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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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누군가의 삶이 지금도 지구 상의 어느 한 귀퉁이를 차지한 채 옹색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걸 생각할 때마다 이따금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괜스레,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다. 내가 그래서 소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대체적으로 소설은 주인공과 그 주변의 사람들이 더 나을 것도 없는 고만고만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그렇게 엇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때로는 질시하고, 다투고, 화해하고, 때로는 위로하면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잊지 않고 있다는 걸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p.70)

 

황정은의 소설 『연년세세年年歲歲』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인물의, 특별할 것 없는 삶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작가는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흔한 이름, '순자'에 대해 생각했고, 너무 많아서 오히려 저마다의 이름이 갖는 고유성을 잃고 정작 무명 씨에 가까운 '순자'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기에 이른다. 소설은 '1946년생 순자 씨' 이순일과 그의 두 딸 한영진 한세진의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며 이어지는데, 각각의 인물이 살아낸 삶의 궤적을 통해 격동의 시기를 겪어 온 한국 사회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한다.

 

"매일 지는 것 같아, 하고 하미영은 말했다. 나쁜 걸 나쁘다고 말하고 싶을 뿐인데 애를 써야 하고, 애쓸수록 형편없이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p.168)

 

일흔이 넘은 나이의 이순일은 자신을 키워준 외조부의 묘를 없애기로 결정하고 둘째 딸인 한세진과 함께 강원도 철원군으로 떠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녀의 생각과 일화를 그린 「파묘破墓」,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장녀 한영진의 삶을 되짚어 보는 「하고 싶은 말」,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김포에서 만났던 이웃이자 동명(어렸을 적 이순일도 '순자';라고 불렸다)의 친구 '순자'를 회고하는 「무명無名」, 북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닷새간 뉴욕에 머무는 동안 어렵게 만난 친척 제이미를 통해 불행했던 과거사를 생각하는 「다가오는 것들」의 네 편의 연작 소설이 실린 이 책은 소설가로서 황정은이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킨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가족, 사회, 친구, 국가 등 여러 관계 안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각각의 소설을 쓸 때마다 소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삶을 살다 나왔고 나는 그게 경이로우면서도 두려웠다." (p.185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을 읽는다는 건 우리가 겪는 삶이라는 게 얼마나 구차하고 비루한 것인지 끝없이 되새김질하도록 강제하는 일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다시 들춰내 곰곰 생각한다는 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을 터, 비록 우리들 삶이 구차하고 비루할지라도 적절한 시기에 삶을 마감하리라 결심하기보다는 그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의미 있게 변화시키려 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참된 삶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성스러운 가치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굴하지 않는 개인의 의지가 아닐까. 바싹 마른 낙엽이 가벼운 바람에도 우수수 흩날리는 오후, 사람들은 많이 웃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많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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