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낮에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나누었던 대화 중 하나는 '정치인들의 막말 퍼레이드'. 사실 막말이야 정치인들의 전유물도 아니요, 일반인들이라고 막말을 안 할 리도 없을 터, 새삼 그들의 막말이 주목을 받는 데는 아마도 막말의 정도와 빈도가 문제이지 않았을까.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막말만 하더라도 자유당 원내대표의 '달창' 발언부터 민경욱 대변인의 '골든타임은 기껏해야 3분'이라거나 정용기 정책위의장의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보다 더 낫다'는 발언 등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동료 중 누군가는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교양이 없거나 어릴 적 가정교육의 문제일 거라며 그들의 막말이 교양 부족과 인성 부족에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진단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들이 인간에 대한 예절 교육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게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막말의 당사자들이 대부분 자유당 국회의원들이고 보면 그들이 교육을 덜 받았다거나 어렸을 적 가정교육의 부재로 인해 그런 막말을 일삼았다고는 보기 어려운 게 아닌가. 누구나 알다시피 자유당 의원들 중 상당수는 친일 행적으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재산이 많았던 만큼 안 그래도 교육열이 높은 대한민국에서 그들 역시 평균 이상의 교육을 받았을 게 분명할 터, 교육 부재를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어렸을 적부터 그들의 부모로부터 보고 배워 왔을 욕심의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막말은 주로 자신의 욕심(또는 원하는 상태)과 현실의 불일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분노의 감정이 일고, 욕구가 강할수록 분노 또한 강해지게 마련일 터, 막말을 통해 분노의 감정이 고스란히 분출되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련의 과정이다. 분노의 감정은 우리의 행동을 절제하도록 하는 교양이나 예절, 인성 등 부차적인 도구들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를 막말로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주 가난한 사람도 마음속 분노는 당연하지만 강도에 있어서는 부자만 못하다. 아흔아홉 개를 가진 사람들은 백 개를 채우려고, 하나 가진 사람 것을 빼앗고 싶은 욕구가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던 사람이 하나를 얻고자 하는 욕구는 그리 강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태극기 부대에 나오는 가난한 자의 분노와 그들을 이끄는 자유당 의원들의 분노는 닮은 듯 서로 다르다. 자유당의 한선교 의원도 오늘 기자들을 향해 "걸레질을 한다."며 막말 대열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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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도둑 - 아름다움과 집착, 그리고 세기의 자연사 도둑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박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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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시절의 몇몇 장면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방학 숙제와 관련된 것인데 당시에는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과제가 있었다. 예컨대 방학 생활 계획표 작성하기, 일기 쓰기, 식물 채집, 곤충 채집 등은 전 학년의 공통과제이기도 했다. 물론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 숙제 등 다른 과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여름방학의 단골 과제가 그랬다는 얘기다. 지금이야 과제를 좀 안 해가기로서니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심한 체벌을 받지는 않겠지만 당시에는 개학과 동시에 과제물을 제출하였고, 혹여라도 깜빡 잊고 가져오지 못한 학생들이 있는 경우를 대비해 개학일로부터 2~3일의 유예기간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만일 그때까지도 과제물을 제출하지 않을 시에는 심한 체벌과 함께 화장실 청소 한 달과 같은 벌칙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웬만한 배짱으로는 숙제를 하지 않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꽤나 소심했던 나는 남들보다 잘하겠다는 욕심은 없었지만 선생님의 체벌은 어찌나 두려워했던지 식물 채집이든 곤충 채집이든 시늉만 겨우 했다. 문제는 과제물을 제출할 때였다. 혹시라도 남들이 볼까 봐 다른 친구의 과제물 밑에 숨겨 놓거나 가장 늦게 제출함으로써 창피한 순간을 모면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초등학교 6년 중 딱 한 차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그것도 가장 먼저 과제물을 제출했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곤충 채집 때문에 한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같은 반 친구 한 명이 자신의 곤충 채집 과제물을 선뜻 내주는 게 아닌가. 자신은 방학이 끝나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면서 이별 선물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압축 스티로폼 위에 갖가지 곤충을 종류별로 고정시킨 후 액자와 같은 나무틀에 넣고 유리를 끼워 만든 너무나 멋진 곤충 표본이었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친구의 아버지가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마리씩 잡아 말리고 고정하였다고 했다. 어찌나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보였던지 선뜻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나는 친구가 준 곤충 채집을 자랑스럽게 제출했고,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고, 내가 제출했던 과제물은 한동안 학습 교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월리스는 찰스 다윈의『비글호 항해기』를 읽고 탐험의 꿈을 키웠다. 그는 영국 내의 곤충과 식물에 대해서는 분류 작업을 모두 마쳤기에 새로운 종을 찾고 싶었다. 철도 열풍이 가라앉고 측량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자 월리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탐험 지역을 고민했다. 그곳에 가서 당시 과학계의 가장 큰 미스터리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p.34)

