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홍승은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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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에 자주 했던 경험 중 하나는 '나 자신과 마주하기'였다. 전에는 이따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책에서나 겨우 읽었을 뿐 그 필요성을 실감한 적도, 그렇다고 구체적인 시도를 해본 적도 없었다. 어떤 특별한 용무가 없어도 이런저런 만남이 끝없이 이어졌고 하루 24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런 만남은 주로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따금 약속이 없는 한가로운 시간이 도래할라치면 불안한 마음에 내쪽에서 서둘러 약속을 잡는 경우도 허다했다. 결국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한가로운 시간이 내 앞에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어떤 핑계를 들어서라도 애시당초 싹둑 싹을 잘라버린 셈이었다.

 

적어도 한두 달, 아무리 길게 잡아야 반년을 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코로나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 바람에 사람들은 다들 생전 해보지도 않던 '나 자신과 마주하기'의 경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었던 대상, 자신보다는 타인의 판단에 늘 익숙했던 대상, 거울을 통하지 않고는 겉모습조차 볼 수 없었던 대상인 나를 구석구석 관찰해보려 한다는 이 생경한 경험을 템플 스테이나 명상 혹은 요가와 같은 특별한 이벤트도 없이 실행한다는 게 영 마뜩지 않은 일이었지만 시간이 남아도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던 것이다.

 

"20여 년을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살아온 나에게 오랜 편견을 벗겨내는 일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때를 벗기는 일과 같았다. 글을 쓰고, 읽고, 다시 쓰며 내게 입혀진 말들을 벗었다."  (p.6)

 

홍승은의 책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를 읽게 된 건 정말 우연한 기회였다.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는 책 한 권이 사무실 라디에이터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길래 생각도 없이 집어 들었던 책. 내용이 궁금해서 한 장 두 장 책장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훌쩍 책의 맨 뒷장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던 책. 책을 읽는 내내 언젠가 내가 읽었던 김수정의 에세이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를 문득문득 떠올리게 되었던 그런 책이었다. 그리고 저자의 다른 저서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더니 한때 이슈가 되었던 책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를 썼던 바로 그였다는...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는 내 위치의 한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고통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p.141)

 

1부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글쓰기', 2부 '타인과 연결될 때 문장은 단단해진다', 3부 '매혹적인 글쓰기를 위한 안내'의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삶을 글을 통해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소심했던 자신이 어느 정도 용기를 갖게 되었고,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게도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섣부르게 누군가에게 내 서사의 편집권을 위탁해선 안 된다. 내 삶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이므로'(p.46)라고 말한다.

 

우리는 문득 내 인생이라는 소설의 관찰자가 되어, 원하지도 않던 자신의 서사를 다시 읽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라는 강제 요인으로 인해서 말이다.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내 인생의 구독자가 되었던 사람들이 그들만의 목소리로 조곤조곤 그 소설의 줄거리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가 들려주는 '사람 책'을 읽고, 때로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글로 쓰고, 차마 하지 못할 이야길랑 울음으로 토해내면서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누군가의 삶과 글을 사랑하게 되겠지. 그만큼 레시피 목록도 늘어나겠지. 누군가의 글에 빚지면서 글을 쓰겠지. 살아가는 일이 그렇듯 서로에게 기대어."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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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방학에도 여러 학원을 전전하며 학기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곤 하지만 예전에는 또래 친구들과 놀 생각으로 방학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에 비해 겨울옷도 허술하고 바깥 기온도 낮았던 까닭에 오롯이 바깥 추위를 온몸으로 견딘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 시절에는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 신기한 일이다. 그 시절에 주로 하던 놀이는 구슬치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술래잡기, 자치기 등 4계절 흔히 하던 놀이와 비료 포대를 이용한 눈썰매 타기, 직접 만든 얼음썰매 타기, 연날리기, 쥐불놀이, 얼음배 타기 등 다양한 놀이를 즐겼었다. 망가진 비닐우산의 대나무살을 쪼개 방패연이나 가오리연을 만들어 날리기도 했고, 분유나 통조림통을 구해 못으로 구멍을 뚫고 철사를 꿰어 밤늦도록 쥐불놀이를 하기도 했다. 나일론 코트에 불똥이 튀어 마마자국과 같은 흔적을 훈장처럼 겨우내 달고 다니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 시절의 추억을 언뜻언뜻 떠올릴 때마다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푸른 하늘 아득히 날던 가오리연의 비상이 한 폭의 유화처럼 그려진다. '그리움'과 '연날리기'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날리는 연이 실에 매달려 사뿐사뿐 하늘을 날 때만 하더라도 연은 자신의 무게를 잊고 하늘 높이 비상하지만 실이 끊어지는 순간 기우뚱기우뚱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한순간에 털썩 땅에 곤두박질침으로써 자신의 무게를 실감하는 것처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그 관계가 지속되는 한 그리움은 무게를 잊고 하늘거리지만 관계가 끊어지는 순간 가슴에 철렁 무너져 내림으로써 비로소 제 무게를 실감하기 때문이다. 상실 이후의 그리움은 실이 끊긴 연과 무척이나 닮아 있는 것이다.

