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의 상승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바람에 전에는 없던 관심이 과도하게 쏠리는 듯하다. 나 역시 비트코인은 한낱 싸이월드 시절의 도토리쯤으로 여겼던 터라 암호화폐 투자에 몰입하는 몇몇 사람들을 한심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식사를 하던 중 암호화폐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지인 역시 암호화폐에 소액을 투자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투자금에 대한 구체적인 액수는 밝히지 않았지만 본인 말에 의하면 날려도 그만인 소액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투자를 권했다. 큰돈이 아니라면 한 번쯤 투자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면서...

 

과거에 내가 알던 지인은 경제 지식이 풍부하고 웬만해서는 직접 투자에 나서지 않는 대단히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사람이 투자를 권하니 나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지라 담이 작은 나도 100만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하기에 이르렀고, 불과 며칠 만에 투자금만큼의 수익을 올렸다.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소심한 나는 원금을 빼고 수익금만 남겨두었는데 그마저도 자고 나면 오르는 통에 횡재했다 싶은 기분이 절로 드는 것이다. 물론 팔자를 고칠 정도의 큰돈은 아니지만 말이다. 뜻하지 않은 수익이 발생하다 보니 돈 욕심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재미 삼아 시작한 것이니 단순한 재미로 남겨 둘 작정이다.

 

지자체장을 뽑는 재보궐선거가 끝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선거 결과도 나오기 전에 이미 결과를 알 수 있는 선거였기에 조마조마하거나 쫄깃한 긴장감은 그닥 없었지만 사람들의 표심에서 다들 개인의 욕심이 분출된 것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이 보유한 집의 가치 하락에 대한 불안을 불식시키고 매년 상승하는 세금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모두 그런 후보에게 투표했다. 말하자면 아파트 값은 올리고 세금은 덜 내게 해주겠다는 후보가 장땡인 것이다. 투표를 마친 친구들도 저으기 미안했던지 "이러다 대깨오(대가리가 깨져도 오세훈) 소리를 듣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하면서 웃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정치권에서 쓰는 말들은 어쩌면 그렇게 천박한지 모르겠다.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라는 말이 회자되더니 이제는 언론에서도 공공연히 쓰고 있다. 소위 나잇살이나 처먹은 게 뭔 벼슬도 아니고 품위 없이 이런 천박한 말을 퍼뜨린다는 건 어린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이러다가 '대깨오'나 '대깨윤'을 지나 '대깨이', '대깨김' 등 우리나라 성씨들 대부분이 그 반열에 오르는 건 아닌지... 나이가 들면 언어를 조심하는 게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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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13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암호화폐를 도토리라 하셔서 완전 빵터졌네요. 저는 이런 쪽엔 관심이 1도 없는데, 소액으로 하면 소액밖에 못 벌어 안하게 되고, 거금은 돈이 없어서 못하게 되다는 생각! 그냥 재미로 두실 수 있는 내공이면 그냥 재미로 하셔도 좋을 거 같네용!

꼼쥐 2021-04-15 19:22   좋아요 0 | URL
암호화폐는 하루에도 몇 십 퍼센트가 오르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 까닭에 때로는 소액이 큰돈이 되기도 하는가 봅니다. 그래서인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젊은 사람들이 암호화폐 투자에 뛰어들기도 하더군요. 대부분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내가 되어가는 순간 - 최선의 나를 찾아서
헤르만 헤세 지음, 이민수 옮김 / 생각속의집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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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 하면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두 소설이 '성장소설'이라는 작은 테두리 안에 갇힘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기회를 상실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사실 두 소설은 한참 어른이 된 후에 읽어도 좋고, 아직 성장기에 있는 좀 이른 나이에 읽어도 더없이 좋은 책이다. 말하자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읽어도 독자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제곤하는 좋은 소설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성장소설'의 목록에 편입됨으로써 어른들은 자신들이 이미 읽어야 할 시점을 놓쳤다는 이유로, 그리고 아이들은 두 소설이 단지 '성장소설'의 목록에 편입되었다는 이유로 미처 읽어보지도 않은 채 유치한 내용의 소설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두 소설은 재독 삼독을 하여도 그때마다 다른 감동과 깨달음을 안겨주는 좋은 소설인데 말이다.

 

"똑똑한 말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 정말 의미가 없지. 자기 자신에게 멀어질 뿐이야. 자기 자신에게 멀어진다는 것은 죄악이야. 우리는 완전히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해. 마치 거북이처럼 말이야."  (p.66 '데미안' 중에서)

 

헤르만 헤세의 잠언집 <내가 되어가는 순간>은 헤르만 헤세의 저작을 단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던 사람이건 헤세의 저작이라면 웬만한 건 다 읽어보았던 사람이건 상관없이 헤세가 전해주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을 느끼게 하는 문장들을 여럿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헤세의 여러 작품 중에서 가려 뽑은 문장들을 찬찬히 읽고 곱씹어 생각하다 보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는 까닭에 오늘처럼 나른한 휴일 오후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책일 수도 있다. 어느 잠언집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책의 두께가 얇다고 해서 금세 다 읽겠거니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어쩌면 책 속 한 문장에 사로잡혀 하루를 다 소비할지도 모른다.

