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몇몇 제한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속 터지는 경험인 아주 없는 건 아니어서 때로는 '이 사람들이 지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인물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 때가 더러 있다. 그것은 대개 정치인에 대한 개인적 혹은 일부 지지층의 평가를 대신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와 무수히 많은 반헌법적 행위에 대해 비난할라치면 그들의 주장인 즉,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공과가 있게 마련이고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의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인 듯 보이지만 이 말보다 더 허무맹랑한 말도 다시없을 것이다. 예컨대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를 지적했을 뿐이고, 그가 정권에 있을 때 독재정치를 펼침으로써 자신은 처벌조차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민들도 그의 죄를 따져 물을 수 없었던 역사적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공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이런 논리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모든 것을 잘못한 이도, 무결점의 삶을 산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인생은 우리의 생각보다 길기 때문이다. 공과를 함께 논한다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히틀러나 일본의 A급 전범들, 심지어 곧 출소하는 조두순에게서도 과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공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그 공에 의해서 영웅 취급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죄는 죄대로, 공은 공대로 그때그때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라는 이유로,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이유로 죄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았다면 후손들은 그에 합당한 욕을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니가. 당대에 그는 자신의 공에 대한 대가를 누릴 만큼 누렸으니까 말이다.

 

‘하나의 악으로 그 선을 잊지 말고, 작은 흠으로 그 공을 덮지 마라(不以一惡忘其善. 勿以小瑕掩其功)’고 했던 당 태종 이세민의 조언은 일반인에 대한 평가나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자에 대한 평가에는 유효할지 모르나 권력자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적절치 않다. 이미 그는 살아생전에 공에 대한 대가를 누릴 만큼 충분히 누렸기 때문이다. 사후에는 이제 그에 대한 과가 들추어질 뿐이다. 그것이 공정한 역사가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전두환 씨나 이명박 씨에 대한 공과 과는 당사자가 살아 있을 때 진행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지금 현재 진행 중에 있지만 그들 모두가 죽고 난 뒤에는 후세인들이 그들의 공과를 함께 평하게 될 것이다. 처벌받지 않은 자의 과를 사후에 논할 때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의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이, 그것도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그런 무식한 말을 입에 담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인생은 길고, 살다 보면 누구나 선과 악을 오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말자. 날씨가 차다. 오늘은 대입 수능일이자 세계 장애인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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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12-0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꼼쥐님은 좋아요를 안 누를 수가 없네요

꼼쥐 2020-12-09 18:28   좋아요 0 | URL
테레사 님이 저의 글을 너무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기분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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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 전 국내 최고령 여의사의 타계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양주의 한 병원에서 국내 최고령 현역 의사로 활동하던 고인은 94세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회진도 돌며 환자를 하루 20여 명씩 진료하였다고 한다. 노환이 악화되어 다른 병원에 입원했던 고인은 결국 자신이 헌신한 병원으로 돌아와 생의 마지막 일주일을 지내다가 영면에 들었다고 하는데 그가 남긴 인사말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았던 듯하다. 고인이 남긴 세 마디의 짧은 인사말은 "힘 내. 가을이다. 사랑해."였다. 이 세 마디에 담긴 함의는 사람들마다 그 해석이 제각각이겠지만, 내 생각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힘을 내서 살아갈 일이며, 그러다 보면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것처럼 선물처럼 기쁜 날들이 주어지는 법이니, 힘들더라도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삶을 살길 바란다'는 뜻이 아닐까 싶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저마다의 다른 생각을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각자의 해석은 서로 다를지라도 고인의 뜻을 이어받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면면히 이어지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삶은 그 시를 이루는 하나의 시어(詩語), 또는 시구(詩句)쯤 될 테고 말이다.  책꽂이에서 몇 달째 먼지만 쌓이던 <역사의 쓸모>가 내 눈에 띄었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역사 강사 최태성의 역작이기도 한 이 책을 나는 왜 진작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해답에 목말라 있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조언을 듣고 때로는 직접 부딪쳐가면서 답을 구합니다. 저는 김육이 '한 번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일생으로 답했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분이죠." (p.190~p.191)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역사 강사 중 1인인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배우는 우리의 목적에 대해 설파합니다. 역사는 그저 대학입시나 취업에 필요한 하나의 관문으로서 무작정 암기하고 시험이 끝나면 열심히 암기했던 사실들을 까맣게 잊고 마는 불용의 학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순간의 선택을 돕고 의미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실용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는 우리와 상관없는 연도나 인물의 나열이 아니라 과거 인물의 삶을 통해 불안한 자신의 삶을 계획하도록 하는 참고서라는 설명이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기에 그때마다 막막하고 불안하지요.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역사 속 인물들은 이미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의 선택을 들여다보면 어떤 길이 나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p.11 '들어가는 글' 중에서)

 

