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이삭줍기 환상문학 1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1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동안 쉼 없이 글을 쓰다 보면 글을 쓰지 않는 일상의 순간에도맥락없는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떤 날은 '돌연', '불현듯', '과연' 등과 같은 부사가 내 머릿속을 놀이터 삼아 온종일 휘젓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이내', '겻불', '부지깽이' 등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 명사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주로 산길을 거니는 아침 시간이나 노을을 바라보는 잠깐의 여유 시간에 진해지게 마련인데 자맥질하듯 떠오르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그중 맘에 드는 단어들을 골라 멋진 글로 구성하기에는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참 뒤떨어진 나로서는 언감생심 욕심에 불과할 뿐 결국 머리만 어지럽힌 채 잠깐의 여유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이런 변명은 물론 글재주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나의 결함을 방어하기 위한 치졸한 수단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마치 몽유병과도 같은 단어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나는 '간헐적 단식'이 아닌 '간헐적 글쓰기'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게 또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글을 쓰는 일이 낯선 일이 된 까닭에 한 편의 짧은 글을 완성하는 데도 전에 없이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도 하고, 전에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단어들이 떠올라 고민이던 게 이제는 숫제 꼭 써야 할 단어조차 좀체 떠오르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고민을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쥐어짜며 끙끙대서 겨우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도 한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다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 마음먹었던 것도 꽤나 오래전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내 붓방아만 찧고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그러다가 나는 또 몇 권의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리뷰는 쓰지 않았다. 자본주의 태동기에 쓰인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마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황금만능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소설 속 주인공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를 팔라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기다렸다는 듯 선뜻 팔아넘기고 만다. 대신에 그는 금화가 고갈되지 않는 마법의 주머니를 받는다.

 

"이 세상에서 돈이 업적과 덕성보다 훨씬 중요할지라도, 그림자야말로 그러한 돈보다 훤씬 더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재산을 바쳤지만 지금은 단순한 돈 때문에 그림자를 바치고 만 것이었다. 이제 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P.33)

 

슐레밀은 비록 자신의 그림자를 잃었지만 마법의 주머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얻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그에게는 더없이 충성스러운 하인 벤델이 있었고, 그림자가 필요할 때는 기꺼이 그의 곁에 서주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없이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온전히 얻지 못하며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인의 도움 없이는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음은 물론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한 채 주변만 맴도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결국 자신의 왕국에서도 쫓겨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의 그림자를 사 간 정체불명의 사내가 찾아온다.

 

"우리는 단지 동일하게 수동적으로 작동되는 동시에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수레바퀴처럼 그 안에 맞물려 있는 거야. 일어나야만 하는 일은 일어나는 법이며, 그러한 섭리가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지. 결국 내 운명에서, 그리고 내 운명을 공격하는 이들의 운명 속에서 나는 그러한 섭리를 존중하는 것을 배웠던 거야." (p.92~p.93)

 

정체불명의 사내는 자신에게 영혼을 팔면 그림자를 되돌려 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슐레밀은 그의 제안을 거절한 채 방랑길에 오른다. 그리고 전 세계를 떠돌던 슐레밀은 한 때 자신의 하인이었던 벤델의 고향 근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자신에게서 받았던 금화로 벤델은 '슐레밀 병원 재단'을 설립하였고, 슐레밀은 자신의 이름을 딴 '슐레밀 병원'에서 깨어났다. 의식이 돌아온 슐레밀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벤델과 과부가 된 미나의 대화를 듣게 된다.

 

"아니에요, 벤델 씨, 기나긴 꿈을 꾸고서 마음속에서 다시 깨어난 이후 저는 평온하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또한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었어요. 이제 저는 평온한 마음으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신을 공격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주인이자 친구에게 봉사하는 것도 내면이 평온한 행복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p.129)

 

이 소설의 작가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는 프랑스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독일로 망명을 해야 했고 평생을 독일인으로 살아야 했다. 말하자면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는 독일과 프랑스 어느 한 편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이자 외톨이였다. 그런 까닭에 슐레밀에 투영된 자신의 삶이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듯한 이 소설은 작가의 의도와 주제가 쉽게 드러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황금만능주의로 치닫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유효하다는 점이다. 검찰과 언론에 대한 국민의 개혁 요구가 어느 때보다 드높은 요즘, 우리 모두는 자신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그림자마저 팔아치우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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