 

손에 팽팽하게 전해지는 연실의 느낌이 있을 때는 연은 자신의 무게를 체감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당신과 나의 관계가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는 그리움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에 철렁 내려앉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움에도 무게가 있음을 실감한다. 관계의 끈이 팽팽하면 할수록 그 끈이 끊어졌을 때의 그리움은 감당할 수 없는 중량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가슴이 무너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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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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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떤 유명인의 서평집을 읽는다는 건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저자가 즐겁게 읽은 책을 나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면 그 기쁨은 배가 된다. 멀게만 느껴지던 저자가 부쩍 친밀해진 느낌이 드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뭔가 비밀을 공유한 느낌이랄까, 아니면 세상의 수많은 책 중에 유독 그 책을 가슴에 품었던 것에 대한 깊은 공감대랄까 아무튼 저자와 나는 취향이 비슷하거나 서로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비슷한, 그런 까닭에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친밀감은 현실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오랫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보자. 모로 씨가 늙어간다는 것, 달이 가고 해가 가고, 또 해가 간다는 것이 사건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헤아리기 어렵고 감동적이고 압도적인 점이 바로 여기 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이 천천히, 알아채지도 못하는 가운데 하지만 끊임없이, 돌이킬 길 없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이 사람이 불확실한 충동에 이끌려 어떤 운명을 기다리는 것을, 수수께끼가 풀리기를, 진짜 마음을 사로잡는 뜨거운 사랑을, 구원을, 만족을, 자기 존재의 정당화를, 운명을 기다리는 것을 바라본다. 그는 절반만 의식한 채 막연히 찾아 헤매면서도 자기 운명이 바로 자기 위에 있음을, 이미 자기를 둘러싸고 있음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기다리고 예감하고 찾아 헤매면서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p.49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중에서)

 

20세기 가장 사랑받는 작가이자 독서광으로 잘 알려진 헤르만 헤세의 서평집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은 그가 쓴 3천여 편의 서평과 에세이 가운데 가장 빼어난 글 73편을 가려 뽑은 것으로, J.D 샐린저, 카프카, 토마스 만, 크누트 함순, 도스토옙스키, 조너선 스위프트, 등 세계문학의 고전들로부터 공자, 노자, 붓다,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 등 동양의 걸작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헤세는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을 길지 않은 글로 압축하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독특한 문장을 곳곳에 드러냄으로써 왜 그가 따뜻한 지성과 깨어 있는 영혼의 작가로 추앙받는지 깨닫게 한다.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낯선 공기를 숨 쉬는 듯한, 우리가 삶에서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과 다른 맥락의 공기를 숨 쉬는 듯한 느낌을 거듭 받게 된다. 그런데도 나는 이 대화록을 읽으며 보낸 나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중국 정신이 낯선 천체의 산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를 건드린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좋은 일이고, 단순히 피상적인 방식 이상으로 그 정신을 들여다볼 좋은 연습도 된다. 그러면 우리의 개인주의 문화를 자명하다 여기지 않고, 대립되는 것과 비교해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P.306 '공자의 <대화> 중에서)

 

물론 책에 대한 헤세의 관심은 비단 문학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고 철학, 종교,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지만 이 책에는 그가 읽었던 문학작품을 위주로 선별하여 엮은 까닭에 일반 독자들도 특별한 어려움 없이 읽어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술술 읽힌다는 얘기는 아니다. 미처 읽지 않았던 작품이나 잘 알지 못하는 작가가 등장할 때마다 헤세의 평이 어떠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는지 감을 잡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도 그러하듯 고난이 있으면 기쁨의 순간도 있게 마련, 잘 알려진 작품을 접하면서 또 한숨 돌리게 되는 것이다.