 

커크 월리스 존슨의 저서 <깃털 도둑>이 탄생하게 된 계기는 2009년 6월에 있었던 영국 자연사박물관 소장품 중 새 가죽 299점이 도난당했던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뉴욕타임스'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 저자는 그 당시 뉴멕시코주의 레드강에서 플라이 낚시를 하고 있었고, 낚시 가이드인 스펜서 세임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낚시도 내팽개친 채 도대체 트링의 자연사박물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저자는 결국 트링박물관에 있던 새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한 5년에 걸친 긴 추적을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된 <깃털 도둑>은 깃털에 얽힌 인류사의 궤적을 좇으며 에세이가 아닌 어떤 추리소설과 같은 긴박감을 제공한다.

 

"나는 남는 시간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자료를 조사하고 플라이 타잉 커뮤니티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즐겁게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트링을 방문한 뒤에 이 범죄가 진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과학계에 어떤 손실을 입혔는지를 깨닫고는, 그리고 여전히 많은 새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언가가 달라졌다. 부업으로 시작한 취미 활동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범죄 사건에서 정의를 찾는 임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p.249)

 

마리 앙투아네트가 새의 깃털을 패션의 수단으로 사용한 이래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지구 상의 수억 마리 새가 인간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루이 16세로부터 받은 다이아몬드 장식의 왜가리 깃털을 올림머리 위에 꽂고 다녔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고 100년도 되지 않아 새 깃털은 전 세계 여성이 사랑하는 모자 패션의 아이템이 됐고 그에 따라 모자 산업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890년대 프랑스에는 4만 5000t에 이르는 깃털이 수입됐고 런던 경매장에서는 4년간 극락조 15만 5000마리가 거래됐다고 한다. 어느 영국인 딜러는 1년간 새 가죽 200만 장을 팔기도 했다. 미국의 상황도 비슷했다. 북미 지역에서만 매년 2억 마리 새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깃털을 향한 인간의 욕심만 증가했던 건 아니어서 무분별한 깃털의 소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일기도 했고, 그에 따라 새의 멸종을 막기 위한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깃털의 선호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21세기인 지금도 깃털에 대한 선호와 집착은 줄지 않았고 새의 밀거래 역시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겁이 많은 소심한 사람들은 방충제와 함께 서랍 깊숙한 곳에 깃털을 숨겨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박물관과 경찰도 더는 찾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사고팔기를 반복했다. 자신들의 깃털이 세상에 완전히 녹아들 때까지." (p.354)

 

생각해보면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어린 학생들에게 식물과 곤충을 무분별하게 채집하도록 시킨다는 게 과연 목적에 부합하는 일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선생님이나 학생들 공히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의식이 성숙하지 못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등교육이 일반화된 작금의 선진국에서도 깃털에 대한 수요가 줄지 않고 있다는 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는 간 데 없고 소유에 대한 집착만 키워가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인간의 영혼마저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닌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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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언제나 위험이 뒤따르게 마련이지만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다뉴브강에서 발생한 유람선 침몰 사고는 희생 규모와 사고 발생 상황의 어이없음으로 인해 그 안타까움을 더한다. 게다가 승무원을 제외하면 한국인 여행객만 승선한 배가 침몰함으로써 우리나라도 아닌 먼 이국땅에서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걸 생각할 때 얼마나 가슴 아픈지...

