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운명을 오롯이 타인에게 의지하거나 마치 내 것이 아닌 양 다른 누군가에게 위탁하면 자신의 타고난 운명에서 벗어나 새로운 운명을 살게 될 거라고 믿는 사람이 더러 있다. 이는 마치 '1+1=2'라는 수학적 인식에 젖어 '1'이라는 각자의 운명이 합쳐져 '2' 라는 새로운 운명으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믿는 것과 다름없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논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는데, 문제는 그런 논리를 믿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조금만 생각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많은 논리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그처럼 허무맹랑한 운명론적 사고에 쉽게 빠져드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들 각자의 운명이 대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게 그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운명에 순응하며 산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 의지하거나 위탁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쉼 없이 살아갈 뿐이다. 비록 운명의 방향이 조금쯤 바뀔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 각자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에 앞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운명적인 고독을 이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는 것도, 언젠가 맞게 될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음을 개별적 운명을 이해하기에 앞서 수긍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코로나 정국이 길게 이어지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많이 보게 된다. 지금 겪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작금의 힘든 삶을 누군가에게 오롯이 의지하거나 숫제 내 것이 아닌 양 위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분명한 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어떻게든 살게 된다는 이치이다. 삶의 결은 각자가 조금씩 다를지언정. 정혜윤 작가가 쓴 <앞으로 올 사랑>을 읽고 있다. 책에 나오는 한 문장을 옮겨본다.


"나는 이제 내가 사랑해온 세계의 깊은 상처를 본다. 현재와 미래, 자연과 인간, 나와 타인, 이 모든 영역에서 길을 잃은 우리를 본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의 중지를 원할 수 있다. 고통의 중지, 죽음의 중지 또한 원할 수 있다. 길을 잃을 때는 이야기를 미래의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하고 앞날이 알고 싶다면 지향점과 방향성이 가리키는 쪽을 봐야 한다. 우리 시대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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