 

"마흔과 쉰 사이 십 년은 열정적인 사람과 예술가에게 항상 위기의 시절이자 불안의 시기이다. 종종 자신의 삶과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기 힘든 때이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면 평온한 시절이 찾아온다. 나만 이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많이 보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시절이자 투쟁과 갈등의 시절인 청춘이 아름다웠ㄲ던 것처럼 나이가 드는 것과 성숙해지는 것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과 기쁨이 있다."  (p.113 '아들 브루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와 유서 깊은 신학자 출신의 외가를 두었던 헤세였지만 정작 본인은 엄격한 삶의 굴레와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였던 까닭에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것이 어쩌면 여러 대작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고집스러운 그의 성향이 더욱 강화되어 평생 자기만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헤세 자신도 그와 같은 자신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던 탓에 자신을 개인주의자로 칭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으며 어떤 정해진 길도 거부하고 자기만의 길에 고집스럽게 몰두했다.

 

"우리에게 인격은 사치품이 아니라 실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살기 위해 필요한 산소이자 반드시 필요한 내적 자본이다. 내가 이해한 예술가란 스스로 살고 있다는 느낌과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꼭 필요로 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힘의 근원을 인식하고, 그 고유 원칙에 따라 자기 자신을 구축하기를 진실로 원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속적인 활동도 원하지 않고, 그런 삶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예술가다."  (p.159 '게으름의 기술' 중에서)

 

책의 구성은 '나를 찾는다는 것, 나를 발견한다는 것, 다시 태어난다는 것'의 세 가지 키워드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주제별로 자기를 찾아가는 삶에 대한 헤세의 고뇌와 열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말했던 헤세의 통찰에서 보듯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을 걸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선의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허락된 평생의 시간을 쏟아부어도 그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데, 하물며 나는 평생 타인의 길을 부러워하며 나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 가는 길이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는 시도이고 오솔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이는 조용히, 어떤 이는 분명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 되려고 최선을 다한다."  (p.17 '데미안' 중에서)

 

하늘이 맑고 분분한 꽃잎처럼 애틋했던 하루. 정원을 가꾸며 자연에 대한 글과 그림을 그린 작가로도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잠언집을 읽는다는 건 덧없이 흘렀을 이 봄날의 하루를 충만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파트 주변의 도로를 질주하는 많은 차량들. 그들은 과연 내비게이션도 없는 자신의 인생길을 잘 찾아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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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제법 더위를 느낄 만큼 계절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시간은 우리가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에 몹시 서운함을 느꼈던 모양, 우리를 저만치 떼어놓고 '나는 내 갈 길 가련다'며 서둘러 달아나는 듯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러나 인간의 습성이란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는 몹시 아쉬워하고 관심을 쏟아붓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혹은 내 앞에 닥칠 시간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마련, 살아온 방식대로 그러려니 맞고 또 살아가는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려 평생을 그렇게 달리기만 하다가 죽음에 골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괜히 씁쓸하고 한편으로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외줄 위에서 조증과 울증을 번갈아가며 경험하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까닭에 옆사람의 달리는 모습은 미처 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나로서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를 얼핏 보았는데 내 눈에는 시인의 이상한 모습만 눈에 띄어 이 책을 과연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나는 과거를 자주 생각하는 편인데 늘 어른들이 했던 말, 교복 입고 다닐 때가 제일 좋을 때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때가 그리울 거다. 그런 말 다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백억 줄 테니 그때부터 다시 살라고 하면 바로 자살할 거다. 진심이다. 나는 늘 십대보다 이십대가, 이십대보다 삼십대가 더 좋았다. 친구가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했다. 야, 사십대는 더 좋대, 우리 그때까지는 꼭 살자. 그때까지는 살아야지."  ('내가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은' 중에서)

 

지랄맞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그 시절이 별로 그립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앞만 보고 달린다.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이 엿같은 것이다. 그와 같은 경험은 일체 해보지 않은 사람이 '이해한다'고 거드는 일은 더 엿같은 일일 게다. 그래서 나는 시인을 이해한다고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우리를 떼어놓고 저만치 앞서가는 시간과 헐레벌떡 쫓아가기에 바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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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게 투자한다는 것 - 절대 잃지 않고 가장 오래 쌓는 투자의 대원칙
버턴 말킬.찰스 D. 엘리스 지음, 한정훈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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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는 욕심이 신중함을 앞서 실패의 가능성을 높이고 나이가 들면 신중함이 오히려 욕심을 과도하게 눌러 결단력이나 과감함을 떨어뜨린다. 그것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런 까닭에 젊은 사람들은 그 시절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인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부자가 되기 위한 첫 관문인 시간을 투자하려는 생각보다는 남들보다 하루라도 먼저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이 앞서다 보니 꼼꼼히 살펴야 할 여러 요인들을 간과하거나 대충 훑어보는 경향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실패는 어쩌다 발생하는 불운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습관처럼 굳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저축과 다이어트의 공통점은 앞으로 누릴 혜택에 마음을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체중을 감량하는 사람들이 날씬해지는 데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대한 칭찬을 받고, 건강을 유지하고, 장수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저축하는 사람들은 절약과 저축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또한 저축하는 사람들은 자산을 키워 나가면서 재정적 독립과 미래의 행복을 성취하는 것에 커다란 만족감을 느낀다."  (p.52~p.53)


