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시공간을 초월하여 어떤 유명인의 서평집을 읽는다는 건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저자가 즐겁게 읽은 책을 나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면 그 기쁨은 배가 된다. 멀게만 느껴지던 저자가 부쩍 친밀해진 느낌이 드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뭔가 비밀을 공유한 느낌이랄까, 아니면 세상의 수많은 책 중에 유독 그 책을 가슴에 품었던 것에 대한 깊은 공감대랄까 아무튼 저자와 나는 취향이 비슷하거나 서로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비슷한, 그런 까닭에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친밀감은 현실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오랫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보자. 모로 씨가 늙어간다는 것, 달이 가고 해가 가고, 또 해가 간다는 것이 사건이라고 말이다. 이 책의 헤아리기 어렵고 감동적이고 압도적인 점이 바로 여기 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이 천천히, 알아채지도 못하는 가운데 하지만 끊임없이, 돌이킬 길 없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이 사람이 불확실한 충동에 이끌려 어떤 운명을 기다리는 것을, 수수께끼가 풀리기를, 진짜 마음을 사로잡는 뜨거운 사랑을, 구원을, 만족을, 자기 존재의 정당화를, 운명을 기다리는 것을 바라본다. 그는 절반만 의식한 채 막연히 찾아 헤매면서도 자기 운명이 바로 자기 위에 있음을, 이미 자기를 둘러싸고 있음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기다리고 예감하고 찾아 헤매면서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p.49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중에서)

 

20세기 가장 사랑받는 작가이자 독서광으로 잘 알려진 헤르만 헤세의 서평집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은 그가 쓴 3천여 편의 서평과 에세이 가운데 가장 빼어난 글 73편을 가려 뽑은 것으로, J.D 샐린저, 카프카, 토마스 만, 크누트 함순, 도스토옙스키, 조너선 스위프트, 등 세계문학의 고전들로부터 공자, 노자, 붓다,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 등 동양의 걸작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헤세는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을 길지 않은 글로 압축하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독특한 문장을 곳곳에 드러냄으로써 왜 그가 따뜻한 지성과 깨어 있는 영혼의 작가로 추앙받는지 깨닫게 한다.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낯선 공기를 숨 쉬는 듯한, 우리가 삶에서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과 다른 맥락의 공기를 숨 쉬는 듯한 느낌을 거듭 받게 된다. 그런데도 나는 이 대화록을 읽으며 보낸 나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중국 정신이 낯선 천체의 산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를 건드린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좋은 일이고, 단순히 피상적인 방식 이상으로 그 정신을 들여다볼 좋은 연습도 된다. 그러면 우리의 개인주의 문화를 자명하다 여기지 않고, 대립되는 것과 비교해서 바라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P.306 '공자의 <대화> 중에서)

 

물론 책에 대한 헤세의 관심은 비단 문학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고 철학, 종교,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지만 이 책에는 그가 읽었던 문학작품을 위주로 선별하여 엮은 까닭에 일반 독자들도 특별한 어려움 없이 읽어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술술 읽힌다는 얘기는 아니다. 미처 읽지 않았던 작품이나 잘 알지 못하는 작가가 등장할 때마다 헤세의 평이 어떠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는지 감을 잡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도 그러하듯 고난이 있으면 기쁨의 순간도 있게 마련, 잘 알려진 작품을 접하면서 또 한숨 돌리게 되는 것이다.

 

"예리하고 감성적이며 천재적인, 그러면서 삶에는 허약한 한 남자, 한 사상가의 고백이 바로 <걸리버 여행기>이다. 이는 그가 남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순수한 작품이다. 인류는 이 <걸리버 여행기>를 아주 손쉽게 취급했다. 처음에는 팽팽한 긴장감을 담은 모험 이야기로 여겨 이 작품을 환영했지만, 실제로는 몇 가지 치명적인 신랄함과 냉혹함 때문에 소화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다시 가라앉힐 수 없게 된 이 우화적인 작품에다 재미있는 어린이책 또는 동화책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렸다."  (P.245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중에서)

 

헤세의 서평집을 읽고 있노라면 책에 대한 그의 끝없는 열정에 탄복할 뿐만 아니라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책을 읽었기에 그 많은 책을 섭렵할 수 있었는지 가볍게만 여겨지는 나의 독서량에 문득 초라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게도 되지만, 그와 같은 비교를 통해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차분히 늘려가게도 된다. 다만 과한 욕심에 사로잡혀 미처 다 읽지도 못할 분량의 책을 한꺼번에 구매하는 게 독이라면 독이랄까. 반짝 추웠던 날씨가 풀린 느낌이다. 점심을 먹자마자 오수가 쏟아지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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