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미움들 - 김사월 산문집
김사월 지음 / 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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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봄을 재촉하는 비가 아침부터 내렸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온 나라가 시끄러워도 계절은 어김없이 가고 또 온다. 축축하고 무력하며 때로는 땅 속으로 가라앉을 듯 나른한 우울이 빗소리와 함께 섞인다. 우리가 우울함에 중독되는 이유는 우울함이 우리가 찾아낸 감정 중에서 가장 무겁고 낮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라는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을 주는 건 우울한 감정이 유일하다고 그는 말했었다. 모든 게 가볍고 쉬이 변하는 시절에 오랜 시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것이 비록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할지언정...

 

김사월의 산문집 <사랑하는 미움들>을 읽었던 건 우울함을 길게 이어가고픈 일종의 감정 연장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슬플 땐 슬픈 음악을 듣는 것처럼 말이다. '김사월, 이름이 좀 특이하네. 예명인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저자의 직업이 가수라는 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식만 듣거나 보는 나로서는 누군가 내게 가수나 탤런트의 이름을 물었을 때가 가장 난감하다. 게다가 텔레비전마저 치워버린 최근의 몇 년 동안 새롭게 등장한 가수나 탤런트라면 더더욱.

 

"매일 먹어야 하는 약 중 하나가 수면에 도움을 준다는 졸피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염증 때문에 약을 처방받았는데, 그 약과 졸피뎀의 성분이 무언가 맞지 않아서 부작용이 염려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졸피뎀을 끊었다. 돌고 돌아 지금은 나에게 더 잘 맞는 정신과 약을 처방받고 있다. 잠드는 방법을 잊고 잠에 들지 못했던 수많은 밤들이 떠오른다. 너무 고독해 누군가를 찾고,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잠에 들기를 바랐다." (p.164~p.165)

 

이렇게 쓰면 나를 꼰대라고 할지도 모른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저자는 이 책 <사랑하는 미움들>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대개 그런 것처럼. 아날로그 세대의 시선에서 그런 솔직함은 언제나 일말의 불안을 유발한다. 자신을 마구 내던지는 듯한 아슬아슬함이 나도 모르게 들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소중한 비밀들은 그들도 역시 가슴 깊숙이 숨겨두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나는 대외적으로 슬슬 소비되고 있는 나를 즐기면서도 불안해하고 있다. 마치 언젠가 떠나갈 인연을 걱정하며 당장의 상황을 못 보는 사람처럼. 차라리 "마음껏 날 욕망하고 버려도 좋아!"라고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고 소모되지 않는 영원하고 무한한 우주가 되고 싶기도 하다. 나 대신 나를 좀 사랑해줄 사람을 찾습니다." (p.167)

 

우리는 더 이상 가라앉을 수 없는 가슴 밑바닥의 감정들에 끌린다. 우울에 중독되는 까닭도 그런 이유이겠지만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것들엔 우리를 파괴하는 보이지 않는 발톱이 숨겨져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던 프랑수아즈 사강의 외침은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울한 기분에 휩싸이는 순간 편안함을 느끼고, 오랫동안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며, 우울함이 주는 나른한 휴식에 빠져든다. 매력적인 싱어송라이터라는 저자는 여행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고, 김영하의 팟캐스트 '책 읽는 시간'을 즐겨 듣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따금 어느 아티스트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하여 더 깊은 우울에 빠져들도록 강요하기도 하고,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깊은 우울을 소비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 명을 다하지 못한 채 요절한 어느 예술가의 삶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이율배반적인 이와 같은 행태를 우리는 '공감'이라 말하기도 하고, '안타까움'이나 '사랑'이라 말하기도 한다.