 

전문가들에 따르면 다뉴브강을 오가는 선박의 숫자가 너무 많고 때로는 언어 장벽 때문에 선박 간 소통도 어려운 실정이라 이번 사고는 이미 예견된 사고였다고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정된 시간 내에서 타 여행사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단체여행의 문제점도 없지 않다고 본다. 물론 나는 단체 여행보다는 개별 여행을 선호하는 까닭에 단체 여행의 경험은 많지 않지만 빡빡한 스케줄 속에 바삐 움직여야 하는 단체 여행의 속성상 짜인 일정을 취소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테지만 비도 내리고 물도 불어 유속도 빠른데 굳이 유람선 관람을 나서야 했는지... 물론 희생자 가족들의 안타까움과 슬픔에 비하면 나의 그것은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종종 여행지에서의 흥분과 들뜸으로 인해 안전은 뒷전인 경우가 많다. 사고는 늘 그 지점을 통과한다. 단체 여행의 경우 들뜬 여행객의 마음을 가라앉혀 줄 가이드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사실 을의 입장에 있는 가이드가 제 역할을 다할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까. 아무튼 자국의 국민이 해외에서 큰 사고가 났는데 자유당의 정 모 국회의원은 연찬회 자리에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보다 낫다.'고 말하는 등 얼빠진 행동을 하고 있으니, 이런 자들이 국가의 지도자입네, 감투를 쓰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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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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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책에서 풍기는 분위기로 인해 책을 읽기도 전에 압도되거나 주눅이 들 때가 있다. 책의 볼륨이나 권수에 상관없이 말이다. 문장이나 주제에서 오는 장중한 느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장대한 서사가 인간에게 주는 깊은 울림은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강한 연대감과 함께 유구한 역사에서 개인의 삶은 얼마나 작고 사소한 것인가 깨닫게 한다. 장편소설 <오버스토리>를 썼던 리처드 파워스 역시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타크루즈 산에 100년도 더 된 삼나무 군락지 인근에 살던 작가는 산을 오르다 마주하게 된 거대한 삼나무 앞에서 '그동안 나는 이렇게 경이로운 존재를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맹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도 나무를 보지 않는 시대에 대한 경고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로키 산맥과 그레이트스모키 산맥 등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고, 나무에 관한 책만 120권 넘게 읽었으며, 급기야 아직 원시림이 남아 있는 산기슭으로 집까지 옮겼다고 하니, '문학과 소설이 꿈꾸는 경이로움'을 담기 위한 작가의 열정에 그만 숙연해질 뿐이다. 작가가 바라보는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는 우리 곁에서 언제나 존재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풍경이 아니라 보면 볼수록 놀라운 기적이자 경이로움이다.

 

"고개를 들자 파수꾼 나무의 가지가 외롭게, 거대하게, 사방으로, 바람 속에 헐벗은 채 뻗어서 아래쪽 가지들을 들어 올리고 그 두툼한 몸통을 으쓱인다. 사방으로 자라난 수많은 잔가지들은 너무나도 사소하고 너무나 덧없는 이 순간을 그 나이테에 새기고, 새파란 중서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수기신호를 보내는 기자들이 가지들이 기도해줄 거라는 듯이 바람 속에서 잘그락거린다." (p.39)

 

702쪽의 장대한 서사인 <오버스토리>는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닌 무려 9명에 이른다. 비극적인 운명의 밤나무 초상사진 백 년치를 호엘가(家)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화가 니컬러스 호엘, 이민자 아버지로부터 뜻 모를 아라한의 족자와 나무가 세공된 반지를 물려받은 엔지니어 미미 마, 네 명의 어피치가(家) 아이들 중 막내로 태어난 애덤 어피치는 유년시절 집 앞에는 각자의 나무가 한 그루씩 심어져 있었고, 린덴나무에 얽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레이 브링크먼과 도러시 카잘리, 개벌(皆伐) 현장에서 작업하면서 나무를 하나씩 심을 때마다 작별 인사를 한다는 더글러스 파블리첵.