 

"예리하고 감성적이며 천재적인, 그러면서 삶에는 허약한 한 남자, 한 사상가의 고백이 바로 <걸리버 여행기>이다. 이는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순수한 작품이다. 인류는 이 <걸리버 여행기>를 아주 손쉽게 취급했다. 처음에는 팽팽한 긴장감을 담은 모험 이야기로 여겨 이 작품을 환영했지만, 실제로는 몇 가지 치명적인 신랄함과 냉혹함 때문에 소화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다시 가라앉힐 수 없게 된 이 우화적인 작품에다 재미있는 어린이책 또는 동화책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  (P.245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중에서)

 

헤세의 서평집을 읽고 있노라면 책에 대한 그의 끝없는 열정에 탄복할 뿐만 아니라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책을 읽었기에 그 많은 책을 섭렵할 수 있었는지 가볍게만 여겨지는 나의 독서량에 문득 초라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게도 되지만, 그와 같은 비교를 통해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차분히 늘려가게도 된다. 다만 과한 욕심에 사로잡혀 미처 다 읽지도 못할 분량의 책을 한꺼번에 구매하는 게 독이라면 독이랄까. 반짝 추웠던 날씨가 풀린 느낌이다. 점심을 먹자마자 오수가 쏟아지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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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교회(편의상 A교회라고 하자)가 하나 있다. 물론 아파트 인근에 A교회 말고도 올망졸망한 교회들이 커피숍의 숫자보다 더 많기는 하지만, 교회 부지나 건물의 규모면에서 A교회는 여타의 다른 교회를 압도하는지라 내가 아는 몇몇 분들도 모두 그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바람에 나도 수차례 교회에 나올 것을 권유받았지만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걸 거절의 이유로 내세우곤 했다. 물론 바쁘다는 이유로 주말 미사엔 번번이 빠져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 한 신자라고 할 수도 없는 '날라리 신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런 핑계를 얼렁뚱땅 둘러대는 바람에 교회에 나오라는 권유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지만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어떤 때는 매일 새벽) 열심히도 교회에 출근 도장을 찍는 그들의 모습을 볼라치면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생활을 제외하면 어느 모로 보나 그닥 성실한 사람들이 아닌데 교회 일이라면 어떻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만사 제쳐두고 앞장설 수 있는지 내 얕은 신앙심으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엊그제는 강풍이 불고 눈이 내린다는 기상청 예보도 있어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두고 출근했었다. 퇴근길에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이따금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날씨는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웠다. 뜨끈한 아랫목이 간절했던지라 걸음은 자연스레 빨라졌고 주변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집 근처의 A교회 정문에 이르렀을 때 내가 아는 지인(A교회 신도)과 어떤 초로의 남성이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평소 다른 사람과 다투는 모습은 전혀 본 적이 없었던지라 걸음을 멈추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지인과 다투던 남자의 주장인 즉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 이 많은 사람들이 꼭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게 맞느냐는 것이었다. 자신도 교회 근처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면서 자신이 이렇게 따지고 들면 A교회에 다니는 고객 중 몇몇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지만 그런 손해를 차치하고서라도 도무지 불안해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게 그가 주장하려는 요지였다. 지인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회는 정부의 방역 지침을 따르고 있고, 발열체크라든가 인원 제한 등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선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데 왜 종교의 자유마저 침해하느냐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분노가 극에 달해서인지 눈보라의 기세가 점점 드세지는 것도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지인과 눈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이제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곳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득실거리는 바이러스의 천국으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이런 인식을 국민 전체에 심어준 것도 따지고 보면 미련한 목회자와 우둔한 신자들의 합작품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된다 할지라도 한 번 각인된 인식은 쉽게 변하지 않을 터, 교회 신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을 향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머리를 숙이는 게 참된 신앙인의 자세일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거꾸로 가는 경향이 있다. 교회 신도와 일반인의 편을 가르고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이다. 똥 묻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했던가. 옛말 그른 게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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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지음, 민병일 사진 / 열림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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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0년 전인 2011년 1월 22일 세상을 뜬 작가 박완서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지 않을까 싶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이름만 겨우 한두 번쯤 들어본 작가일 수도 있고,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에 열광하던 작가일 수도 있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정이 가는 작가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질곡의 시대를 살았던 작가가 자신과 주변의 삶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놓았던 노고를 생각할 때, 후손 된 입장에서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티베트의 하늘은 그때의 우리 하늘빛보다 더 가깝고 더 깊게 푸르다. 인간의 입김이 서리기 전, 태초의 하늘빛이 저랬을까? 그러나 태초에도 티베트 땅이 이고 있는 하늘빛은 다른 곳의 하늘과 전혀 달랐을 것 같다. 햇빛을 보면 그걸 더욱 확연하게 느낄 수가 있다. 바늘쌈을 풀어놓은 것처럼 대뜸 눈을 쏘는 날카로움엔 적의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그건 산소가 희박한 공기층을 통과한 햇빛 특유의 마모되지 않은, 야성 그대로의 공격성일 것이다."  (p.20)