 

"나는 또다시 우리가 살아있다는 데에 안도하고 안심하고 고맙고 눈물이 나요. 제 이야기를 읽어줘서 고마워요. 어떤 부분이 좋았을지 궁금하지만 쑥스러워서 물어보기 어렵네요. 다만 한번 봐주셨다면 그걸로 무척 기뻐요. 저를 읽고 기억하거나, 잊거나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세상에 있어주어 고마워요." (p.207)

 

비는 그쳤고, 귀가한 사람들이 서둘러 불을 밝히고 있다. 농밀한 우울을 서둘러 몰아내려는 듯 말이다. 밖에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만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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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였다. 코로나19 바이러스만 아니라면 다들 들로 산으로 외유를 떠났을 텐데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오가는 차량의 행렬도 그저 뜸하기만 했다. 전염병이라는 게 무섭긴 무섭나 보다. 사람들로부터 흔한 휴일 풍경을 앗아갔으니 말이다. 아파트 근처의 야산에 올랐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었고, 나무의 몸통에 귀를 가까이 대면 금방이라도 물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릴 듯한, 봄기운이 완연한 날씨였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등산로를 따라 가볍게 산책을 하고 있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만 아니라면 평온한 휴일 풍경이었다. 따스한 햇살과 맑은 공기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표정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느낀다. 행복이란 이렇듯 일상의 평화를 깨지 않는 것임을, 특별하고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지켜나갈 수 있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공병우 박사의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를 읽고 있다. 오래전에 한국일보사에서 한국 고집쟁이 열 명을 뽑았을 때 1위가 이승만, 3위가 최현배, 6위가 공병우였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의 삶을 철저히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왔음을 책에서 쓰고 있다.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사람들과 되도록 사귀지 말라는 교육을 철저히 받으며 자랐다. 딴 사람으로부터 나쁜 사회물이 들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도 있고, 또 나쁜 돌림병 같은 것에 오염되지 않게 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철저하여, 남의 혼인 잔치나 생일잔치 등에 일절 나가지 않는 괴팍한 사람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사교술은 비록 서툴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진심으로 대한다. 마음에 없는 것을 꾸며서 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무척 정이 안 통하는 냉랭한 사람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다음 주 일기예보를 보니 비 소식이 잦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비에 쓸려 깨끗이 씻겨 나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학생들의 개학이 연기되고 감염자가 600명을 넘었다 하니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키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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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0-02-25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병우 박사님의 조부님의 철학도 어떤 경험에서 나오신건지 무척 궁금하네요^^

꼼쥐 2020-02-28 20:14   좋아요 0 | URL
장손인 공병우 박사를 끔찍이도 사랑하셨나 봅니다. 돌림병이 돌아 혹시 잘못될까 노심초사하셨던 듯.
 
스스로 행복하라 - 법정 스님 열반 10주기 특별판, 샘터 50주년 지령 600호 기념판
법정 지음 / 샘터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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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지역에도 코로나19 감염자가 추가되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공포심도 한층 높아졌는지 내일부터는 도서관도 문을 닫는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특별한 약속이나 모임이 없어진 요즘, 휴일이 다가오면 도대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렇다고 집안에 틀어박혀 온종일 책만 읽는다는 것도 못할 짓이고, 인터넷으로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 몇 편이고 연속해서 보는 것도 그렇고, 무릎을 칠 만큼 좋은 방안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자기 몫으로 주어진 짧은 시간의 휴식도 나는 이렇듯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되는데, 한정된 시간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유용하게 쓸 것인가 고민하지 않는 걸 보면 나는 참으로 딱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꼭 한 군데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 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 벌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 사증入國 査證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가 보고 싶다." (p.60)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 지 벌써 10. 법문과도 같은 스님의 말씀을 인생의 등불로 삼았었던 까닭에 나 역시 스님께 빚을 진 채 살고 있지만 그 말빚을 갚기에는 내 삶이 보잘것없어 늘 미안할 뿐이다. 스님의 글은 언제 읽어도 더없이 좋다. 군더더기가 없이 간단명료한 문장은 핵심을 벗어나지 않고, 이런 뜻일까 아니면 저런 뜻일까 오해할 일도 없다. 그래서인지 스님의 글을 읽으면 복잡했던 머리가 가지런히 정리되는 느낌이다. 맑고 개운해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뜻을 모르고 읽어도 그 느낌은 여전하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가 하는 행위에 의해 인간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비인간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 오로지 인간다운 행위에 의해서 거듭거듭 인간으로 형성되어 간다." (p.179)

