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스탠딩
래리 호건 지음, 안진환 옮김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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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종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먹고사는 문제를 정치인 누군가가 획기적으로 해결해주리라 기대하곤 한다. 당사자도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문제를 나와 크게 관계도 없는 일개 정치인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이와 같은 헛된 믿음은 차라리 소설이나 희망 보고서에 가깝다. 그러나 간혹, 아주 드물게 우리의 믿음을 조금이나마 충족하는, 때로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임기가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의 믿음에 부합하려고 노력하는 정치인을 만날 때가 있다. 기적에 가까운 현실 정치인의 노력을 목격함으로써 우리는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와 함께 묶어 버렸던 정치인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다시 또 어렵사리 되찾아오곤 한다.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인물을 주지사에 출마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주지사를 바꾸지 않고서는 메릴랜드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땅한 후보감이 많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이길 가능성이 있는 누군가가 없었다. '내가 나가면 겨뤄볼 만하다'라는 생각이 든 게 바로 그때부터였다."  (p.94)

 

메릴랜드 주지사이자 한국계 미국인 김유미 씨를 아내로 둔 까닭에 한국 사위로 잘 알려진 래리 호건의 삶과 비전을 기록한 책 <스틸 스탠딩>을 읽어보면 일반 대중이 바라는 정치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조금쯤 깨닫게 한다.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온갖 역경을 딛고 메릴랜드 주지사에 당선된 것은 물론 주지사가 되기 전 메릴랜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2위로 낙선한 것이 이전 정치 경력의 전부였던 정치 신인이, 그것도 민주당의 텃밭인 메릴랜드 주에서 공화당 당원으로 출마하여 당당히 주지사가 된 배경에는 어쩌면 정치인 래리 호건의 잠재된 재능과 열정을 메릴랜드 유권자들이 한눈에 알아보게 한 절실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대치를 너무 높게 설정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감동적인 마무리를 위해 내가 애써 구상한 아이디어였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에 메릴랜드 주민들이 이렇게 말해주길 바랍니다. '래리 호건이 주지사로 취임한 날부터 메릴랜드의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식이 끝난 후 유미와 보이드, 모니카, 그리고 나는 청사 1층의 영접 열에 나란히 서서 오늘을 축하하러 온 모든 시민과 몇 시간에 걸쳐 악수를 나눴다."  (p.168)

 

부유한 부동산 업자였던 호건 주지사와 세 딸을 둔 싱글맘 김유미 씨의 결합은 주지사 선거에서 장점으로 작용했다. 오죽하면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아내와 딸들의 사랑과 지원이 없었다면 나는 주지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호건 주지사의 당선은 미국 현지에서도 기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까닭에 〈워싱턴포스트〉는 그의 승리를 ‘너무도 충격적인 반전’으로 평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 행보는 순탄하지 않았다. 볼티모어에서 발생한 최악의 폭동을 잠재우고 메릴랜드주를 재정적 재난에서 구해냈으나 취임한 지 5개월 만에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

 

"가족과 직원과 친구, 그리고 무한히 관대한 메릴랜드 주민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병을 이겨내고 무한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까? 내게는 처음 진단받았을 때부터 내 곁을 지키며 누구보다 큰 사랑을 쏟아준 지지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반려견 렉시였다."  (p.309)

 

2016년 공화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미국은 극심한 분열의 시대로 진입했다. 민주당 지지자가 많은 메릴랜드에서 래리 호건이 다시 공화당 후보 주지사로 재선된다는 건 장담할 수 없었다. 가장 인기가 낮은 미국의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당 소속 주지사 후보로 나선다는 건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래리 호건은 민주당원이 두 배로 많은 메릴랜드에서 소속 당에 상관없이 주 역사상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으며 주지사에 당선됐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취임 연설을 하게 된다.

 

"저는 우리가 당파보다 문제 해결을 우선시하고 갈등보다 타협을 우선시하겠다는 그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다시, 첫 임기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겸손과 열성과 경외심을 간직한 채 다시 설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p.398)

 

'내셔널 저널'은 그를 '차기 대선 출마에 적절한 포지션을 확보한 인물'로 꼽았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전례 없는 난제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도 그는 역시 탁월한 선택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다른 주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믿는 것들을 위해 기꺼이 일어나 싸울 것이다. 그 흔한 현상 유지 정치를 위해 그리고 양극화와 마비를 영속화하기 위해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일을 시작하고 완수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 정치 학파에 속한다. 나는 사람들을 위한 일을 기꺼이 수행하려는 모든 사람과 손을 잡고 뛸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것이야말로 공직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의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한다."  (p.486)

 

얼마 있으면 우리나라에도 중요한 선거가 치러지게 된다. 그 선거를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도시 서울과 부산의 시장을 선출하게 되는 것이다. '다 그놈이 그놈이지' 하는 식의 자포자기적 발언이나 정치인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선거가 끝나는 시점에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와 함께 버려버리던 그와 같은 행태는 유권자 스스로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선출한 정치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선거에 나선 정치인들은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 나라의 주지사 래리 호건은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에게도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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