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장학생인 램지어에 의한 헛소리 한마디가 우리나라 전체를 들끓게 하는 걸 보면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제국주의 일본에 부역하였던 친일의 잔재를 제때에 처리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 역시 간과할 수는 없는 일, 과거 일제시대에도 그러하였지만 돈이라면 열 길 불 속이라도 뛰어들 듯한 불나방과도 같은 존재들의 난장을 아무런 단죄도 없이 그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마냥 답답할 뿐이다. 램지어의 헛소리에 동조하는 몇몇 미꾸라지들의 망언을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과연 보편적 인류의 양심에 비추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작자들인지 심히 의심이 들긴 하지만 적어도 한민족이라는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램지어의 헛소리에 분개해야 마땅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더욱더 기가 막히는 건 그런 망언을 쏟아내면서도 학문의 자유 운운한다는 것인데 그게 설득력이 있으려면 나치에 부역했던 자들을 옹호하는 논문을 발표하거나 그와 유사한 인터뷰를 언론에 실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나치를 지지할 용기는 없으면서 유독 일본 제국주의자들만 칭송하는 이유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악행에 견주어 히로히토의 추종자들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선량했던 자들이 아닌데 어떻게 하면 일제의 만행을 덮어줄 수 있을까 틈만 나면 궁리하는 까닭을 도무지 모르겠다.

 

그나마 우리 사회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기사는 과거 학교 폭력 피해자들의 폭로로 인한 유명 스포츠인들의 퇴장이 아닐까 싶다. 물론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이 스포츠계에만 존재할 리 없겠지만 성과지상주의에 매몰된 대한민국의 스포츠계에서 쉬쉬하고 넘어가던 학교 폭력의 관행이 많았던 것도 공공연한 비밀, 언젠가 터질 게 터진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면 스포츠계를 넘어 다른 분야에서도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지 않겠는가. 그런 관행이 정착되면 학교 폭력이 용서받기 힘든 중대 범죄로 인식될 테고 말이다.

 

코로나 시대를 살다 보니 타인과의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기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언론에 노출되는 기사를 전보다 더 꼼꼼히 살펴보는 게 습관화되었다. 타인과의 접촉 시간이 줄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작은 기사에도 일희일비하게 된다. 혼자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다가도 어느 순간 잠잠해지기도 하고, '그것 참 쌤통이다!' 하면서 무릎을 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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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 - 힘겨운 삶에 지친 이들을 위한 철학 처방전
오카다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책세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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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뭇거뭇한 죽음의 그림자를 막연히 동경하거나 다른 어느 때보다 가깝다고 느낄 때가 더러 있다. 삶이라는 게 언제나 꽃길일 수만은 없는 까닭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sns에 올라오는 행복에 겨운 사람들의 과장된 몸짓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삶은 적당히 힘들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삶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어떤 위로나 합리적인 설득으로도 죽음 저쪽으로 기운 어떤 이에게 삶으로의 귀환을 종용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인 정신과 의사에게도 마냥 버겁고 힘든 일인 모양이다. 하기에 정신과 의사로서 유명한 오카다 다카시조차 인생의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을 만나 상담하면서 과학적 접근과 의학 지식만으로는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죽고자 하는 사람을 합리적 이유로 설득하기란 불가능한 까닭에 이미 힘겨운 시간들을 지나온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책을 내기에 이르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는 어쩌면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저자가 삶이 힘든 이들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이자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변명의 글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에서 삶의 고통을 짊어지고 고난과 불합리한 시련에 직면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더라도 끊임없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인간, 의미와 용기를 얻기 위해 고투하는 시행착오, 그리고 그것이 다다른 궁극의 지혜를 말하려 한다."  (p.10~p.11 '프롤로그' 중에서)

 

일본에서 인격장애 임상 분야의 제1인자로 손꼽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실용적 의미에서의 철학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어차피 죽을 존재인 우리가 고통을 받으면서도 살려고 하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환기하고 정신과 의사로서의 임상 경험과 역사 속 인물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답을 찾아나가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삶에서 고통을 받는 유형을 총 7개로 나누고 각각의 경우에 걸맞은 역사 속 인물들을 불러냄으로써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자신만의 철학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1장 '부모와 사이가 나쁜 사람에게'에서 저자는 몇 번이나 자 기도를 했던 지인의 사례와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서로에게 불행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이지만, 쇼펜하우어가 가장 창조적이었을 때는 어머니와의 불화가 심했을 때라는 걸 언급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욕구불만이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말한다. 2장 '자기부정과 죄악감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에서는 여러 번의 자살 예고로 부모와 그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가 등장한다.

