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문 예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마치 시대의 아이콘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단순한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정말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확실한 믿음 하에 행동거지며, 남을 대하는 태도며, 사소한 말투까지도 바꾸어 버린다. 어린 시절을 그와 함께 보냈던 한 친구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쳤을 때 아마도 그 친구는 돌변한 그의 태도에 말을 잃은 채 멀뚱멀뚱 넋을 놓았을는지도 모른다. 친구인 자신을 그는 아마도 자신의 부하나 똘마니쯤으로 여겼을 테니까 말이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진검승부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대검찰청은 법무부의 외청이고 개개의 사건에 대한 수사나 기소에 관여할 수는 없지만 예산이나 인사 등 법무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게 맞다. 검찰청법에도 법무부 장관이 검찰의 최고 지휘 감독자라고 명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윤석열 검찰총장은 국정감사 자리에서 "일단 법리적으로 보면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 만약 부하라면 검찰총장이라는 직제를 만들 필요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법무부 장관의 위에 군림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오만방자하게도 말이다.

 

엊그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의 판사 불법사찰 지시 등 여섯 가지 위법 행위를 들어 검찰총장에 대한 직무배제 조치를 취했다. 이에 반발한 검찰총장은 서울행정법원에 직무배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두 사람 다 각자의 위치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은 언제든 개진할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법적으로 정당하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는 법정에서 가려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언론 대부분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마치 권력의 피해자인 양, 불법행위의 희생양인 양 민심을 호도하고 그를 감싸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사실 윤석열 검찰총장은 대한민국 공무원을 권력 순으로 나열할 때 실세 중의 실세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어느 조직이나 조직의 구성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게 마련이고 이를 어기면 좋든 싫든 처벌을 감수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사기업보다는 공기업이, 공기업보다는 공무원 조직이 규칙의 적용에 있어서도 훨씬 느슨할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업무 강도 역시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더구나 권력의 정점에 있는 검찰 조직은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오지 않았던가. 그것을 막겠다고 나서니 저항이 클 수밖에... 그러나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공무원 조직의 구성원은 시대의 아이콘이 아니라 시대의 추종자라는 사실이다. 국민들로부터 시대의 변화에 대해 많이 듣고 그 변화에 묵묵히 적응해 가면 된다. 자신이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국민 위에 군림하게 된다. 만약 자신이 시대의 아이콘이 되려 한다면 사업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거나, 종교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도 아니라면 연예인이 되거나. 공무원은 시대의 아이콘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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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걷는사람 에세이 7
김봄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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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의 우울은 언제나 낮게 드리워진 잿빛 하늘과 희박해진 산소 농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도시가 빚어내는 성긴 우울의 그물망은 언뜻언뜻 기쁨을 가장한 가공의 웃음들이 섞이게 마련, 철없는 도시내기들은 그런 인위적인 웃음에도 마냥 들떠하곤 하는 것이다. 초겨울 햇살이 비쩍 마른 들고양이의 가벼운 발걸음처럼 사무실 한 귀퉁이를 살금살금 잠식하더니 급기야 책상 위로 올라와 제집인 양 훑고 지나갔다. 김봄 작가의 에세이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는 어쩌면 이런 나른한 오후에 딱이다 싶은 그런 책인지도 모른다. 읽다 보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슬그머니 코 평수가 넓어지면서 행복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애써 자위하게 된다.

 

"손 여사는 다혈질이고 매 순간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고집이 세지만 또, 남의 말을 잘 믿는다. 남의 말만 믿고 고집을 부릴 때는 대책이 없긴 하다. 손 여사는 자식이 많은 탓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았을 테지만, 그래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p.45~p.46)

 

