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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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계절은 역시 가을이 아닌가 싶다. 날씨가 선선해지고 초록의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몸도 마음도 시나브로 사색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변화의 절정은 역시 낙엽이 지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바야흐로 만추가 되겠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계절에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책이라면 역시 올리버 색스의 책들이 아닐까 싶다.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의사로서뿐 아니라 문필가로도 유명한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신경학자로서 전문적 식견과 따스한 휴머니즘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 존엄을 깨닫도록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서 매년 가을이면 그의 대표작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종종 꺼내 읽곤 한다. 물론 다른 계절에도 마음이 울적할 때면 이따금 꺼내 읽기는 하지만.

 

수줍음이 많고 나서기를 싫어했던 색스는 브롱크스 자치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혼자 살면서 신경과 의사로서의 경험과 자신이 만났던 환자들의 사연을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1부와 2부에서는 주로 뇌 기능의 결핍과 과잉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3부와 4부에서는 지적장애를 지닌 환자들에게 발견되는 발작적 회상, 변형된 지각, 비범한 정신적 자각 등을 다루었다. 책을 읽다 보면 정말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일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면서 '아, 나 역시 이들과 비슷한 정신적 상처를 한두 개쯤 안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후 3개월간, 우리는 참을성 있게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저항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했으며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 자신감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건강하고 인간적인 잠재 능력이 그에게 숨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심한 투렛 증후군으로 고생하며 살아온 20년의 세월에도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던, 인격 저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잠재 능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p.173)

 

우리는 종종 차별적인 용어를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분하곤 한다. 이를테면 '미친X'라거나 '병X' 등 입에 담기조차 힘든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격하시키고 더불어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하는, 정말 야비하고 비열한 행위를 다수의 편에 속한 우리는 무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비록 의도적이거나 악의적으로 한 말은 아닐지라도  

 

"더러는 지능이 낮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물쇠를 열지도 못하고, 하물며 뉴턴의 운동법칙을 이해하거나 세계를 개념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세계를 구체적인 것,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마틴이나 호세, 쌍둥이 형제처럼 재능이 풍부한 '바보'들이 가진 또 하나의 측면이다." (p.295)

 

'아기'라는 보편적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 개별적 인간으로 성장하여 한동안 또 그렇게 살아가다 결국에는 '노인'이라는 보편적 인간으로 죽어간다. 나는 이러한 사실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개별적 인간으로 살아갈 때의 심한 격차와 불평등, 차별과 소외 그리고 무한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피곤한 현실에서 벗어나 '노인'이라는 보편적 인간이 된다는 건 체념과 수용을 전제로 같은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누구에게도 강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감'이라는 정신적 활동이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타인에게 공감을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는 없다. 이럴 때 나는 '공감'의 이전 단계로 '이해'의 필요성을 절감하곤 한다.

 

올리버 색스의 여러 저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중증의 신경병 환자들에게 쏟았을 저자의 헌신과 노력을 어느 정도 직감하곤 한다. 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지 않고서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영혼'은 과학적인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 약간 주저하면서 많이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 있음을 그는 믿고 잇다. 우리는 24편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을 읽어도 그의 환자에 대한 애정이 가슴 찡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도 '영혼'이라는 개념을 굳게 신뢰하는 그의 신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가 병 자체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렇게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p.385 '역자후기' 중에서)

 

인간을 이해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의 회고록에는 기억에 대한 비참하면서도 가슴 섬뜩한 말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도 인용이 되고 있는 부뉴엘의 말은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내가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기억상실뿐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이다. 색스 역시 '만약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리고 현재 자신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는 어떤 삶(만약 그런 게 있다면), 어떤 세계, 어떤 자아가 남게 될 것인가?' 하고 묻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우리 각자에게 속한 기억의 총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을 완전히 잃었거나 영혼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인간 영혼의 틀을 벗어난 그들마저 이해하기에는 나는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소슬한 한기로 인해 사색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 가을이다. 인간을 이해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자 삶을 통해 배워야 할 깨우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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