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이삭줍기 환상문학 1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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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동안 쉼 없이 글을 쓰다 보면 글을 쓰지 않는 일상의 순간에도맥락없는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떤 날은 '돌연', '불현듯', '과연' 등과 같은 부사가 내 머릿속을 놀이터 삼아 온종일 휘젓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이내', '겻불', '부지깽이' 등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 명사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주로 산길을 거니는 아침 시간이나 노을을 바라보는 잠깐의 여유 시간에 진해지게 마련인데 자맥질하듯 떠오르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그중 맘에 드는 단어들을 골라 멋진 글로 구성하기에는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참 뒤떨어진 나로서는 언감생심 욕심에 불과할 뿐 결국 머리만 어지럽힌 채 잠깐의 여유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이런 변명은 물론 글재주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나의 결함을 방어하기 위한 치졸한 수단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마치 몽유병과도 같은 단어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나는 '간헐적 단식'이 아닌 '간헐적 글쓰기'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게 또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글을 쓰는 일이 낯선 일이 된 까닭에 한 편의 짧은 글을 완성하는 데도 전에 없이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도 하고, 전에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단어들이 떠올라 고민이던 게 이제는 숫제 꼭 써야 할 단어조차 좀체 떠오르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고민을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쥐어짜며 끙끙대서 겨우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도 한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다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 마음먹었던 것도 꽤나 오래전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내 붓방아만 찧고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그러다가 나는 또 몇 권의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리뷰는 쓰지 않았다. 자본주의 태동기에 쓰인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마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황금만능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소설 속 주인공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를 팔라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기다렸다는 듯 선뜻 팔아넘기고 만다. 대신에 그는 금화가 고갈되지 않는 마법의 주머니를 받는다.

 

"이 세상에서 돈이 업적과 덕성보다 훨씬 중요할지라도, 그림자야말로 그러한 돈보다 훤씬 더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재산을 바쳤지만 지금은 단순한 돈 때문에 그림자를 바치고 만 것이었다. 이제 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P.33)

 

슐레밀은 비록 자신의 그림자를 잃었지만 마법의 주머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얻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그에게는 더없이 충성스러운 하인 벤델이 있었고, 그림자가 필요할 때는 기꺼이 그의 곁에 서주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없이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온전히 얻지 못하며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인의 도움 없이는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음은 물론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한 채 주변만 맴도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결국 자신의 왕국에서도 쫓겨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의 그림자를 사 간 정체불명의 사내가 찾아온다.

 

"우리는 단지 동일하게 수동적으로 작동되는 동시에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수레바퀴처럼 그 안에 맞물려 있는 거야. 일어나야만 하는 일은 일어나는 법이며, 그러한 섭리가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지. 결국 내 운명에서, 그리고 내 운명을 공격하는 이들의 운명 속에서 나는 그러한 섭리를 존중하는 것을 배웠던 거야." (p.92~p.93)

 

정체불명의 사내는 자신에게 영혼을 팔면 그림자를 되돌려 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슐레밀은 그의 제안을 거절한 채 방랑길에 오른다. 그리고 전 세계를 떠돌던 슐레밀은 한 때 자신의 하인이었던 벤델의 고향 근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자신에게서 받았던 금화로 벤델은 '슐레밀 병원 재단'을 설립하였고, 슐레밀은 자신의 이름을 딴 '슐레밀 병원'에서 깨어났다. 의식이 돌아온 슐레밀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벤델과 과부가 된 미나의 대화를 듣게 된다.

