없고 아이는 부모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연인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헤더가 로버트를 좋아했던 건 로버트가 헤더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대방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기대가 크지 않으면 오히려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청개구리 심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튼 사람의 심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