도합 112년의 경력의 투자 구루 ‘버턴 말킬(Burton G. Malkiel)’과 ‘찰스 엘리스(Charles D. Ellis)’가 쓴 책 <지혜롭게 투자한다는 것>은 어쩌면 '포모(FOMO) 증후군'에 빠진 현대인에 대한 처방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대공황 시대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과 대안정기, 1990년대의 닷컴버블, 2008년의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창궐로 인한 대봉쇄(Great Lockdown) 등 현대 경제사의 주요 변곡점을 두루 경험했던 두 저자는 시대의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 투자의 원칙을 찾게 되었고 이 책에서 '언제나 통하는 투자의 원칙'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1. 일찍 저축을 시작하고 꾸준히 저축하라.

2. 회사와 정부가 지원하는 은퇴 자금 계획을 활용하여 저축을 최대한 늘리고 세금을 최소화하라.

3. 저비용 '전체 시장' 인덱스 펀드와 다른 자산 유형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산 투자하라.

4. 매년 당신에게 적합한 비율로 자산을 재분배하라.

5. 항로를 유지하고 시장 변동을 무시하라. 그러지 않으면 비용이 많이 드는 심각한 투자 실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장기적인 목표에 집중하라.  (p.218~p.219)


당연한 말이지만 두 명의 저자가 천착했던 주제는 '시장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와 '시장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한가?'였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일단 투자의 경험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한 주제일 수 있다. 시장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만 있다면 부자가 된다는 건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고액의 수수료를 받는 투자 전문가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시장을 이기는 건 어려운 일이며, 시장을 예측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게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 책을 쓴 두 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를 불안에 빠트리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모든 외부 요인을 무시한 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듣게 되는 증권 방송의 시황 예측이라거나 금리 변동 가능성, 앞으로의 경기 전망 등 모든 시나리오를 무시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예측이 원숭이보다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이란 예측 불가능한 것이며, 전문가를 포함한 모든 투자자들은 시장 추종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투자에서 성공의 핵심 요소는 인내심과 끈기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무장하고 합리적인 장기 투자 프로그램을 실천하는 장기 투자자는 최고의 성공을 거두리라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p.217)


삶이란 오래된 후회에 새로운 후회를 끝없이 덧붙여나가는 과정이다. 완벽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을 일이다. 누군가는 기억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말했다지만 우리가 정작 겸손해야 할 대상은 오래된 기억이 아니라 자신이 부딪혀야 할 미래일지도 모른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듯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하는 오만함이 삶을 나락으로 이끄는 것처럼 시장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무지가 투자의 결과를 최악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인데 먼 미래를 어찌 알 수 있으랴. 미래 앞에 겸손해야 후회도 덜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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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도시에 사는 도시내기들에게 외출은 그닥 현명한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비나 눈은 보도를 따라 걷는 데 심한 장애 요인일 뿐 베란다에서 보는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길을 따라 걸을 때 비가 내리면 산책자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제공한다. 진하게 퍼지는 솔향기며, 이제 막 돋아나는 연녹색 풀잎의 옅은 풋내며, 마른 낙엽이 촉촉이 젖어들며 내뿜는 구수한 흙냄새 등 평소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온갖 생명들이 나와 함께 거대한 자연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각성은 비 오는 날의 숲에서만 맛볼 수 있는 푸근한 몰입이다.

 

지자체장을 뽑는 재보궐 선거의 사전투표가 이틀째 이어지고 있다. 물론 오늘이 사전투표의 마지막 날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느 선거나 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후보자의 공약이나 인물됨을 보지는 않는다. 오세훈 후보가 백바지를 입고 내곡동을 갔는지 안 갔는지는 하등 중요하지가 않다는 얘기다. 용산참사의 원인이 철거민들의 폭력적 행위에서 기인했다는 오세훈 후보의 끔찍한 발언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보자의 인성이 비인간적이든 아니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장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했든 아니든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민은 오직 자신의 이념 성향에 따라, 혹은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격을 올려줄 후보냐 아니냐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한 표를 행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뽑은 후보가 엄청난 일을 저질러도 "에이, 그놈이 그놈이지 뭐." 하는 말로 정당화한다. 그것이 선거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집단 지성이란 책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상적인 단어일 뿐이다. 그런 현상은 내 주변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뉴스와는 담쌓은 산속 무지렁이는 아니다. 그들도 나름 엘리트로 추앙받기도 한다.

 

이렇게 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며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날에는 평소에는 없던 낮잠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작 소설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있는데, 졸음이 쏟아져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체질상 술이라곤 한 잔도 입에 대지 못하지만 막걸리에 파전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막걸리 한 잔쯤 걸쭉하게 들이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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