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종하는 정치인의 무리를 비하하는 말로 '무슨 빠'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컨대 박정희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일컬어 '박빠'라고 한다거나, 나경원을 지지하는 무리들을 '나빠'(이건 좀 이상한데?)라고 하거나, 오세훈을 지지하는 세력은 '오빠'(이것도 좀 이상하네), 안철수를 지지하는 세력은 '안빠'라고 하는 식이다.

 

이렇게 어원이나 출처도 불분명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그들을 싸잡아 비하하는 데서 오는 단순한 기분풀이, 혹은 그들의 수준을 정상 이하로 깔아뭉개는 데서 오는 한풀이라고 보인다. 말하자면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화가 동할 때 자신의 생각이나 이념과는 정반대의 진영에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비하함으로써 약간의 속 시원함(일종의 감정적 배설 효과)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 화를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얻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게 어느 정도 중독성이 있어서 자신의 자녀가 취직을 못했을 때도, 은퇴 후 아내로부터 삼식이라며 놀림을 당했을 때도, 잘 나가는 친구들로부터 괜한 천대를 받았을 때도 자신도 모르게 '무슨무슨 빠'를 연거푸 외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의 분노조절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내 주변에도 분노조절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그런 천박한 용어를 쓰면서 자신의 화를 조절하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되는데 때로는 그들이 안쓰러워 한마디 할 때가 있다. "이보게, 소위 배웠다는 사람이 교양도 없이 그런 천한 말을 쓰면 되겠는가. 위신을 생각해야지." 할라치면, "남들은 그보다 더한 말도 잘도 쓰더구먼. 왜 나만 갖고 그러나." 하면서 바락바락 대드는 통에 이제는 그들의 병이 중증에 이르렀음을 인지하고 숫제 외면하고 마는 것이다. 딱하기는 하지만 정신과 전문의도 아닌 나로서는 능력 밖의 일인 것이다.

 

기생충을 연구한다는 모 씨도 과거에는 꽤나 고상한 말을 사용하더니 최근에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을 사용하는 걸 보면 그 역시 중증의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듯하다. 사람은 그가 사용하는 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품이 드러나고 인격이 다듬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말은 신중하게 가려서 해야 한다. 2021년에는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분노조절장애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그러자면 아름다운 말의 사용이 먼저라는 걸 그들에게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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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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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남과 구별되려 애쓰거나 그렇게 대우받기를 원한다. 그러한 노력은 평생 동안 이어진다. 조금 더 부풀리자면 인간은 남과 구별되기 위한 목적으로 전 인생을 소모하는지도 모른다. 타인과 구별되기 위한 그와 같은 끊임없는 노력 중 가장 호사스럽거나 가장 사치스러운 것은 아마도 '집'이 아닐까 싶다. 어디에 살며, 주거 면적이 몇 평이냐에서부터 자가인지 전세인지, 혹은 월세인지를 따지는 문제의 이면에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뿌리 깊은 차별성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서 번듯한 자기 집 한 채를 갖는다는 건 목숨과 견주어도 하나 아깝지 않은 가치를 지니는 듯 여겨진다. 말하자면 집은 자신의 정채성이 담긴 또 다른 물성을 지녔음이다.

 

"내가 자기만의 방을 소망할 때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나의 고유함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p.135)

 

 

하재영 작가가 쓴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여러 집들에 대한 회상인 동시에 그 집에 담긴 삶의 이력이다. 하재영 작가에 대해 딱히 아는 게 없었던 내가 고민하지 않고 책을 구매하여 읽게 된 배경에는 입소문이 한몫했다는 말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만큼 나는 책의 내용에 대해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 기대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운이 좋게도 말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시절의 집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덧입힌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대구의 적산가옥촌, '대구의 강남'으로 불렸던 수성구의 고급 빌라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던 기억들. 20대 서울 상경 후 살았던 강북의 아홉 개 방과 신림동의 원룸, 재개발에 비껴간 금호다가구주택, 30대 진정한 독립을 이룬 행신동 투룸, 정발산의 신혼집, 북한산 자락 아래 구기에서 오래된 빌라를 수리하고 안착하는 내용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작가와 함께 했던 반려견 피피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눈을 뜰 때마다 상실을 깨닫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창밖을 보다가, 밥을 먹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심지어 잠에서 깨자마자 난데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떠나보낸 것은 개 한 마리가 아니라 다정한 존재와 함께한 내 삶의 한 시절이었다. 가끔 피피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돌아오지 않을 한 시절을 부르는 일이었다."  (p.175)

 

 

그럴지도 모른다.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어떤 집을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지나간 한 시절을 간절히 불러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사를 반복하는 동안 나이가 들었고, 그렇게 나이가 드는 과정에서 작가는 아빠와 벌어졌던 틈도, 엄마에 대한 연민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세월이라는 둥근 집에 기거하는 모든 인류의 깨달음이자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발걸음.