 

"버텨. 100년에서 200년 정도만. 너희들한테는 어린애 장난 같은 거지. 너희는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야 해. 그러면 너희를 건드릴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거야." (p.131)

 

이야기는 닐리 메타를 지나 청각과 언어 장애가 있던 식물학자 패트리샤 웨스터퍼드로 이어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마치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답지만 식물학자인 패트리샤 웨스터퍼드의 이야기는 유독 눈길을 끈다. 불편한 몸으로 그녀가 찾아냈던 놀라운 발견들. 이를테면 식물들이 스스로의 몸에서 내뿜는 화학물질을 통하여 의사소통을 하며, 때로는 서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는 놀라운 연구 성과. 그러나 그녀의 이론은 무시되었고 한동안 묻혔지만 그녀를 존경하던 또 다른 식물학자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는데 그 장면은 대단히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수년의 연구에서 그녀가 알아챈 더글러스전나무의 행동은 그녀에게 기쁨을 준다. 더글러스전나무 두 그루의 측면 뿌리들이 지하에서 만나자 서로 달라붙는다. 스스로 접 붙은 이 뿌리를 통해서 두 나무는 관다발계가 합쳐지며 하나의 나무가 된다. 수천 킬로미터의 살아 있는 균사로 지하에서 서로 연결된 그녀의 나무들은 서로에게 양분을 공급하고, 서로 치료해주고, 어린 나무들과 아픈 나무들의 목숨을 유지해주고, 자원과 대사산물들을 공용 보관함에 저장한다……." (p.203)

 

젖은 손으로 램프를 만지는 바람에 죽다 살아난 올리비아 밴더그리프의 이야기, 파티광의 대학생이었던 그녀는 공기와 빛의 존재들에 의해 되살아나고... 소설은 그렇게 한 그루의 나무로 상징되는 아홉 인물의 개별적인 삶을 보여주며 유려하게 흘러간다.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숲의 부름을 받았고, 예기치 못했던 어떤 순간에 서로에게 연결되었으며,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소설은 각기 한 그루의 나무로 상징되는 아홉 인물의 개별적인 삶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무의 부름을 받는다. 숲이 그러하듯, 이들의 삶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서로 연결되며 또 다른 거대한 이야기 숲을 이룬다.

 

"그는 다음 프로젝트가 손짓하는 북쪽 숲을 쳐다본다. 햇살을 가르는 가지들이 중력을 향해 웃어대며 여전히 펼쳐지고 있다. 꼼짝하지 않는 나무 몸통 기단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다. 이것,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속삭인다. 이것.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왔던 것. 우리가 얻어야만 하는 것. 이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예요." (p.702)

 

나는 오래전에 일본 야쿠시마에 있는 조몬 삼나무를 보러 갔던 적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생명을 이어온 나무의 자태도 감탄을 자아냈지만 그 숲에서 느꼈던 편안함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역사의 작은 파편에 불과한 나의 삶 역시 거대한 자연 속에서 교류하고 내게 허락된 시공간을 지키며 묵묵히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 숲의 돌멩이 하나, 물 한 방울, 이름 없는 풀 한 포기까지 어느 것 하나 필요 없는 게 있을 수 없으며 각각의 쓰임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인해 나는 뭉클한 감동을 느꼈었다. 나는 지금도 매일 아침 산길을 걷는다. 새벽에 만나는 숲의 나무와 온갖 동물들에 감사하면서. 그리고 이따금 등산객들이 버린 쓰레기를 줍기도 한다. 자연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겨우 그것뿐임을 자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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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김운하 지음 / 월간토마토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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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의 스토리라인이 마치 배경처럼 희미하게 깔리는 소설이 있다. 마치 안개가 자욱했던 어느 날의 숲 속 풍경처럼 전체 숲의 모양은 가늠할 길 없고 키 큰 나무의 도드라진 우듬지만 듬성듬성 눈에 띄는 것처럼 소설에서 스토리라인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고 작가의 오랜 사유가 빚어낸 몇몇 문장만 겨우 눈에 띄는...

