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도시에 사는 도시내기들에게 외출은 그닥 현명한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비나 눈은 보도를 따라 걷는 데 심한 장애 요인일 뿐 베란다에서 보는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길을 따라 걸을 때 비가 내리면 산책자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제공한다. 진하게 퍼지는 솔향기며, 이제 막 돋아나는 연녹색 풀잎의 옅은 풋내며, 마른 낙엽이 촉촉이 젖어들며 내뿜는 구수한 흙냄새 등 평소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온갖 생명들이 나와 함께 거대한 자연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각성은 비 오는 날의 숲에서만 맛볼 수 있는 푸근한 몰입이다.
지자체장을 뽑는 재보궐 선거의 사전투표가 이틀째 이어지고 있다. 물론 오늘이 사전투표의 마지막 날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느 선거나 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후보자의 공약이나 인물됨을 보지는 않는다. 오세훈 후보가 백바지를 입고 내곡동을 갔는지 안 갔는지는 하등 중요하지가 않다는 얘기다. 용산참사의 원인이 철거민들의 폭력적 행위에서 기인했다는 오세훈 후보의 끔찍한 발언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보자의 인성이 비인간적이든 아니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장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했든 아니든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민은 오직 자신의 이념 성향에 따라, 혹은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격을 올려줄 후보냐 아니냐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한 표를 행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뽑은 후보가 엄청난 일을 저질러도 "에이, 그놈이 그놈이지 뭐." 하는 말로 정당화한다. 그것이 선거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집단 지성이란 책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상적인 단어일 뿐이다. 그런 현상은 내 주변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뉴스와는 담쌓은 산속 무지렁이는 아니다. 그들도 나름 엘리트로 추앙받기도 한다.
이렇게 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며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날에는 평소에는 없던 낮잠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작 소설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있는데, 졸음이 쏟아져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체질상 술이라곤 한 잔도 입에 대지 못하지만 막걸리에 파전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막걸리 한 잔쯤 걸쭉하게 들이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