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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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김진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그녀의 괄괄한 목소리와 화통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 아닐까 싶다. 물론 직접으로 대면한 적도 없고 그저 방송으로만 접하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 주관적으로 유추하는 바이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고, 그녀를 방송에서 보았던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나와 비슷한 듯 보였다. 숨기는 게 없이 뭐든 다 드러낼 것 같은 그녀의 털털한 성격 탓에 공부에 있어서도, 일에 있어서도 허당기가 가득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웬걸 꼼꼼하기 이를 데 없고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30대에 미국 MIT 도시계획 박사 학위를 받은 것만 보아도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했을지 가늠케 되지만 말이다. 아무튼 겉으로만 보이는 그녀의 모습과 일과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성격이 이토록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건 한 인간으로서 그녀가 갖는 매력이 차고 넘쳐난다는 걸 의미하며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지낼 수 있는 친화력을 지닌 인물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을 쓰는 나의 태도 역시, '어떻게 도시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서 관심을 끌어내느냐?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게 만드느냐?'. 사실은 전문가로서 내 평생 일관한 태도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수록 좋은 도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도시 이야기에 담긴 사람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인간의 오욕칠정이 버무려진 도시 공간이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지, 때로는 얼마나 큰 재앙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 이야기 그 자체의 흥미만으로도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p.9 '프롤로그' 중에서)

 

이과 계통의 전문가가 쓴 책 치고 그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책을 다 읽어내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설사 다 읽었다 하더라도 읽은 후의 느낌이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거의 없다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닐 듯싶다. 그러므로 학교 교재나 도서관에 비치하기 위한 특정 분야의 참고용 도서가 아니라면 이과 계통의 전문가가 일반인을 상대로 자신이 전공한 분야의 책을 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열악한 환경을 딛고 자신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가를 말하는 자기계발서를 쓰는 게 유리하다고 느끼고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런 류의 책을 출간하곤 한다.

 

중언부언 서론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이 도시계획 전문가인 김진애 박사가 자신의 전공 분야를 다루면서도 일반인들이 읽어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을 정도의 가독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으로서의 도시 이야기가 어떻게 설득력을 획득하는가? 하는 문제는 도시계획 전문가로서 저자 자신이 갖는 지식과 도시에 사는 일반 시민으로서의 다양한 경험과 다방면에 걸친 관심이 책의 곳곳에 녹아 있음으로 인해 책을 손에 든 독자들 역시 책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사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그닥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다 보니 물론 아는 바도  없고,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는 의욕도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듯이 저자는 일반인이 도시를 체계적으로 알기 위한 방안으로 '도시적 콘셉트'12가지로 분류하고 각각의 콘셉트에 대해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과  책에서 읽었던 간접적인 경험을 추가함으로써 독자들의 흥미를 더하고 있다. 저자는 다만 책에 등장하는 도시 공간들에 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못한 점을 한계로 지적하기도 하고, 독자들이  '도시적 콘셉트'에 익숙해짐으로써 도시를 보는 눈에 좀 더 구조적 시각이 갖춰지리라는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폴리스를 만들며 살 것이다. 폴리스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도시적 삶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도시적 콘셉트'를 익혀야 할 것이다. 익명성, 권력, 기억과 기록, 예찬, 대비, 스토리텔링, 코딩과 디코딩, 욕망과 탐욕, 부패에의 유혹, 현상과 구조, 돈과 표, 진화와 돌연변이, 이 콘셉트들을 우리의 도시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녹여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도시 이야기는 풍요로워지고 우리의 도시적 삶은 풍성해질 것이다." (p.309 '에필로그중에서)

 