 

법정 스님이 남긴 글들 중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을 가려서 뽑았다는 이 책은 1'행복', 2'자연', 3'', 4'나눔'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은 사람도 마음먹고 읽으면 두어 시간이면 다 읽을 만큼 두껍지 않은 책이다.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 나는 스님이 남긴 추천 도서('내가 사랑한 책들'에 실린 50권의 도서) 목록을 보며 긴 시간을 두고 스님이 권한 책들을 골라 읽었던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3''에 눈길이 갔던 게 사실이다.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욕심만 앞서는 까닭이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폐허가 되어 버린 원형 극장으로 고아 소녀인 모모를 찾아간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 어린 소녀에게 털어놓는다. 소녀는 다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줄 뿐인데, 방황하는 사람들은 정착을, 나약한 사람들은 용기를, 불행한 사람과 억눌린 사람들은 신념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뜬다." (p.144)

 

우리 모두가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며 어린 왕자처럼 삶과 죽음에 초연할 수는 없지만, 물욕이나 집착에 휩쓸리지 않고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사는 날까지 자유롭고 충만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루하루 날을 더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더해진 삶이 인간이 아닌 비인간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면 본인은 물론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그 시간들이 아깝다 여기지 않겠는가.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스스로가 다음 생의 자신을 만들고 있습니다.'라는 스님의 준엄한 말씀은 느슨하게 풀어지려는 마음을 한순간에 다잡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온 나라가 들썩이는 요즘, 달리 할 일이 없으니 홀로 걷는 시간만 늘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산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도, 지저귀는 새소리와 분주한 청설모의 움직임도 어느 순간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오직 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과연 몇 %의 인간인가?'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을 맞으며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일지 않는 걸 보면 나는 폴 발레리의 시구를 그저 눈으로만 읽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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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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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원으로 퍼지는 물웅덩이의 파문처럼 나로부터 비롯된 선한 영향력이 가능한 한 멀리 퍼져나갔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예컨대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지구 온난화를 예방하기 위해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이 걷는다거나, 쓰레기를 버릴 때에도 꼼꼼하게 분리배출을 한다거나,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주방세제 사용을 줄인다거나 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서 한다기보다 나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뜻에 공감하고 동참해주기를 바라는 목적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희망사항으로 그칠지라도 말이다.

 

엘렌 심(Ellen Shim)이 펴낸 <고양이 낸시>는 누군가로부터 비롯된 선한 영향력이 우리 이웃을, 우리 마을을, 나아가서 온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어쩌면 우리들에게 그 실체를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만화라는 시각적인 도구를 통해서 말이다. 어느 날 밤, 쥐 마을에 버려진 아기 고양이 낸시를 평범한 쥐 가족의 가장인 더거 씨가 데려와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사랑과 정성으로 돌본다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이기는 하지만.

 

"제가 틀렸었어요...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건 저였어요.

고양이 낸시만 보느라 다른 낸시들을 못 봤어요.

더거씨의 사랑스러운 막내 딸 낸시.

지미의 소중한 동생 낸시.

그리고 모두가 너무나도 아끼는 낸시." (p.224~p.225)

 

짐작하겠지만 고양이 낸시는 쥐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마을에 버려졌다. 담요에 싸인 채 더거씨 집 앞에. 어른 쥐인 더거씨는 낸시가 고양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오랜 고민 끝에 낸시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더거씨의 아들 지미 역시 낸시를 끔찍이도 좋아한다. 그러나 문제는 마을 사람들의 반대였다. 고양이는 그들에게 가장 위험한 동물이었으니까. 그러나 마을에서 낸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아기 고양이 낸시를 더거씨 자신은 차마 버릴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하겠노라고 하자, 결국 마을 사람들도 낸시가 고양이라는 사실을 어른들만 알고 아이들에게는 숨긴 채 받아들이기로 한다.