 

"헤세는 청년 시절에 자살의 위기와 아슬아슬하게 동거하는 날들을 보냈다. 중년이 되어서도 헤세는 여전히 그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여러 번 강한 자살 충동을 느꼈다. 그의 인생은 삶의 고통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죽음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역사이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깨끗이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쉰 살 이후의 일이었다."  (p.56)

 

3장은 '자신답게 살 수 없는 사람에게'로, 자기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조언이 담겼다. 저자는 의무와 책임, 자유와 가능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일이며,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균형을 찾을 것을 권한다. 저자는 그에 대한 적합한 예로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를 들고 있다. 4장은 ''굴레'에 속박된 사람에게'로, <인간의 굴레>를 쓴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지나치게 사람을 바꾸면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고 필요 이상으로 몸과 마음을 소모시키게 된다. 휴식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을 때는 안정을 원하는 시기도 찾아온다. 많은 사람의 경우, 안정과 변화라는 양극 사이를 오가며 흔들린다. 그것은 계절이 돌고 돌듯 자연스러운 행위일지도 모른다."  (p.176)

 

5장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6장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철학', 7장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서'로 이어지는 후반부에서 저자는 장 자크 루소, 에릭 호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사례를 들려준다. 도쿄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저자는 탁상공론이 되어버리기 십상인 철학에 한계를 느껴 중퇴하고 교토 대학 의학부에 입학해 수련을 쌓은 끝에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도구로서 철학을 선택학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자전적 경험과 의사로서의 임상 경험, 그리고 철학도였던 저자의 경험이 잘 어우러진 이 책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를 조금이나마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의 남은 삶을 살아갈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결코 여기지 않는다. 그런 어려움과 불쾌함조차 이렇게 주어지는 데는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하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초월하는 힘과 의미를 찾는 것이다."  (p.319)

 

저자는 책의 말미인 에필로그에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철학이란,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인생 속에만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쓰면서 다시 한번 강하게 확신했다.'고 밝혔다. 밖에는 지금 잦아들듯 잦아들듯 가는 눈발이 치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그리고 다시 겨울로 이어지는 무한반복의 순환이 이어질 것만 같은 바깥 풍경을 보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고통 속에서 삶과 죽음을 저울질하는 어떤 이의 한숨이 저 바람 속에 섞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눈이 그치고 더없이 맑은 하늘이 다시 찾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는 건 마음 깊은 곳에 삶의 의미를 담은 철학이 존재한다는 걸 뜻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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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는 것의 새로움을 새삼 느끼게 되는 하루. 예년 같지 않은 적적한 명절 연휴를 보내다 불현듯 들었던 생각. 말장난이 아니라 '늙어간다는 것의 새로움'은 우리가 매일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다는 구태의연한 의미에서 벗어나 하루하루 신체의 변화를 실감하며 단 한 번도 늙는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던 한 인간의 실감에서 비롯되었다. 매일 아침운동을 해도 빠지지 않는 뱃살과 아무리 피곤한 날도 새벽 두세 시면 어김없이 잠이 깨는 이상한 잠버릇, 이따금 찾아오는 꺼질 듯한 무기력증 등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새롭게 발견되는 육체적인 변화도 새롭지만 가슴을 옥죄는 깊은 허무와 회색빛 우울의 불규칙적인 습격과 같은 정신적인 변화도 나를 이따금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내가 예전에 늙어가는 것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이토록 가깝게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자신의 죽음마저 궁금했던 리처드 파인만의 호기심처럼 성장기의 육체적 변화를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던 나는 중년의 내 몸이 겪는 변화가 문득 새롭게 느껴졌던 것이다. 바야흐로 '늙어간다는 것의 새로움'이 내 삶의 화두처럼 등장했다.