1장 '쓸데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 2장 '역사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3장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4장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의 300페이지에 가까운 결코 얇지 않은 책이었지만 저자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는 듯했다. 자신의 삶이 그러했듯 이 책을 읽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독자들 역시 역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미래를 향해 꿋꿋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역사는 그렇게 수많은 이의 삶을 강물처럼 이끌면서 도도히 흘러게 마련이라는 걸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공감하고, 우리들 각자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중요한 인물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책임감 있게 가꾸어 나아갈 수 있다고 저자는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제 인생은 과거 역사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 현재 그러나 곧 역사가 될 시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말했는데 제 인생 역시 사람을 만나는 과정인가 봅니다. 저를 여기까지 성장시켜주신 모든 '사람'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새롭게 관계를 맺을 여러분과 함께 또 한 번 건강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p.294~p.295 '나오는 글' 중에서)

 

역사에는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이나 편견이 있을 수 없다. 추하고 더럽다고 하여  누군가의 삶을 제쳐 두거나 축소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라 하여 덧붙이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역사는 세상을 살다 간 모든 이의 삶을 아우르면서 면면히 이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고령 여의사의 아름다웠던 삶과 죽음에서 비롯된 나의 독서는 '그래, 가을도 지났으니 힘을 내야지.' 하는 다짐으로 끝을 맺는다. 과거의 기록으로만 남은 어느 여의사의 죽음을 추모하며 '역사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임을 마음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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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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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족을 설명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마뜩잖은 일일지도 모른다. 가족이란 마치 신기루 같아서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리 달아나 버리는, 실체는 있지만 끝내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붙잡을 수 없다기보다 너무 크고 방대하여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가족을 설명한다는 건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향해 '너 자신을 개관적으로 설명해 봐.'라고 했을 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연한 것처럼.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p.93)

 

대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도 자신의 아버지를 설명하는 일은 무척이나 껄끄럽고 부담되는 일이었던 듯하다. 최근에 출간된 그의 책 <고양이를 버리다>는 순전히 자신의 아버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쓰인 일종의 일기나 메모에 가까운 책이지만 문장 한 구절 한 구절을 찬찬히 되짚어보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작가의 애틋한 심정과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에 대한 그리움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오래전부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언젠가는 문장으로 정리해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좀처럼 시작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가족에 대해 쓴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고, 어디서부터 어떤 식으로 쓰면 좋을지 그 포인트가 잘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 짐이 내 마음에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었다." (p.96 '작가 후기' 중에서)

 

누군가에 대해 소개하려 들 때 겉으로 드러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그와 얽힌 몇몇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그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진실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 역시 아버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주로 다루지 않고, 어느 여름날 작가와 그의 아버지가 집에서 키우던 암고양이를 버리러 해변에 갔었던 기억을 책의 첫머리에 먼저 쓰고 있다. 물론 객관적 사실을 무시한 채 에피소드 위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1917년 교토 어느 절집의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세이잔 전문학교를 다니던 중 징집되어 중국 대륙의 전선에 치중병으로 보내졌던 사실, 포로로 잡힌 중국 병사를 군도로 척살했던 그 당시의 기억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것 등을 건조한 문체로 쓰고 있다. 작가의 아버지 교토 국제대학을 졸업한 후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 생활을 하다 2008년 고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다르게 공부에 별 의욕이 없었던 작가는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그 이후 절연에 가까운 부자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쓰인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아주 미소한 일부지만 그래도 한 조각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p.97~p.98 '작가 후기' 중에서)

 

누군가를 부자 관계로 만난다는 건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강제적인 할당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와의 관계를 통해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형성하고, 나아가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하나의 역사를 일궈나가는 과정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역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역사적 소명 의식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글로 쓰는 일이 끝내 미루고 싶은 부담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결국 참고 해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마음 한 구석의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글로 써서 남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으랴. 하루키답지 않은 지극히 건조한 문체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던, 그래서 더욱 쓸쓸했던 11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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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섭함'이란 감정은 타인에 대해 다분히 폭력적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내가 원하는 순간에 상대방이 나의 '감정회로'에 접속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타인의 '감정회로'를 나와 대등한 어떤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의 '종속회로'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상대방은 나의 '감정회로'에 종속된 하위 회로인 까닭에 나의 감정은 있는 그대로 언제든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고 나는 무시로 변하는 내 기분을 상대방이 알아챘는지 그렇지 않은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내 기분을 몰라주는 상대방으로 인해 섭섭함을 느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섭섭함'이란 상대방의 '감정회로'를 내 '감정회로'에 종속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대에 어그러져 불만스럽거나 못마땅하다'는 뜻의 '섭섭하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분히 폭력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나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이기적인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이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상대방에 대해 우리는 그가 자신의 '감정회로'에 24시간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성적으로는 그들 역시 독립된 개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그렇게 믿으려 들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게 대부분 이성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을 때가 많은 까닭에 자신의 감정을 그들 중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설명한 적 없지만 자신의 기분을 몰라주는 상대방을 향해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하고 되묻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날씨가 끄물끄물하고 눈이라도 한바탕 휘몰아칠 듯한 이런 날, 나는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 <명랑한 은둔자>를 읽고 있다. 쭈욱 계속하여 읽는 건 아니고, 읽다 말다 그렇게 소일하고 있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 창문으로 햇빛이 새어들고, 새가 노래하고, 계획도 할 일도 없는 하루가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주중 일하는 날들의 터널 끝에서 맞는 여유의 빛이자 기쁨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날이 두렵다. 이런 날 나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깬다. 막연한 갈망, 내 마음의 문을 긁어대는 이름 모를 불안, 아릿한 아픔이 느껴진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응시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외로워." ('외로움에 관하여' 중에서)