 

 

"이 책은 집이 한 여성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 또는 집을 통해 본 한 여성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자전적이지만, 집이라는 '물리적 장소' 안에서 여성의 '상징적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어설픈 시도이기도 했다. 이 시도를 통해 나의 이야기가 타자의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연결성을 소망했다. 사적 경험만이 아닌, 한 시대를 공유하며 성장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반성과 보편성을 담고 싶었다."  (p.218 '작가의 말' 중에서)

 

 

1월의 날씨라고는 믿기 힘든, 봄날처럼 따뜻한 하루였다. 사람들은 옷에 묻은 코로나 시대의 낡은 집 냄새를 털어내려는 듯 가족들의 손을 잡고 가까운 공원으로 쏟아져 나왔다. 햇살은 부드러웠고, 가벼운 햇살 속으로 아이들의 부푼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집. 이벤트와 같았던 산책을 마치면 그래, 집으로 가야지. 언제나 그랬듯 거실에는 텔레비전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일 테고 저녁 밥상엔 하루의 일과가 푸짐한 반찬처럼 올려지겠지. 누구에게나 집은 그들만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이는 공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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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서 윤 모라는 만화가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메시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기사에 따르면 그는 두 장의 사진(하나는 차고가 딸린 저택, 다른 하나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낡은 집을 찍은 사진)을 대비시켜 놓고 "한쪽은 친일파 후손의 집, 다른 한쪽은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인데 이것에 대해서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사는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한 걸까. 사실 알고 보면 100년 전에도 소위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 아니었을까."라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나는 사실 그가 그린 만화를 본 적도 없고 직업이 만화가라는 사실도 아는 바 없었지만 이 사람이 꽤나 철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은 떨쳐낼 수 없었다. 예컨대 독일에서 자신의 선조가 나치에 부역한 사람인데 나치에 저항했던 사람과 그의 후손들을 비하하는 글을 썼더라면 법에 의해 독일 구치소에 수감되는 것은 물론 그렇게 되기 이전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암살 타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친제국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파라다이스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전과가 노출될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 마음 놓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친제국주의 대가로 받은 재산을 대대손손 물려가며 떵떵거릴 수 있으니 좀 좋은가 말이다.

 

몇 년 전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그이지만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후 그는 무국적자로 남았었다. 그가 대한민국의 국적을 회복한 것은 2009년의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전체가 독립운동가의 희생으로 지금과 같은 위치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들의 희생을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친제국주의자들의 후손은 철저하게 독립운동가를 매도해왔다. 그런 반지성적, 반역사적 행위조차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방치한다는 건 대한민국의 법이 너무 관대하거나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반증이다. 글을 쓰면 쓸수록 열불이 나는 까닭에 이쯤에서 그쳐야겠다. 건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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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라
김지윤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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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월의 변화를 부지런히 따라잡는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한참이나 뒤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한 번 벌어진 간격은 갈수록 그 격차를 넓혀갈 뿐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유행이나 기술의 변화를 쉽게 좁혀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단지 머릿속 생각으로만 그칠 뿐이다. 실생활에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를 따라잡는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부적인 변화에서 뿐만 아니라 사상이나 이념 같은 내부적인 것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외부적인 것은 그럭저럭 따라가는 시늉이라도 낼 수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킨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계속해서 '꼰대' 소리를 들으면서도 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생각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화 이후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지만 가장 두드러지게 변한 건 '연애의 풍경'이 아닐까 싶다. 그런 변화의 이면에는 여성 인권의 성장과 맞물려 연애에 있어 항상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던 여성들의 생각을 180도 뒤바꿔 놓은 측면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변화의 주체인 여성에게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주도권을 잃게 된 남성의 입장에서는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서로를 알게 된다. 설렌다. 만난다. 밥을 먹는다. 얘기를 조금 한다. 차를 마신다. 모텔에 간다. 엉킨다. 영화를 본다. 집에 간다. 열라 톡을 한다. 보고 싶다. 꿈에서도 보고 싶다. 만난다. 술을 마신다. 싸운다. 화해한다. 사랑한다. 영화를 본다. 집에 간다. 만난다. 조금 걷는다. 밥을 먹는다. 드라이브를 한다. 모텔에 간다. 집에 간다. 만난다. 시간이 흐른다. 왜 하는지 모르는 섹스를 한다. 할 일이 없다. 할 말이 없다. 지루하다. 다 그런 거지 생각한다. 이별한다. 왜 헤어진 줄 모른다. 사랑의 상처는 다른 사랑으로 치유하는 것이라며 친구가 소개팅을 물어온다."  (p.43)