 

낸시도 무럭무럭 자라 오빠 지미와 함께 학교에 가게 되었다. 낸시는 분홍색 머리핀을 좋아하고, 공놀이보다 공주님 놀이를 더 좋아하고, 친구들보다 유난히 큰 자신이 너무 뚱뚱한 건 아닌지 고민을 하기도 한다. 생김새도, 좋아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다 다르지만 마음씨 고운 낸시를 아이들은 좋아한다. 그런 낸시를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주는 건 역시 오빠 지미다. 친구들 사이에 낸시가 끼임으로써 아이들 간에 문제가 생기거나 학교 생활이 불편해지는 건 전혀 없다. 오히려 '보드랍고 풍성한 꼬리, 새하얗고 북실한 털, 남들보다 큰 키'를 가진 낸시가 있음으로써 친구들의 학교 생활은 더욱 즐겁고 풍성해진다.

 

"우와아!! 엄청 크다!!!

나 뭔지 알아!! 책에서 봤어!!

벌써?!

저 큰 키!! 저 북실한 털!! 북쪽에서 온 쥐가 분명해!!!" (p.94~p.95)

 

아기 고양이 낸시로 인한 갈등과 혐오의 조장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적극 실천함으로써 더욱 끈끈한 우정이 샘솟게 하는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 같은 만화다. 가뜩이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유럽인이 아시아인을, 아시아에서는 다시 한국인이 중국인을 혹은 한국인이 일본인을, 더 나아가 한국에서는 서울 사람들이 대구 사람들을 마치 타 종족을 보는 듯 혐오하고 배척하는 요즘, 사려 깊은 동물들이 보여주는 사랑과 평화의 어울림은 마치 엊그제 보았던 눈 내리는 풍경과 맞닿아 있는 듯했다.

 

우리는 갈등과 혐오가 난무하는 소위 '막장 드라마'를 빠져들며 보는 경향이 있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내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내뱉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순하디 순한 드라마는 그닥 인기가 없는 게 현실이다. 지금은 치우고 없지만 나 역시 집에 텔레비전이 있었던 과거에는 막장 드라마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보곤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무자비한 드라마를 왜 그렇게 열심히 보려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전염병의 확산으로 공포와 혐오가 일상화된 탓인지 마음 따뜻해지는 만화가 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이따금 만화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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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계획이나 대책도 없는 나날들이 흘러가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흘려보낸 날들이 지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음을 우리는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나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1년에서 1월과 2월은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시기일지도 모른다. 지키지도 못할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피곤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지켜나가려고 애를 쓰는 시기. 지나고 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만 말이다.

 

지난해 내가 시골에서 만났던 어르신 중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던 분이 있다. 평생을 건설회사에서 보냈다는 그분은 정년퇴직을 하고 홀로 귀농을 하신 분이었는데, 시골에 와서 곰곰 생각을 해보니 직장 생활을 했던 수십 년 동안 오직 승진을 목적으로 밤잠을 설쳐가며 영어 공부에 몰두했던 게 도대체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더란다. 시골에 와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에 그 많은 세월을 투자했다는 게 당사자인 자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더라는 말씀이었다.

 

그분과 함께 근처의 겨울 낚시터를 방문했었다. 나는 낚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낚시터의 호젓한 분위기는 좋아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낚시 바늘에 지렁이도 꿸 줄 모르는, 낚시에는 초보 축에도 끼지 못하는 문외한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종종 낚시터를 찾곤 한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호수 위에 초록빛 야광찌가 별빛처럼 떠있는 풍경이라든가, 석양이 비껴가는 오후의 호수 수면 위로 곱게 이는 물비늘이라든가, 물안개와 함께 깨어나는 아침 풍경이라든가 아무튼 낚시터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풍경들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름보다는 낚시꾼의 발길이 뜸한 겨울 낚시터를 선호한다. 외진 곳에 좌대 하나를 빌려 빈 낚싯대를 드리운 채 몇 시간이고 있다 보면 세상 사는 게 별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고, 하늘을 나는 새들이 슬몃 부러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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