 

고3 수험생이 된 아들을 앉혀놓고 괜한 잔소리를 했었다. 아들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기대가 화를 부른 꼴이랄까.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카톡 메시지를 남겼다. 아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아닌 아들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무리하게 끼어들고 간섭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어려웠던 환경과 성장 과정을 마치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학창시절 1대 5로 싸운 적이 있다는 친구의 지나친 과장을 비웃으면서도 아들에게 들려주는 내 성장기에는 양념을 치듯 드문드문 과장이 섞이는 것이다.

 

크리스천 돈런이 쓴 <완벽한 날들>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저자가 죽음이 임박한 5년 동안의 기록을 책으로 엮은 <완벽한 날들>은 죽음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보다는 삶이라는 밝은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너무 오래 쳐다보는 바람에 하마터면 로터리에서 방향을 틀 기회를 놓칠 뻔했다. "병원에서요." 내가 말했다. "발견이라기보다는 깨달음에 가까워요. 자식을 위해 죽는 게 부모의 책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게 부모의 궁극적 책무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목숨을 걸고서 불구덩이나 달려오는 차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걸, 죽어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죽는다는 뜻이에요. 그게 부모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이에요." 별로 웃기는 말도 아닌데 말하고 나서 껄껄 웃었다. 아버지는 운전하면서 내 말을 곰곰 생각하는 것 같았다."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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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스탠딩
래리 호건 지음, 안진환 옮김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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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종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먹고사는 문제를 정치인 누군가가 획기적으로 해결해주리라 기대하곤 한다. 당사자도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문제를 나와 크게 관계도 없는 일개 정치인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이와 같은 헛된 믿음은 차라리 소설이나 희망 보고서에 가깝다. 그러나 간혹, 아주 드물게 우리의 믿음을 조금이나마 충족하는, 때로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임기가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의 믿음에 부합하려고 노력하는 정치인을 만날 때가 있다. 기적에 가까운 현실 정치인의 노력을 목격함으로써 우리는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와 함께 묶어 버렸던 정치인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다시 또 어렵사리 되찾아오곤 한다.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인물을 주지사에 출마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주지사를 바꾸지 않고서는 메릴랜드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땅한 후보감이 많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이길 가능성이 있는 누군가가 없었다. '내가 나가면 겨뤄볼 만하다'라는 생각이 든 게 바로 그때부터였다."  (p.94)

 

메릴랜드 주지사이자 한국계 미국인 김유미 씨를 아내로 둔 까닭에 한국 사위로 잘 알려진 래리 호건의 삶과 비전을 기록한 책 <스틸 스탠딩>을 읽어보면 일반 대중이 바라는 정치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조금쯤 깨닫게 한다.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온갖 역경을 딛고 메릴랜드 주지사에 당선된 것은 물론 주지사가 되기 전 메릴랜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2위로 낙선한 것이 이전 정치 경력의 전부였던 정치 신인이, 그것도 민주당의 텃밭인 메릴랜드 주에서 공화당 당원으로 출마하여 당당히 주지사가 된 배경에는 어쩌면 정치인 래리 호건의 잠재된 재능과 열정을 메릴랜드 유권자들이 한눈에 알아보게 한 절실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대치를 너무 높게 설정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감동적인 마무리를 위해 내가 애써 구상한 아이디어였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에 메릴랜드 주민들이 이렇게 말해주길 바랍니다. '래리 호건이 주지사로 취임한 날부터 메릴랜드의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식이 끝난 후 유미와 보이드, 모니카, 그리고 나는 청사 1층의 영접 열에 나란히 서서 오늘을 축하하러 온 모든 시민과 몇 시간에 걸쳐 악수를 나눴다."  (p.168)

 

부유한 부동산 업자였던 호건 주지사와 세 딸을 둔 싱글맘 김유미 씨의 결합은 주지사 선거에서 장점으로 작용했다. 오죽하면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아내와 딸들의 사랑과 지원이 없었다면 나는 주지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호건 주지사의 당선은 미국 현지에서도 기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워싱턴포스트〉는 그의 승리를 ‘너무도 충격적인 반전’으로 평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 행보는 순탄하지 않았다. 볼티모어에서 발생한 최악의 폭동을 잠재우고 메릴랜드주를 재정적 재난에서 구해냈으나 취임한 지 5개월 만에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