 

박완서 작가의 여행기 <모독(冒瀆)>을 읽었던 건 소설이 아닌 작가의 산문집을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10주기를 추모하는 나 나름의 경건한 의식 같은 것이기도 했다. 1997년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처음 출간되었던 이 책은 '2005년 한국의 아름다운 책 100'에 선정(예술 부문)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절판되어 책 애호가들 중에는 희귀본으로 남아 있다. 그러다 2014년에 열림원에서 재출간한 책이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나는 1997년 판본의 낡은 책을 읽고 있으나 그 시절의 작가도, 외환위기를 겪었던 그 시절의 기억도 그저 머릿속의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았을 뿐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리움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만큼이나 무상하다.

 

"우리가 초모랑마(에베레스트)에 대해 외경심을 갖는 것은 세계의 최고봉이기 때문이지만 인도나 티베트, 네팔 등 힌두 불교 문화권에서는 카일라스 산을 창조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일생에 한 번이라도 순례하기를 열렬하게 소망한다. 순례의 길이 고통스러울수록 죄가 정화된다고 믿어 고통보다는 법열을 느낀다고 한다. 그들처럼 최소한의 소유로 단순 소박하게 사는 민족도 없다 싶은데 이런 엄청난 죄의 대가를 지불하려들다니, 그들이 느끼고 있는 죄의식이 어떤 것인지 우리 같은 죄 많고 욕심 많은 인간에겐 상상이 미치지 않는 영역일 듯싶다."  (p.199)

 

'민병일 시인이 카메라를 들고 따라나서 주었고, 소설 쓰는 이경자, 김영현도 동행이 돼주었다.'고 밝힌 이 책에서 작가는 60대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히말라야 오지를 여행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동행했던 이들의 살뜰한 보살핌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박완서 작가의 글은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군더더기 없이 맑고 단아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리듬감을 느끼게도 하고, 작가의 투명한 속내가 글에 내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현대 여행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지나친 감상이나 과장, 여행자만의 애상 등 여행기라기보다 '여행 감상문' 혹은 '여행 애상기'에 가까운 그런 문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가 보았던 티베트와 네팔의 빛과 어둠이 있는 그대로 펼쳐진다.

 

"오늘 살 줄만 알았지 내일 죽을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힌두 문화권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들의 사는 모습을 구질구질한 면까지 천연덕스럽게 보여주듯이 죽어 빈 껍데기가 된 시신이 아주 한 자락의 바람으로 무화되는 과정도 천연덕스럽게 보여준다. 윤회를 믿기 때문일까."  (p.301)

 

소박한 사람들이 욕심 없이 사는 성스러운 땅에 화석 연료의 마지막 쓰레기인 비닐 조각, 스티로폴 파편, 찌그러진 페트병 따위의 생전 썩지 않는 것들을 두고 온 것이 완전 순환의 땅인 그곳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노작가의 진솔한 자아성찰기가 작가가 세상을 떠난 10년 후의 어느 독자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던 책. 며칠 따뜻했던 날씨가 다시 또 추워지고 있다. 삶도 자연도 끝없는 순환만 이어질 뿐 영원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 만에 나는 먼지 쌓인 서가에서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삶도 이처럼 허허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따금 책을 읽고 또 이따금 생각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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