 

좋은연애연구소 소장이자 방송인이기도 한 김지윤의 저서 <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라>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확 달라진 요즘 연애의 풍경에 새삼 놀랄지도 모르겠다. '이거 레알? 에이, 설마...' 하면서 반신반의하거나 '세상 말세로구나!' 낙담하면서 오호통재를 외치신 분이라면 '꼰대 중증 증후군'으로 정신과 진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야말로 상전벽해, 괄목상대를 넘어 천지개벽의 수준에 와 있는 것이다. 변하지 않은 건 이와 같은 변화를 모른 척 지나쳤던 자신의 꿋꿋한 꼰대 기질뿐이었다. 무관심일 수도 있고, 자신의 잣대만 바라보며 못마땅한 변화를 애써 외면하려 '에헴!' 하던 헛기침 탓일 수도 있다.

 

"결혼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요트 위에서 샴페인을 마시는 장면이 아니라 개펄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장면이 더 잘 어울리는 '체험 삶의 현장'이 바로 결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식과 웨딩드레스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산에 오를 때는 등산복을 입고, 노동을 할 때는 작업복을 입고, 파티에 갈 때는 꽃단장을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결혼식에는 웨딩드레스보다 작업복이 어울리고, 시중 없이는 혼자 움직이기도 힘들게 거추장스럽고 아름답기만 한 웨딩드레스는 문제가 많다."  (p.206)

 

저자는 간결하고 톡톡 튀는 문체로 세상이 달라졌음을 설파한다. 그리고 다양한 사례를 들어 이를 보충한다. 그리고 요즘 연애의 부족한 점 혹은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싫으면 싫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화가 나면 화난다고 적극적으로 말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쾌락만 추구하는 감각적인 연애에서 벗어나 서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고받고,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관계를 다질 것을 주문한다. 뿐만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나답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혹시 나는 왜 좀 더 독립적이지 못하고, 좀 더 강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눈물 많고 탈도 많을까 자책하며 살아오셨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당신이 맞을 수도 있다. 감정적이고 눈물 많고 오지랖 넓은 당신이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더욱 필요한 존재다. 누가 뭐래도 당신은 소중하다."  (p.309)

 

어쩌다 보니 기성세대가 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연애에도 무슨 상담이 필요하냐?'며 콧방귀를 뀔지도 모른다. 연애에는 좋은 연애도 있고 나쁜 연애도 있다는 생각에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 연애는 그저 경험하는 것일 뿐 거기에 무슨 좋고 나쁨의 가치 평가가 존재할 수 있으며, 남녀가 만나 좋으면 결혼하고 그렇게 살다 보면 한평생 가는 것이지 돌다리를 두들기듯 이것저것 따져서 좋아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다분히 운명론적인 연애관에 철저히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애에 대한 경험은 늘었지만 그에 대한 사색이 부족한 시대에 사는 요즘의 젊은이들. 저자의 연애 상담은 다분히 과거지향적으로 읽힌다. 연애마저 유선생(유튜브)에게 의지할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고민하는 게 옳지 않을까? (책을 읽으라고 덧붙이기에는 너무 꼰대스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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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는 스티브 잡스의 명언은 꽤나 많지만 그중 나는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했던 그의 연설문 중 일부분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어쩌면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에게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를 말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연설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 하지는 않죠.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음'이니까요.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않은 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 할 것입니다.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살면서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인용문에서 그는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없다면 '희망'도 존재할 수 없으며, 하루하루의 삶은 그야말로 '벗어날 수 없는 지루함의 고통'이 되겠지요. 잠깐의 휴식은 새로운 삶을 위한 에너지원인 동시에 더할 수 없는 기쁨이 되겠지만 무한 회귀의 휴식은 인간에게 고통 그 이상의 의미일 테니까 말입니다. 무한반복의 시지프스 형벌이 그랬던 것처럼 영원회귀의 휴식 역시 고통일 듯합니다. 코로나 정국이 길게 이어지면서 본의 아니게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들 역시 한 집안의 가장이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당사자일 테지요. 할 일이 없어서 마냥 손을 놓고 놀아야 되는 현실이 어찌 편하기만 하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나날이겠지요.

 

엊그제 시작된 듯한 새해가 벌써 20여 일이 지났습니다. 새해가 되면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에게 덕담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올해는 취직해야지." 하는 말. 물론 이마저도 요즘엔 꼰대 소리 듣기 딱 좋은 말인지라 입안으로 삼키기 일쑤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직장을 잃었거나 잠시 쉬고 계신 분이 있다면 2021년에는 다들 바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수백 번 '꼰대'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Stay Hungry. Stay Foolish."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배고픈 채로 머무르지는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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