최근에 나는 시골 여러 곳을 다니면서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의 토착민과 외지인들과의 갈등, 화합에 대해 듣고 인간관계의 다양한 면을 분석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는 장기간 우리가 도시에 체류하면서 시나브로 체득한 도시적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문화적 습성 등이 원래부터 그곳에서 나고 자랐던 시골 사람들의 그것들과 충돌함으로써 발생하는 문화 충돌의 성격이 짙음을 실감한다. 예컨대 자신의 사생활을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외지인과 너나들이를 하면서 가족처럼 지내는 시골 토착민들과의 사고방식은 꽤나 큰 것이어서 마을 구성원 중 외지인이 많은 동네는 도시인들처럼 서로 반목하면서 지내기도 하고, 반면 토착민이 많은 마을에서는 외지인이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해 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게다가 시골에 이사를 온 외지인이 집을 대궐 같이 지어 놓고 원주민들을 무시하는 듯한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경우 눈꼴이 시어서 못 봐주겠다고 말하는 어르신들도 여럿 만났었다.

 

우리는 이따금 도시 생활에 싫증이 나거나 도시인들과의 관계에서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을라치면 입버릇처럼 '시골에나 가서 살까?' 하는 말을 내뱉곤 한다. 그러나 정작 시골살이가 얼마나 힘들다는 걸 몸소 체험한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도시인들이 자신의 태도나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시골살이는 결국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다.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역시 그와 같은 맥락이 담겨 있다. 자신이 사는 도시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주거 기간이 아무리 길어진들 영원한 이방인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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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 밖에서 놀게 하라 - 세계 창의력 교육 노벨상 ‘토런스상’ 수상 김경희 교수의 창의영재 교육법
김경희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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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 창의력 교육의 최고 권위자이자 '영재교육'으로 유명한 윌리엄메리 대학교 종신교수이기도 한 김경희 교수의 저서 <틀 밖에서 놀게 하라>는 아이를 둔 부모라면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하고 싶을 만큼 유익한 책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이 책을 읽은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을 교육함에 있어 책에 적힌 방법대로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는 그런 책이다. 특히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교육열이 높은 한국에서 과연 이 방법이 통하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책에 있는 저자의 교육 방법을 따라 한다는 건 일종의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아이는 틀 밖에서 놀아야 한다. 틀 밖에서 공부를 놀이처럼 해야 한다. 이미 구세대가 된 엄마의 틀, 육체적 활동의 틀, 정신적 사고의 틀, 주입식 교육의 틀 밖 말이다. 한국 교육제도의 '틀'은 교과서에 쓰여 있는 내용을 주입하고, 정답이 아니면 오답인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필요로 한다. 대학 입시를 최종 목표로 향해 달리는 경주마 교육을 한다. 이러한 교육제도는 아이가 공부를 일처럼 하게 만들고, 그 틀 안에 갇힌 아이를 평생 '일'만 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한다." (p.15 '프롤로그' 중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 아이들의 창의력을 신장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집필했다는 이 책의 주요 내용은 CAT 이론을 바탕으로 부모가 아이의 창의력을 키워줄 수 있는 '창의영재 교육법'에 집중하고 있다. 요즘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듣게 되는 '4차 산업혁명'과 '창의력'은 우리가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커다란 변화에 적응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적절한 방안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아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하나하나 실천해가는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를 감안하여 창의력 교육에 대한 모든 것, 말하자면 창의력 교육의 'A to Z'를 소개한다. 'Part. 1 창의력을 키우는 햇살, 바람, 토양, 공간, Part. 2 멀리 보는 아이로 자라는 ION 사고력'의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각각의 장마다 부모를 위한 요약과 팁을 제공함으로써 그동안 창의력에 대해 어설프게 공부했거나 숫제 들어본 적 없는 부모들이라도 어려움 없이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좋았다. 게다가 창의력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세한 설명과 예시가 곁들여져 있다.