 

소설가이자 인문학자인 김운하가 18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그런 소설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의 능력에 따라 분명한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소설 속 몇몇 문장들을 화두처럼 부여잡고 안개 자욱한 숲 속 산길을 겨우겨우 찾아가는 그런 소설. 깨침이 부족했던 탓인지 작가는 좀처럼 내게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기다' 싶어 찾아 들어가면 어느새 다시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다. 나는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작가의 사유 속에서 놀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도 결코 읽기를 끝낼 수 없는 책들이 있다.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병 같은 영원한 순환구조에 독자를 가두어버리는 책들. 언제나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게 만들어버리는 책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비유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책은, 독자로 하여금 너무 많은 출구를 가지게 하는 까닭에, 영원히 그 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p.211)

 

소설에서 나는, 10여 년 전의 봄, 아무런 기약도 없이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짐 가방 안에는 내가 사랑하는 10여 권의 책들이 들어 있었다. '노자', '장자', '우파니샤드', 스피노자와 카프카, 호메로스와 그리스 비극 작가들 등등의 책들이... 나는 완전한 고립 속에서 책 속에 담긴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스스로를 치유한다. '우리의 생은,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소설적인 이야기인 셈'(p.185)이라는 작가의 주장처럼 이 소설 또한 허구이되, 많은 부분이 에세이 양식과 실제 경험이 뒤섞인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작가의 실제 경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나는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유배지이자 은둔의 공간인 제주에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진다. 장 자크 루소가 그러했듯 자발적인 고독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여러 고전에 녹아든 삶의 진실들과 마주한다. 윤슬이 반짝이는 서귀포의 바닷가, 태고의 풍경을 간직한 산굼부리, 축구장처럼 작은 섬 마라도...

 

"반면에 사랑을 잃는 결별은, 역설적이게도 자기를 되찾아준다. 자기를 잃으면서 자기를 되찾기다. 자기를 되찾음 가운데서 자기는 소름 끼치는 자유를 발견한다. 그것은 너무 무한하기 때문에 오히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절대적 구속 상태와도 같다. 그것은 일종의 미로에서 길 잃기와도 같다. 때문에 거기서 또 다른 결별과 만나지 않으면 방황은 오래가고, 자아는 자기 없는 자유 속에서 사망한다." (p.245)

 

소설 속 내가 언제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무작정 떠나기로 한 느닷없는 결정과 1년여의 제주 살이. 유배와 은둔의 시간 속으로 잠깐 끼어든 J. 그리고 그녀의 존재로 인해 사유의 폭은 넓어지고 고독은 깊어졌다.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 미망에 휩싸였던 것처럼 작가와 나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언감생심 공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작가가 사유했던 모든 것들을 소설이라는 틀 속에서 부드럽게 녹여내려 했던 애초의 목적은 자격도 없는 독자인 내게 이르러 무참히 허물어졌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 비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다. 그 이름 속에, 한 인간의 전체 운명이, 아니 진정한 운명이 담겨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최후의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의 참된 이름을 알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비밀스러운 참된 이름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의 삶은 그저 햇빛이 드리우는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p.131)

 

사람들은 말한다. 길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그러나 아주 가끔 우리는 길을 잃기 위해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도 있다. 인생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따라 심하게 흔들리기도 한다는 걸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깨닫게 된다. '단순한 흥밋거리를 넘어 존재와 삶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려는 작가적 열정이 가닿으려는 지대'가 '문학과 소설이 꿈꾸는 어떤 낯선 경이로움"이라고 말하는 작가. '순수 산문과 허구의 이야기 사이 어디쯤엔가 위치하고 있다'는 이 소설은 나에게 삶의 길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때로 우리는 길을 잃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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