작가가 펼쳐 놓은 이야기보따리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이야기의 출발은 대개 40대 중반의 미혼 여성이자 진보 성향인, 그것도 보수적인 집안의 오 남매 중 셋째인 작가가 엄마인 '손 여사'와의 이념 분쟁에서 비롯되지만 사사건건 부딪히고, 다투면서도 끝내 화해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오히려 서로를 걱정하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모녀 싸움은 칼로 물 베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손 여사는 작가의 수학 담당이자 남동생의 담임이었던 선생님에게 당연하다는 듯 촌지를 주기도 하고, 출신 지역에 따라 정치적 편향이 정해진다고 확고하게 믿기도 하며, ‘땅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신념으로 삼는 중산층으로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나 성 소수자를 향한 삐딱한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여전히 손 여사는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걱정하고, 내가 어떻게 자리를 잡을 것인지를 걱정한다.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꽤 오랫동안 나의 고양이들도 봐줬다. 어디 나가서 허풍선이가 될까 봐 언제나 확실한 것만 말하라고 뼈 아픈 조언도 해준다. 그러면서도 내가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p.171)

 

우리는 대개 '다름'을 향해 다짜고짜 자신의 무딘 칼을 휘두르곤 한다. 습관처럼 말이다. 자기 주변에 다른 색깔의 풀이 자라는 걸 도무지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뿌리부터 싹둑 잘라버렸으면 좋겠지만 어디 그게 맘대로 돼야 말이지. 이쪽 편의 풀을 자르다 보면 저쪽 편의 풀이 무성해지고 나는 어느새 다른 색깔의 풀에 둘러 싸인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 이념과 가치가 다르다는 건 어쩌면 숲을 풍요롭게 하는 숲 속의 다양한 생명체처럼 우리들 생각의 숲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였는지도 모른다. 무딘 칼로 제거하려 애쓸 게 아니라 시간이 날 때마다 살뜰히 보살펴야 하는 다정한 이웃인 셈이다.

 

"언젠가 손 여사는 그런 내가 무섭기도 했다고 말했었다. 얌체, 똑똑이, 잘난척쟁이, 손 여사가 나를 호칭하는 말들이다. 내가 언젠가는 눈꼬리 값을 꼭 할 거라고. 그 말은 '너를 믿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p.56)

 

작가는 자신의 엄마인 손 여사를 소개함에 있어 지독히 편향적이고 고지식한 보수주의자임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책에서는 오히려 그 부분으로 인해 손 여사의 모든 행위가 용서(?)되는 일말의 애교쯤으로 읽히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이 간직한 오래전 기억 속의 이야기와 사소한 일상의 대화들을 기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특별하지 않은 한 가정의 '정치 풍속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작가의 글솜씨도 어쩌면 이와 같은 다양성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속의 우는 아이를 찾기 시작했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잦아들 때 즈음,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라는 건, 나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도구는 아니었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멋진 도구였다. 나는 점점 내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고, 그 문제 안에 있던 보수적인 손 여사와 나의 관계도 직시하게 되었다. 쉽게 풀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p.85)

 

“나는 보수 부모의 돈으로 자랐다. 그 돈으로 학원에 다녔고, 책을 사 읽었다.”는 작가의 고백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대한민국의 모든 아들 딸들은 자신과 다른 이념의 부모를 결코 미워하지 못한다. 작가가 그 덕에 “진보의 가치를 접했고, 진보적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며 “다르지만 다른 모습 그대로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들 자신의 현재는 부모님의 희생에 의한 결과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 고양이든 우파 고양이든 대한민국의 부모님은 누구나 자식을 돌보듯 그 여린 생명체를 살뜰히 돌볼 수밖에 없다는 게 우리들 부모의 성정이었음을 우리는 역시 잘 기억하고 있다. 초겨울 햇살이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있다. 이제는 담을 수 없는 어린 마음 하나가 햇살을 따라 스러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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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런 건 아니지만 토론이나 대화가 길어지다 보면 바야흐로 이야기는 본점에서 벗어나 전혀 가본 적도 없는 샛길로 흐르게 마련이다. 그럴 때 나는 이야기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생명이 있다는 건 곧 생각이 있다는 것, 스스로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도 그렇다. 생각이 있고 저마다의 길이 있지 않은가. 누구도 다른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의 길은 언제나 독자적이다. 생각 역시 언제나 개별적이고 독자적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생명이 사라진, 말하자면 죽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시간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이야기와는 달리 책으로 출간된 소설은 더 이상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이야기, 생명이 사라진 이야기, 그것은 어쩌면 역사의 기록처럼 미래의 많은 독자들에 의해  수많은 해석과 토론을 이끌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소재로 쓰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과거를 보고 듣고 느낄 뿐이다. 생명은 그렇다. 한시도 변화를 멈춘 적이 없고 시간에 따라 다만 흘러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을 수가 없다. 사람의 생각이나 이야기는 멈춤이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슬픔'은 말로 발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슬픔, 기쁨, 두려움 등 실체도 없는 온갖 감정들은 말로써 발화되는 순간 비로소 내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변모하여 굳어지기 때문이다. 한 번 굳어진 것은 스스로 풀어져 흩어지기 어렵다. 서서히 번져오는 슬픔의 그림자를 묵묵히 지켜보거나 내가 보았던 것을 누군가에게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슬픔'은 그렇게 흩어질 수 있으나 내게 다가오는 슬픔을 향해 '슬프다' 하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슬픔'을 버선발로 맞는 격이고 '슬픔'은 그대로 내 가슴에 남는다. '꺽꺽' 울음을 토할지언정 '슬프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쩌면 슬픔을 이기는 또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야기가 슬픔을 낳기도 하고, 이슬을 거둬가는 햇살처럼 당신의 이야기가 나의 슬픔을 앗아가기도 한다. 말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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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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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누군가의 삶이 지금도 지구 상의 어느 한 귀퉁이를 차지한 채 옹색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걸 생각할 때마다 이따금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괜스레,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다. 내가 그래서 소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대체적으로 소설은 주인공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더 나을 것도 없는 고만고만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그렇게 엇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때로는 질시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때로는 위로하면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잊지 않고 있다는 걸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p.70)

