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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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을 평가하고 문명을 파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검토하는 단체가 바로 어스 가디언즈이다. 그들은 이따금 조만간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10가지의 위협을 공개하곤 하는데 그중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바로 바이러스로부터의 위협이다. 2017년의 발표에 의하면 1위가 '인공지능의 폭주', 2위는 '합성 생물 공학에 의한 판데믹'으로 자기 복제 능력이 있는 바이러스의 '기능 획득'과 생명공학 연구소 직원의 실수 혹은 돌발행동에 의한 바이러스 유출을 심각한 위협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3위는 'AI 무기를 소유하는 민병대', 4위는 '핵전쟁의 발발', 5위는 '극단적인 기후 변화로 인한 인프라의 황폐 등이 있으며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이나 '폭군의 등장'도 있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은 반드시 일어난다기보다 일어날 가능성에 중점을 둔 연구 보고서이지만 실제로 중국에서 얼마 전에 있었던 페스트 환자의 발생이라든가 국내에서도 있었던 아프리카 돼지열병, 항생제가 잘 듣지 않는 병원 내성균에 감염돼 사망하는 환자의 수 증가 등 바이러스의 위협은 어떤 가능성의 차원이 아니라 상존하는 위협인 게 사실이다. 일본 국립국제의료연구센터병원 연구팀의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내성균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연간 최소 8000명에 이른다고 하니 결코 가벼이 취급할 위협이 아닌 것이다.

 

제13회 김유정 문학상을 받았던 이경 작가의 첫 장편소설 <소원을 말해줘>도 그와 같은 가능성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SF소설이라는 게 모름지기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현시점에서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펼쳐내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장르소설에 대한 선호도가 빈약하고 작가층도 두텁지 않은, 말하자면 SF소설의 지지기반이 약한 우리나라에서 SF소설을 내놓는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자 도전일지도 모른다.

 

"전설 속 거대한 뱀 '롱롱'을 찾아 나선 파충류 사육사 '그녀'와 방역 센터의 입소자들. 허물에 덮인 그들이 롱롱과 마주치는 순간, 도시를 움직이는 거대 제약 회사의 충격적인 음모가 드러난다. 작가의 압도적이고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구축된 거대 도시. 재난과 질병에 포위된 인간의 극한 공포. 그리고 생존을 위한 단 하나의 간절한 '소원'!" (표지글)

 

소설의 주인공인 '그녀'는 파충류 사육사이다. 티셀 바이러스에 감염된 엄마로부터 태어난 그녀 역시 온몸이 허물에 덮이는 피부병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치료 병동에 수감된다. 거대 제약회사가 지배하는 인구 50만의 기획 도시에 사는 '그녀'는 석 달전까지만 하더라도 파충류 사육사였지만 산사태로 동물원이 무너지면서 직업을 잃었다. '그녀'는 비단뱀을 찾아 D구역으로 간다. 뱀의 허물 같은 각질이 온몸을 뒤덮는 풍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드러낸 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 그곳 사람들은 전설 속 거대뱀 '롱롱'이 허물을 벗으면 세상의 모든 허물이 벗겨진다고 믿고 있다.

 

허물을 벗기 위해 입소했던 방역센터에서 '그녀'는 김과 후리, 뾰족 수염과 척을 만나게 되고 거대 뱀이 사는 곳의 위치를 알게 된 그들은 폐허가 된 궁의 아궁이에서 거대 뱀을 꺼내 D구역의 끝에 위치한 김의 재생타이어 가게로 간다. 그곳에는  항공 타이어가 긴 동굴처럼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 거대 뱀을 숨긴 채 허물을 벗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하게 된 것은 도시정부와 거대 기업이 모의한 충격적인 음모였다.

 

"공포가 이념이 되고 , 이념이 공포를 강화시켰다. 그 불행한 순환 속에 유일하게 실재하는 건 허물 뿐이었다. 공 박사는 시민이 아니라, 시민들의 허물이 불행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p.277)

 

허물을 벗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에 판타지를 심어준 거대 기업과 도시정부의 음모.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진실 앞에서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의 실체가 드러나고 소설은 끝을 향해 가는데...

 

"롱롱에게로 흘러든 수많은 소망들, 롱롱의 몸속으로 들어간 엄마와 노파, 노파의 모친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들, 롱롱은 그 모든 것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장대한 몸뚱이였다.  시간의 지류 같은 이야기들이 흘러들어 가는 사이 허물이 생기고 허물을 벗고, 마침내 롱롱은 거대한 시간의 강으로 흘러야 했다. 마침내 세상의 모든 허물을 벗기는 신이 돼야 했다."

(p.294)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자신의 허물을 벗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질 수 없는 우리는 우리를 대신할 거대 뱀 롱롱을 기다리면서 그 판타지 속에 우리의 욕망을 숨기고 잇는 것은 아닐까.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아토피를 떠올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잇으면서도 이렇다 할 치료제는 내놓지 못하는 걸 보면 아토피는 일종의 문명병이 아닌가. 가려움으로 인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밤새 자신의 피부를 긁어대는 무서운 병. 작가는 어쩌면 이 시대의 천형은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거대 기업의 음모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고 추정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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