 

"아니에요, 벤델 씨, 기나긴 꿈을 꾸고서 마음속에서 다시 깨어난 이후 저는 평온하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또한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었어요. 이제 저는 평온한 마음으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신을 공격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주인이자 친구에게 봉사하는 것도 내면이 평온한 행복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p.129)

 

이 소설의 작가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는 프랑스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독일로 망명을 해야 했고 평생을 독일인으로 살아야 했다. 말하자면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는 독일과 프랑스 어느 한 편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이자 외톨이였다. 그런 까닭에 슐레밀에 투영된 자신의 삶이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듯한 이 소설은 작가의 의도와 주제가 쉽게 드러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황금만능주의로 치닫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유효하다는 점이다. 검찰과 언론에 대한 국민의 개혁 요구가 어느 때보다 드높은 요즘, 우리 모두는 자신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그림자마저 팔아치우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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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라면 자유한국당으로부터 반드시 배워야 할 정치 기술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일반화의 기술이다. 이를테면 진보 정치인 중 한 명이 음주운전을 했다면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민주당 의원들이 음주운전을 했다고 말한다거나, 서울대 재학생 서너 명이 조국을 반대해도 서울대 전체 학생들이 반대하는 양 선전하고, 진보를 표방하는 유튜버가 이상한 노래 한 곡을 불러도 촛불 세력 전체가 그렇다고 말하는 식이다.

 

민주당이 이와 같은 기술만 진즉에 터득했더라도 나경원 의원의 자식이 서울대 연구실을 제집 거실을 이용하듯 불법적으로 사용했을 때 나경원 의원을 특정하여 지적할 게 아니라 자한당 의원 자식들 대부분이 서울대 연구실을 불법적으로 이용했다고 말했을 것이며, 홍정욱 전 의원의 자녀가 마약을 소지했을 때도 홍정욱 전 의원을 지목할 게 아니라 자한당 의원 자식들 대부분이 마약을 했다고 말해야 했으며, 장제원 의원의 자식이 음주운전을 했을 때도 역시 장제원 의원을 지목할 게 아니라 자한당 의원 자식들은 주로 음주운전을 한다는 식으로 발표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고도의 정치 기술은 진보 정치 세력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기술 중 하나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 세력이 잘 구사하지 못하는 기술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보수 정치인들은 대부분 능숙하게 구사하는데 말이다.

 

오늘도 나경원 의원은 잘 알지도 못하는 어느 유튜버가 동요를 개사하여 몇몇 아이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한 걸 두고 촛불 세력 전체가 그렇다는 식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특정 유튜버는 언급도 하지 않고 말이다. 정말 혀를 내두를 만큼 능숙한 정치 테크닉이 아닐 수 없다. 진보 정치인들은 이런 기술은 배우지 않고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 보고 배우세요!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일부인들을 이용한 말뿐인 일반화의 기술이 아니라 국가 공권력을 이용한 실질적인 일반화이다. 이를테면 국정 교과서의 제작 시도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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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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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계절은 역시 가을이 아닌가 싶다. 날씨가 선선해지고 초록의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몸도 마음도 시나브로 사색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변화의 절정은 역시 낙엽이 지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바야흐로 만추가 되겠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계절에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책이라면 역시 올리버 색스의 책들이 아닐까 싶다.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의사로서뿐 아니라 문필가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신경학자로서 전문적 식견과 따스한 휴머니즘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 존엄을 깨닫도록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서 매년 가을이면 그의 대표작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종종 꺼내 읽곤 한다. 물론 다른 계절에도 마음이 울적할 때면 이따금 꺼내 읽기는 하지만.

 

수줍음이 많고 나서기를 싫어했던 색스는 브롱크스 자치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혼자 살면서 신경과 의사로서의 경험과 자신이 만났던 환자들의 사연을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1부와 2부에서는 주로 뇌 기능의 결핍과 과잉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3부와 4부에서는 지적장애를 지닌 환자들에게 발견되는 발작적 회상, 변형된 지각, 비범한 정신적 자각 등을 다루었다. 책을 읽다 보면 정말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일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면서 '아, 나 역시 이들과 비슷한 정신적 상처를 한두 개쯤 안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후 3개월간, 우리는 참을성 있게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저항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했으며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 자신감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건강하고 인간적인 잠재 능력이 그에게 숨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심한 투렛 증후군으로 고생하며 살아온 20년의 세월에도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던, 인격 저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잠재 능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p.173)

 