 

'섭섭함'에 대해 말하다가 왜 갑자기 뜬금없이 '외로움에 관하여'를 인용하느냐고? 글쎄, 이렇다 할 맥락은 없다. 사람들은 나처럼 이따금 변덕스럽고,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하고 되물으면서 따지듯 싸움을 걸 때도 있고, 나의 '감정회로'에 접속한 그대의 노고에 감동할 때도 있는 것이다. 일요일은 몸보다 감정이 부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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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이렇게 쓴다
나카무라 구니오 지음, 이현욱 옮김 / 밀리언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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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단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는 않는다. 꾸준히 읽다 보면 읽는 즐거움을 넘어 쓰는 즐거움에 이르게 되고, 꾸준히 쓰다 보면 쓰는 것이 곧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스스로 자각하게도 된다. 이와 같은 연쇄는 다른 누군가의 지침이나 권유에 의해 일어나지는 않는 듯하다.  스스로에 의한 내면적 자각이나 외부로부터의 어떤 자극이나 그로 인한 결심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좋은 습관이라는 게 대개 자신의 굳은 결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카무라 구니오의 <하루키는 이렇게 쓴다>를 읽은 독자라면 혹 책상 위에 놓인 빈 종이나 컴퓨터의 여백에 뭔가 끄적이고픈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설사 별 내용도 없는 낙서 수준의 글일지라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에 어쩌면 그것을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쓰고 싶다는 느낌이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체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

 

"나는 문장 쓰는 법의 많은 부분을 하루키에게 배웠다. 심플하고 음악처럼 리드미컬하다. 번역체 같기도 한 특이한 문체로 장황하게 묘사하는 소설이나 에세이도 '문장의 교과서'라고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p.4 '프롤로그' 중에서)

 

나카무라 구니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분석하고, 작품에서 보이는 하루키만의 문체의 특징이나 규칙을 자신의 문장에 적용해서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발견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법은 무려 33가지에 이른다. 수수께끼 같은 긴 제목을 붙이는 것부터 구체적인 '연도'를 쓰는 것이라거나 갑자기 소중한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거나 술의 종류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기 등 작품의 일부만 읽어도 '아, 이것은 하루키의 작품이구나' 하고 단박에 눈치챌 수 있는 여러 특징들을 저자는 적절한 인용과 설득력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는 항상 갑자기 무언가가 사라진다. 고양이가 사라지고, 아내가 사라지고, 색이 사라진다. 그렇게 마법처럼 여러 가지가 차례차례 사라지는 것이 하루키식 '양식'의 아름다움이다." (p.80)

 

사실 하루키 문장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일상의 디테일에 있다. 세탁, 다림질, 요리, 청소 등 단조롭기 짝이 없는 집안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다채롭고 특별한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이와 같은 디테일은 '장소'의 묘사에 있어서도, 음식이나 와인, 재즈와 같은 고전 음악의 묘사에 있어서도 하루키 특유의 꼼꼼함이 빛난다. 그밖에 수수께끼처럼 긴 제목을 통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암시를 주는 방법, 구체적인 연도를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의 기억력을 상기시키는 방법, 'BMW' '창유리' 등 강력한 키워드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소환하는 방법, 명작을 인용해 격조를 높이는 방법 등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는 독자의 의식을 사로잡고 자신의 작품을 끝까지 완독할 수 있는 장치를 작품 곳곳에 숨겨두고 있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누군가에게 '누구누구의 키드'라는 말을 쓸 때는 그가 어떤 인물로부터 정신적 기술적으로 큰 영향을 받아 그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했다고 판단될 때 쓰곤 한다. 말하자면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었던 누군가를 추종하여 그와 닮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어떤 성취를 이룬 자에게 우리는 '누구누구의 키드'라는 말을 사용하는 셈이다. 박세리 키즈, 박찬호 키즈들은 그들의 우상으로부터 단지 어떤 수혜를 입은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인 부분까지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인 나카무라 구니오는 진정한 의미의 '하루키 키드'인 셈이다.

 

작가들의 글쓰기 특강에서 종종 듣게 되는 말은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필사(베껴쓰기)하는 일은 글쓰기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필사는 '매우 느리고 정확한 독서'로 어휘의 양 자체를 늘려줄 뿐만 아니라 문장 안에서 어휘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사고력 확장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독서도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에게 필사를 권한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른다. 기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걷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독자가 '누구누구의 키즈'가 될 필요는 없을 터, 바깥 기온이 낮아지고 코로나19의 확진자가 늘어날수록 책과 가까워질 시간은 조금이나마 늘어나지 않을까? 날씨가 춥다. 이 겨울 모두 무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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