 

황정은의 소설 『연년세세年年歲歲』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인물의, 특별할 것 없는 삶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작가는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흔한 이름, '순자'에 대해 생각했고, 너무 많아서 오히려 저마다의 이름이 갖는 고유성을 잃고 정작 무명 씨에 가까운 '순자'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기에 이른다. 소설은 '1946년생 순자 씨' 이순일과 그의 두 딸 한영진 한세진의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며 이어지는데, 각각의 인물이 살아낸 삶의 궤적을 통해 격동의 시기를 겪어 온 한국 사회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한다.

 

"매일 지는 것 같아, 하고 하미영은 말했다. 나쁜 걸 나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인데 애를 써야 하고, 애쓸수록 형편없이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p.168)

 

일흔이 넘은 나이의 이순일은 자신을 키워준 외조부의 묘를 없애기로 결정하고 둘째 딸인 한세진과 함께 강원도 철원군으로 떠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녀의 생각과 일화를 그린 「파묘破墓」,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장녀 한영진의 삶을 되짚어 보는 「하고 싶은 말」,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김포에서 만났던 이웃이자 동명(어렸을 적 이순일도 '순자';라고 불렸다)의 친구 '순자'를 회고하는 「무명無名」, 북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닷새간 뉴욕에 머무는 동안 어렵게 만난 친척 제이미를 통해 불행했던 과거사를 생각하는 「다가오는 것들」의 네 편의 연작 소설이 실린 이 책은 소설가로서 황정은이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가족, 사회, 친구, 국가 등 여러 관계 안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각각의 소설을 쓸 때마다 소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삶을 살다 나왔고 나는 그게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웠다." (p.185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을 읽는다는 건 우리가 겪는 삶이라는 게 얼마나 구차하고 비루한 것인지 끝없이 되새김질하도록 강제하는 일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다시 들춰내 곰곰 생각한다는 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을 터, 비록 우리들 삶이 구차하고 비루할지라도 적절한 시기에 삶을 마감하리라 결심하기보다는 그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의미 있게 변화시키려 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참된 삶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성스러운 가치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굴하지 않는 개인의 의지가 아닐까. 바싹 마른 낙엽이 가벼운 바람에도 우수수 흩날리는 오후, 사람들은 많이 웃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많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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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지음 / 헤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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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밥벌이의 차원에서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장 크게, 빈번하게 불만을 토로하는 일 역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밥벌이가 아닐까 싶다. 밥벌이의 비애라고나 할까, 아니면 밥벌이의 서글픔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가계를 꾸려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반복적인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오히려 지긋지긋한 이 일로부터 언제든 벗어나고 싶은 갈망은 말할 것도 없고 반복에서 오는 지겨움이 일상을 지배하는 암울한 현실에 대해 우리는 여러 불만을 수시로 토로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불만 가득한 현실일지라도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긋한 안심이랄까, 다행이랄까 아무튼 그런 표현으로도 들린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실업이나 실직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창작을 위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에게조차 이와 같은 규칙적인 반복의 필요성이 요구될까?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대답이 서로 엇갈릴지도 모르겠다.