우리는 종종 차별적인 용어를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분하곤 한다. 이를테면 '미친X'라거나 '병X' 등 입에 담기조차 힘든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격하시키고 더불어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하는, 정말 야비하고 비열한 행위를 다수의 편에 속한 우리는 무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비록 의도적이거나 악의적으로 한 말은 아닐지라도  

 

"더러는 지능이 낮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물쇠를 열지도 못하고, 하물며 뉴턴의 운동법칙을 이해하거나 세계를 개념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세계를 구체적인 것,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마틴이나 호세, 쌍둥이 형제처럼 재능이 풍부한 '바보'들이 가진 또 하나의 측면이다." (p.295)

 

'아기'라는 보편적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 개별적 인간으로 성장하여 한동안 또 그렇게 살아가다 결국에는 '노인'이라는 보편적 인간으로 죽어간다. 나는 이러한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개별적 인간으로 살아갈 때의 심한 격차와 불평등, 차별과 소외 그리고 무한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피곤한 현실에서 벗어나 '노인'이라는 보편적 인간이 된다는 건 체념과 수용을 전제로 같은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누구에게도 강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감'이라는 정신적 활동이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타인에게 공감을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는 없다. 이럴 때 나는 '공감'의 이전 단계로 '이해'의 필요성을 절감하곤 한다.

 

올리버 색스의 여러 저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중증의 신경병 환자들에게 쏟았을 저자의 헌신과 노력을 어느 정도 직감하곤 한다. 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지 않고서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은 과학적인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 약간 주저하면서 많이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 있음을 그는 믿고 잇다. 우리는 24편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을 읽어도 그의 환자에 대한 애정이 가슴 찡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도 '영혼'이라는 개념을 굳게 신뢰하는 그의 신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가 병 자체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렇게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p.385 '역자후기' 중에서)

 

인간을 이해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의 회고록에는 기억에 대한 비참하면서도 가슴 섬뜩한 말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도 인용이 되고 있는 부뉴엘의 말은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내가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기억상실뿐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이다. 색스 역시 '만약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리고 현재 자신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는 어떤 삶(만약 그런 게 있다면), 어떤 세계, 어떤 자아가 남게 될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우리 각자에게 속한 기억의 총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을 완전히 잃었거나 영혼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인간 영혼의 틀을 벗어난 그들마저 이해하기에는 나는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소슬한 한기로 인해 사색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 가을이다. 인간을 이해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자 삶을 통해 배워야 할 깨우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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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혹은 학벌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누군가를 향해 무식하다는 말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만약 있다면 본인은 정말 바보이거나 본인이야말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식이 많다는 것은 아주 작은 특정 분야에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다른 분야에 있어서는 본인 역시 무식하다는 평을 면키 어려운 까닭에 우리는 누군가를 향해 감히 무식하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인격이 모자르거나, 사회의 원리를 이해하기에는 지극히 나이가 어리거나, 누군가에게 지독한 증오의 감정을 갖고 있어 악의적으로 누군가를 폄훼하고자 할 때 '무식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비난을 감수한 채 말이지요.

 

서울대의 서 모 교수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 국정감사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하여 조 모 씨에 대해 '본인이 무식해서 그런 분야를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거니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인터넷에 올라온 그분의 얼굴을 사진으로만 보았을 뿐이지만 사리분별을 못할 정도로 사회 경험이 일천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자 무식의 촌부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그는 왜 그런 말을 쏟아냈는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무식하다'는 평은 상대방을 향해 날아가는 말이 아니라 그 칼날이 부메랑처럼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 잇어서는 약간의 지식이 있을지 몰라도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무식하기 짝이 없었던 셈이지요.

 

우리는 종종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악의에 찬 말을 쏟아내곤 합니다. 그만큼 미숙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그 칼날은 반드시 자신을 향하게 마련이고 상처를 입는 대상도 자신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식하다'는 말은 타인을 평가하는 데는 적절치 않은 말인지도 모릅니다. 형식은 비록 타인을 평가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을 평가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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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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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원하는 물건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데 있어 그 기준은 항상 구매력, 즉 자신의 경제적 형편에 달려 있는 듯 보인다. 불행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 투잡, 쓰리잡도 마다하지 않으며, 때로는 도시를 떠나 이거고 저거고 모든 걸 포기한 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마는 작게는 아주 소소한 기호식품의 구매에서부터 크게는 가족 전체가 살기 위한 주택의 구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택의 기준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돈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곤 한다.