 

"가족과 직원과 친구, 그리고 무한히 관대한 메릴랜드 주민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병을 이겨내고 무한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까? 내게는 처음 진단받았을 때부터 내 곁을 지키며 누구보다 큰 사랑을 쏟아준 지지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반려견 렉시였다."  (p.309)

 

2016년 공화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미국은 극심한 분열의 시대로 진입했다. 민주당 지지자가 많은 메릴랜드에서 래리 호건이 다시 공화당 후보 주지사로 재선된다는 건 장담할 수 없었다. 가장 인기가 낮은 미국의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당 소속 주지사 후보로 나선다는 건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래리 호건은 민주당원이 두 배로 많은 메릴랜드에서 소속 당에 상관없이 주 역사상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으며 주지사에 당선됐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취임 연설을 하게 된다.

 

"저는 우리가 당파보다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고 갈등보다 타협을 우선시하겠다는 그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다시, 첫 임기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겸손과 열성과 경외심을 간직한 채 다시 설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p.398)

 

'내셔널 저널'은 그를 '차기 대선 출마에 적절한 포지션을 확보한 인물'로 꼽았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전례 없는 난제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도 그는 역시 탁월한 선택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다른 주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들을 위해 기꺼이 일어나 싸울 것이다. 그 흔한 현상 유지 정치를 위해 그리고 양극화와 마비를 영속화하기 위해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일을 시작하고 완수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 정치 학파에 속한다. 나는 사람들을 위한 일을 기꺼이 수행하려는 모든 사람과 손을 잡고 뛸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것이야말로 공직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의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한다."  (p.486)

 

얼마 있으면 우리나라에도 중요한 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그 선거를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 서울과 부산의 시장을 선출하게 되는 것이다. '다 그놈이 그놈이지' 하는 식의 자포자기적 발언이나 정치인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선거가 끝나는 시점에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와 함께 버려버리던 그와 같은 행태는 유권자 스스로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선출한 정치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선거에 나선 정치인들은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 나라의 주지사 래리 호건은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에게도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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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운명을 오롯이 타인에게 의지하거나 마치 내 것이 아닌 양 다른 누군가에게 위탁하면 자신의 타고난 운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운명을 살게 될 거라고 믿는 사람이 더러 있다. 이는 마치 '1+1=2'라는 수학적 인식에 젖어 '1'이라는 각자의 운명이 합쳐져 '2' 라는 새로운 운명으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믿는 것과 다름없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논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는데, 문제는 그런 논리를 믿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조금만 생각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많은 논리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처럼 허무맹랑한 운명론적 사고에 쉽게 빠져드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들 각자의 운명이 대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게 그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운명에 순응하며 산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 의지하거나 위탁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쉼 없이 살아갈 뿐이다. 비록 운명의 방향이 조금쯤 바뀔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 각자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에 앞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운명적인 고독을 이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는 것도, 언젠가 맞게 될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음을 개별적 운명을 이해하기에 앞서 수긍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코로나 정국이 길게 이어지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많이 보게 된다. 지금 겪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작금의 힘든 삶을 누군가에게 오롯이 의지하거나 숫제 내 것이 아닌 양 위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분명한 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어떻게든 살게 된다는 이치이다. 삶의 결은 각자가 조금씩 다를지언정. 정혜윤 작가가 쓴 <앞으로 올 사랑>을 읽고 있다. 책에 나오는 한 문장을 옮겨본다.


"나는 이제 내가 사랑해온 세계의 깊은 상처를 본다. 현재와 미래, 자연과 인간, 나와 타인, 이 모든 영역에서 길을 잃은 우리를 본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의 중지를 원할 수 있다. 고통의 중지, 죽음의 중지 또한 원할 수 있다. 길을 잃을 때는 이야기를 미래의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하고 앞날이 알고 싶다면 지향점과 방향성이 가리키는 쪽을 봐야 한다. 우리 시대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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