 

"창작물의 가치를 위해서는 목표 의식적 태도와 철저한 태도를 포함한 바람 태도 및 토양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창작물의 색다름을 위해서는 튀는 태도와 당돌한 태도를 포함한 햇살 태도 및 공간 태도가 필요하다. 어느 태도 하나가 넘치거나 부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 아이를 창의영재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설명한 27가지 창의적 태도가 모두 필요하다." (p.366 '에필로그' 중에서)

 

책에서는 주로 아이의 교육을 담당하는 엄마의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주변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엄마의 태도나 학습법은 변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엄마들의 교수법은 왜 수십 년째 변하지 않는가? 말하자면 틀 안에서의 교육만 고집하는 걸까? 나는 이것에 대해 몇 가지 이유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주변의 대다수 부모들이 채택하는 교육 방법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럴 만한 용기도 없고, '아이가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하는 우려에 대해 책임질 만한 배짱도 없는 것이다. 둘째는 아이의 항변에 대비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으로서 기존의 방식을 답습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다수 부모들이 아이에게는 철저히 속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부모의 잘못된 교육법을 탓하기라도 할라치면 그에 대한 방어 논리로 우리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너를 위해 이런저런 학원도 보내고, 전문가의 상담도 받고 필요한 모든 것을 했노라고 조목조목 반박할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고 엄마가 공부하여 취득한 학습법과 이를 바탕으로 작성한 나름의 스케줄에 따라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러자면 엄마의 시간은 온전히 아이를 위해 바쳐져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힘든 것이다. 나는 사실 더 많은 이유를 말할 수도 있지만 나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대한민국의 보편적 부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에 더 말해봐야 누워서 침 뱉는 격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창의력은 IQ와 상관이 없다. 자신이 아주 잘 할 수 있는 한 가지만 있으면 된다. 대단히 가치 있는 상상은 어느 날 갑자기 마법처럼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을 때, 그 지식을 바탕으로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p.264)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은 지난 금요일부터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다. 부담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첫날 본 시험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국어 시험을 보았는데 난이도는 높지 않은 것 같았는데 서술형 답안을 작성할 때 시간이 부족했을 정도로 지문이 길고 복잡했었다는 아들의 대답이 돌아왔다. 학교에서는 몰랐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객관식 문제 하나를 틀린 것 같다는 솔직한 고백과 함께. 이런 환경에서 아이의 창의력이 길러질 리 없다는 걸 잘 알지만 당장 눈앞의 불을 끄고 싶은 게 부모의 욕심이기도 하다. 아이의 창의력을 높이는 교육은 사실 부모의 인내력과 용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아이의 교육에 대한 지식은 차후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교육에 대한 부모의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유익한 지식도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아들은 다음 주에 있을 시험공부를 한답시며 일찍부터 밖으로 나가고 없다. 나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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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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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을 평가하고 문명을 파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검토하는 단체가 바로 어스 가디언즈이다. 그들은 이따금 조만간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10가지의 위협을 공개하곤 하는데 그중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바로 바이러스로부터의 위협이다. 2017년의 발표에 의하면 1위가 '인공지능의 폭주', 2위는 '합성 생물 공학에 의한 판데믹'으로 자기 복제 능력이 있는 바이러스의 '기능 획득'과 생명공학 연구소 직원의 실수 혹은 돌발행동에 의한 바이러스 유출을 심각한 위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3위는 'AI 무기를 소유하는 민병대', 4위는 '핵전쟁의 발발', 5위는 '극단적인 기후 변화로 인한 인프라의 황폐 등이 있으며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이나 '폭군의 등장'도 있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은 반드시 일어난다기보다 일어날 가능성에 중점을 둔 연구 보고서이지만 실제로 중국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페스트 환자의 발생이라든가 국내에서도 있었던 아프리카 돼지열병, 항생제가 잘 듣지 않는 병원 내성균에 감염돼 사망하는 환자의 수 증가 등 바이러스의 위협은 어떤 가능성의 차원이 아니라 상존하는 위협인 게 사실이다. 일본 국립국제의료연구센터병원 연구팀의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내성균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연간 최소 8000명에 이른다고 하니 결코 가벼이 취급할 위협이 아닌 것이다.

 

제13회 김유정 문학상을 받았던 이경 작가의 첫 장편소설 <소원을 말해줘>도 그와 같은 가능성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SF소설이라는 게 모름지기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현시점에서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펼쳐내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장르소설에 대한 선호도가 빈약하고 작가층도 두텁지 않은, 말하자면 SF소설의 지지기반이 약한 우리나라에서 SF소설을 내놓는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자 도전일지도 모른다.