 

건축가 유현준이 쓴 <어디서 살 것인가>는 자신 살 곳을 고르는 데 있어 모든 사람이 천편일률적으로 제시하는 돈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그렇다고 이 책이 배산임수를 논하는 풍수지리서도 아니요, 자녀의 교육과 교통, 의료와 문화 시설에 대한 접근성 등을 따지는 부동산 관련 서적도 아니다. 인류 문화를 탄생시킨 요람으로서의 공간이 가진 기능과 그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오직 돈에 매몰되어가는 현대인의 기준을 벗어나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행복을 느끼며, 어떤 주변 환경이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하는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떠해야 우리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 그러자면 우리는 어떠한 공간에서 어떻게 우리 아이를 성장하도록 해야 하는지 등 삶의 주체로서 우리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변모시키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선택적 대안을 제시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제반 문제를 공간과 결부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는 건축을 즐긴다. 건축을 공부했기 때문에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거나, 식당을 고르거나, 카페에 가거나, 길을 걸을 때 비전공자보다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줄 알게 되고, 음악을 자꾸 들으면 귀가 만들어지듯이,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서 건축을 맛보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조금이나마 키워졌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건축을 느끼면 인생이 더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다른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건축도 우리의 행복을 더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p.372)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도소를 닮은 현대 학교 건축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힙합 가수가 후드티를 입는 이유와 쇼핑몰에는 왜 멀티플렉스 극장이 존재하는지, 파라오와 진시황제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 현대인이 SNS를 많이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건축과 상관도 없는 듯한 이야기들로 전개되다가 위기와 발명이 만든 도시를 통해 서울의 얼굴로 이어지고 자연스레 도시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벽, 창문, 기둥, 지붕, 길, 다리 같은 각각의 건축 요소를 통해 건축가의 시선에서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들려준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건축은 일종의 인류 문화의 총체, 인간 정신의 구체적 발현처럼 느껴진다. 집이란 그저 다 늦은 저녁에 하루의 피로를 풀기 위한 장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듯 저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공간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구획하며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가는지, 삶이 진행되는 시간에 따라 우리는 어떠한 공간을 선택해야 하는지 과거와 현대를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통해 설득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에 빠지기도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속 주인공 키팅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라고 요청한다. 작지만 수십 센티미터 커지는 그 시점의 변화가 엄청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다. 일상에서 그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다. 어린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재미있어하는데 어쩌면 키가 작은 아이가 어른보다 커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p.222)

 

사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기실 우리의 사고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작게는 우리의 느낌을, 우리의 행동을 변하게도 하고, 크게는 우리의 가치관을, 인생관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들 삶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가을 늦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옅은 침묵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가을 우수가 빗방울처럼 흩어지는 주말 휴일에 나는 도서관 한켠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도서관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번잡한 도시의 한 공간에 위치하면서도 도시의 소음이나 경쟁으로부터 멀찌기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책들이 빽빽하게 꽂힌 서가의 숲을 거닐다 보면 왠지 모를 슬픔과, 아련한 추억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오래전에 읽었던 많은 작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도서관 공간이 주는 묘한 여운이 나의 생각에 화답하듯 멋진 화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마치 어느 동굴의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그런 오후. 지금껏 돈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자로서의 빈껍데기 삶을 살아왔던 내가 건축가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고 모든 게 달라질 리 없지만 공간이 뿜어내는 울림 하나하나를 느끼고 기억하다 보면 나에게도 언젠가 그 울림에 화답하듯 '내가 살 곳은 바로 여기야!' 하고 외치게 될 날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때 나는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가을 오후를 떠올리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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