 

"<일간 이슬아>는 평일에 매일 한 편의 글을 써서 구독자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는 프로젝트다. 한 달에 20편을 보내고 월 구독료 만 원을 받으니까 글 한 편에 500원인 셈이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어묵 한 꼬치보다 저렴한 가격이지만 내 글이 어묵만큼의 기쁨인지 잘 모르겠다. 어묵보다 감동적인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p.531 '원고료에 관한 생각들' 중에서)

 

이슬아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이 텔레비전이었는지 아니면 라디오였는지 분명치는 않다. 그녀의 말을 지나치면서 슬쩍 들었을 때는 말이 어눌하다는 것과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는 있지만 대중으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지배적이었다. 왜 그런 인상을 받았는지 나는 지금도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터이다. 그러나 언론 매체의 가공할 만한 전파력 덕분인지 나의 선입견과는 전혀 다르게 '이슬아'라는 이름이 빠르게 알려지고 있었다. 적어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간 연재를 네 달째 이어가는 동안 그런 걱정이 들었다. 일상의 모든 것을 이야기로 만들려고 하는 성급한 사람이 되어온 게 아닐까. 매일 글을 쓰는 것과 쓴 글을 매일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예 다른 일이었다. 당분간 뜸하게 보여줄 수 있다니 다행스러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뭐라도 쓰는 건 정말 위험하지 않나. 이야기가 내 안에서 고이고 쌓이고 응축되기를 바랐다." (p.360~p.361 '산책의 어려움' 중에서)

 

어떤 대가를 받고 글을 쓴다는 건 그런 재능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견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적나라한 속내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미주알고주알 까발려진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터, 2018년 2월 12일에 시작된 이슬아 작가의 글이 하루하루 날짜를 더해가면서 빠르게 변해갔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애, 섹스, 추억 등 자신의 경험 일변도의 내용이 주류였던 글은 점차 폭을 넓혀 가족, 지인, 책이나 영화 등으로 옮겨 간다. 게다가 '일간 이슬아 친구'의 글을 싣는 것으로까지 확장되기에 이른다.

 

"이슬아가 내 친구가 아니었다면 <일간 이슬아>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미친 사람이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완성해내야 하는 개미지옥으로 자신을 밀어넣었나! 그러나 내가 그의 친구임을 기억해낸 나는 곧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재주 많은 내 친구는 어찌하여 방구석에 처박혀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나. 모름지기 진정한 친구라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슬아야, 그만둬!"" (p.542 '매일의 小偉人' 중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글을 쓰는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쓰면 쓸수록 실력이 늘고 남들이 보기에도 그럭저럭 읽을 만한 글을 완성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글감이나 글의 소재를 발굴하는 것 역시 처음이나 어렵지 익숙해지면 그닥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내가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지 않아 너무 쉽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아무튼) 그러나 <일간 이슬아>를 <인간 이슬아>로 등치 시켜 생각해왔던 구독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작가의 변화가 썩 내키지만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처음에 알았던 '인간 이슬아'는 어디로 가고 '작가 이슬아'가 그들 앞에 떡 하니 서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주말부터 읽기 시작했던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내 손을 떠났다. 살면서 많은 미련이나 후회만 남지 않는다면 인생은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말하곤 한다. 참으로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고 그렇게 성의 없이 말해도 되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나는 비슷한 말을 들려주곤 한다. 유한한 인생에서 남으로부터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며 또 못 할 건 뭔가. 나만 좋다면 말이다. <인간 이슬아 수필집>를 읽다 보면 건전하지만 무언가 꽉 막힌 듯한 답답함보다는 세상의 편견이나 이목에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후련함이 느껴진다. 나와 같은 샌님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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