 

"전설 속 거대한 뱀 '롱롱'을 찾아 나선 파충류 사육사 '그녀'와 방역 센터의 입소자들. 허물에 덮인 그들이 롱롱과 마주치는 순간, 도시를 움직이는 거대 제약 회사의 충격적인 음모가 드러난다. 작가의 압도적이고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구축된 거대 도시. 재난과 질병에 포위된 인간의 극한 공포. 그리고 생존을 위한 단 하나의 간절한 '소원'!" (표지글)

 

소설의 주인공인 '그녀'는 파충류 사육사이다. 티셀 바이러스에 감염된 엄마로부터 태어난 그녀 역시 온몸이 허물에 덮이는 피부병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치료 병동에 수감된다. 거대 제약회사가 지배하는 인구 50만의 기획 도시에 사는 '그녀'는 석 달전까지만 하더라도 파충류 사육사였지만 산사태로 동물원이 무너지면서 직업을 잃었다. '그녀'는 비단뱀을 찾아 D구역으로 간다. 뱀의 허물 같은 각질이 온몸을 뒤덮는 풍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드러낸 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 그곳 사람들은 전설 속 거대뱀 '롱롱'이 허물을 벗으면 세상의 모든 허물이 벗겨진다고 믿고 있다.

 

허물을 벗기 위해 입소했던 방역센터에서 '그녀'는 김과 후리, 뾰족 수염과 척을 만나게 되고 거대 뱀이 사는 곳의 위치를 알게 된 그들은 폐허가 된 궁의 아궁이에서 거대 뱀을 꺼내 D구역의 끝에 위치한 김의 재생타이어 가게로 간다. 그곳에는  항공 타이어가 긴 동굴처럼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 거대 뱀을 숨긴 채 허물을 벗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하게 된 것은 도시정부와 거대 기업이 모의한 충격적인 음모였다.

 

"공포가 이념이 되고 , 이념이 공포를 강화시켰다. 그 불행한 순환 속에 유일하게 실재하는 건 허물 뿐이었다. 공 박사는 시민이 아니라, 시민들의 허물이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p.277)

 

허물을 벗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에 판타지를 심어준 거대 기업과 도시정부의 음모.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진실 앞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의 실체가 드러나고 소설은 끝을 향해 가는데...

 

"롱롱에게로 흘러든 수많은 소망들, 롱롱의 몸속으로 들어간 엄마와 노파, 노파의 모친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들, 롱롱은 그 모든 것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장대한 몸뚱이였다.  시간의 지류 같은 이야기들이 흘러들어 가는 사이 허물이 생기고 허물을 벗고, 마침내 롱롱은 거대한 시간의 강으로 흘러야 했다. 마침내 세상의 모든 허물을 벗기는 신이 돼야 했다."

(p.294)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자신의 허물을 벗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질 수 없는 우리는 우리를 대신할 거대 뱀 롱롱을 기다리면서 그 판타지 속에 우리의 욕망을 숨기고 잇는 것은 아닐까.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아토피를 떠올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잇으면서도 이렇다 할 치료제는 내놓지 못하는 걸 보면 아토피는 일종의 문명병이 아닌가. 가려움으로 인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밤새 자신의 피부를 긁어대는 무서운 병. 작가는 어쩌면 이 시대의 천형은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거대 기업의 음모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고 추정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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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실수라는 게 항상 실수를 한 당사자의 약점이 되거나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는 건 아니어서 때로는 그 사람의 매력을 도드라지게 만들기도 하는 까닭에 나는 누구에게나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나는 실수 전도사인 셈이다. 특히나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만날라치면 실수의 중요성을 장황하게 말하곤 한다. 때로는 본의 아니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바람에 꼰대(?)로 오인받기도 하지만 말이다.

 

예컨대 직장에서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는 실제 성격은 그렇지 않더라도 냉정해 보이기도 하는데 아주 가끔씩 하는 가벼운 실수가 냉정함을 희석시키기도 하고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인간미를 한껏 선뵐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은 실수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곤 한다. 누구나 단 한 번의 인생을 사는 인생 신입생들이 아닌가.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도 한동안 손을 끊었던 게임을 다시 손을 대는 듯하다.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말이다. 어찌 말해야 기분 나쁘지 않게 내 뜻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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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 - 하 - 반룡, 용이 될 남자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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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 하권은 황궁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왕현이 모름지기 황궁의 수호자이자 대들보로 성장한 장면부터 시작된다. 선황이 붕어하고 황후였던 고모마저 중풍으로 쓰러지자 이제 왕현은 그들의 응석받이가 아닌 그들을 돌보아야 할 위치에 섰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조정에서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아버지마저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우울한 소식들이 이어지던 중 가깝게 지내던 송회은이 옥수와 결혼하여 시매부(媤妹夫)가 되고 오라버니의 시첩이 아들을 낳았다는 기쁜 소식도 전해졌다. 강보에 싸였던 어린 황상이 말을 하기 시작하여 왕현을 '고모'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도 기쁜 소식 중 하나였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본디 약하게 태어난 황상이 계단에서 실족을 하여 백치가 되고 남정을 떠나게 된 소기가 자담을 불러들인다. 소기는 자담을 평남대원수로, 송회은에게 그의 부장을 맡겨 강남 역당 토벌에 동참하도록 했다.

 

"가문이 내게 준 진정한 보물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권세 있는 사내를 정복하고 천하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용사를 정복할 타고난 지혜와 용기였음을. 자고로 사내는 천하를 정벌하고 여인은 사내를 정복하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지금의 왕현은 이미 지난날의 연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세상 사람들이 감히 나를 얕보지 못하게 할 것이며, 그 누구도 내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게 할 것이다." (p.67)

 

절대 권력을 누리던 낭야왕씨 가문은 이제 황권의 약화와 함께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경사에서 멀어졌던 남방의 왕족들이 세력을 키우면서 국민들은 도탄에 빠진다. 황권이 약해지자 북방의 변경에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무리들이 등장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3황자 자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자 안정되는 듯하던 정국은 금세 뒤숭숭해지고 모반과 암투, 변경에서의 끝없는 전쟁으로 소기와 왕현은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한다. 결국 소기는 정벌을 위해 출정하고 궁궐에 홀로 남겨진 왕현은 믿엇던 사람으로부터의 배반과 거짓 정보에 좌절한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고통이 아니라 쇠붙이처럼 무겁게 짓눌러오는 고단함이었다. 고단함은 내 의지를 무겁게 짓눌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이대로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어 더는 고단함과 아픔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유유히 천지를 떠돌고 싶었다. 너무나 매혹적이고 간절히 원하는 일이었다." (p.323)

 

혼란의 와중에도 새 생명은 태어나는 법. 유산과 여러 번의 고초를 겪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왕현의 뱃속에도 아기가 들어서고 왕현은 쌍둥이를 출산한다. 믿었던 송회은의 반란과 남편 소기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익숙했던 평화가 다시 찾아올 것임을 알지만 책을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되는 것은 작가의 치밀한 구성이 독자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하지 않던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권력을 향해 부나방처럼 뛰어드는 게 인간이고 보면...

 

"난리는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목숨이 오가는 난리를 함께 겪은 뒤 똑같이 고집 센 두 사람은 마침내 과거사에서 벗어나 새 삶을 맞았고, 서로를 지켜주게 되었다. 다만 두 사람은 평생 서로를 지킬 뿐 바로 곁에서 서로 사랑할 수는 없는 대가를 치렀다." (p.474)

 

그렇지 않은가. 제1야당의 대표는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모든 민생법안을 올 스톱시키고, 제1야당의 한 의원은 미국 대사에게 북한과의 종전선언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아무리 권력이 좋기로서니 나라를 팔고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짓이길 수 있단 말인가. 인간도 아니다. 그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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