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두려움에 대하여


우리 멧돼지들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 멧돼지들은 대개 머리도 나쁘고 겁이 없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짐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른 짐승에 비해 영민한 편이며 무척이나 겁이 많아 때로는 '저게 미쳤나?' 싶을 정도로 무모한 데가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들을 오해하여 사람들은 멧돼지 하면 먼저 머리가 나쁜 동물, 또는 앞뒤 가리지 않는 무식한 동물을 떠올리곤 하였던 것이다.


어제도 나는 얼마나 겁이 났던지 똘마니들이 마련해준 안가에서 딱히 할 일도 없이 하루를 소일하느라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난데없이 북한의 정은 멧돼지가 무인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게 어디 예사로 넘길 일인가. 여차하면 리더 멧돼지인 나의 목숨이 날아갈 판 아니던가. 가뜩이나 예민한 시국에 무인기라니... 나는 하루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오금이 저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정을 모르는 일반 멧돼지들은 국가 안전 보장 회의도 열지 않고 도대체 뭘 했느냐?고 비난하지만 생각해 보라. 여차하면 목숨이 날아갈 판인데 회의가 뭔 필요며, 목숨이 두 개도 아닌데 남들이야 죽든 말든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할 일 아니던가. 게다가 정은 멧돼지의 일차 목표는 누가 뭐래도 리더 멧돼지인 내가 아닌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리더가 된 직후부터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퇴임 후에 있을 나의 안위가 걱정이 돼서다. 나를 이어 리더가 될 멧돼지가 리더에서 물러난 나를 감옥에 보내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자다가도 문득문득 잠이 깨는 것이다. 리더에서 물러나기 전에 나를 감옥에 보낼 만한 멧돼지란 멧돼지는 모조리 손을 써 놓을 작정이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멧돼지가 리더라도 되는 날이면 나는 꼼짝없이 감옥에 갈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정말 가능성은 없지만 뒷골목의 내 똘마니였던 은정 멧돼지가 리더로 뿝힌다면 나는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 되는 것이다. 멧돼지 속담에 '설마가 멧돼지 잡는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불안과 공포는 나뿐만 아니라 아내 멧돼지도 함께 느끼고 있다. 퇴임 후 우리는 나란히 감옥으로 직행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나는 지금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내 편이 될 만한 멧돼지들이란 멧돼지들은 모두 풀어줄 작정이다. 나는 오늘도 전임 리더 멧돼지를 비롯한 온갖 비리에 연루된 멧돼지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내가 퇴임 후 어려움에 처한다면 그들 역시 나를 위해 함께 싸워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 역시 내후년에 있을 총선거에서 나와 반대편에 있는 멧돼지들이 대거 당선되어 나를 탄핵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예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셈이다. 요즘 내가 교회를 자주 찾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사람들이 믿는 신 중에서 가장 세다는 하느님에게 제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아내 멧돼지를 내 대신 감옥에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뒷골목 대장이었던 내가 가오가 있지 그런 최후를 맞는다면 쪽팔린 일 아닌가.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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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7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30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 문장 - 1년은 사람이 바뀔 수 있는 충분한 시간
조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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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아무리 정교하게 계획하고 절제하며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나아간다고 해도 모든 게 자신이 처음 구상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변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삶의 신비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되는 대로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신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지요. 살다 보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은 그저 운명이려니 생각하면서 툭툭 털어버릴 필요가 있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집 근처의 도서관을 시간이 날 때마다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번질나게 드나들다 보니 도서관에 근무하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을 여럿 알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햇수로 십여 년 이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만난 인연들은 저보다 한참 연배가 높은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은퇴 후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취미 생활을 하면서 소일하는 것이지요. 그분들 중 한 분은 모 은행에서 교육을 담당하셨던 분인데 지금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전에는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을 만날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분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도서관에서 반나절을 보내곤 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꺼내 읽다가 기억해야 할 문구를 볼라치면 반드시 자신의 노트에 기록하여 간직하곤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모은 노트만 수십 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만나기 시작했던 어떤 시점부터는 자신의 노트를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노트에 다시 간추려 꼭 기억해야 할 문구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언젠가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뜻도 내비쳤습니다. 인문학자 조희가 쓴 <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 문장>을 읽으면서 그분 생각이 났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문학, 철학, 경영, 자기계발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책 한 권을 저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독서를 하고 요약하는 일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장이 저에게 인생문장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큰 울림을 주었던 몇 문장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지요."  (p.4 'prologue' 중에서)


SESSION 1 '운명에 맞서 개척하는 인생, 도전의 계절', SESSION 2 '달콤한 환상 꿈같은 사랑, 열정의 계절', SESSION 3 '어떨 때는 배반하는 인생, 인내의 계절', SESSION 4 '흐르는 시간 영원한 사랑, 이성의 계절'의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읽고 발췌한 하나의 문장을 제시하고 그 밑에 저자의 코멘트를 다는 형식으로 제작되어 365개의 문장으로 꾸려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1년 365일을 이 책과 함께 하면서 결심을 굳히고 부록에서는 책에 실린 문장 중 20개를 선정하여 '나의 인생문장집'을 만드는 미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공지영 작가의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에서 발췌한 '일어나 걷는 자는 동사하지 않는다.'는 문장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주저앉고 싶은 순간을 종종 맞이합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으면 추운 날씨와 내리는 눈에 그대로 얼어붙어 죽고 말죠. 반면에 일어나 걷는 자는 땀이 나면서 체온이 올라가고, 그 체온에 눈이 녹아 동사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단 10분이라도 밖으로 나가 걸어보세요. 주저앉고 싶었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질 것입니다."  (p.213)


내가 도서관에서 만나 지금까지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분도 그렇게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그분의 인생 문장집에 대해 그 노트를 물려받을 당사자, 이를테면 그분의 아들은 그것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다고 내게 하소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 역시 결혼하여 슬하에 어린 아들을 두고 있지만 아버지가 했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아 자신의 아들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줄 생각은 없을 듯합니다. 물론 그렇게 될 리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그분의 아들은 아버지의 노트에 대해 그저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의 인생길이 남들보다 수월하고 편한 길이 되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2022년의 마지막 남은 한 주를 보내는 오늘, 새해에는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며칠 지나기도 전에 금세 잊어먹기도 하겠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새해는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맞아야 하겠습니다. 인문학자 조희의 <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 문장>을 읽었던 것도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다가오는 새해는 올해와 다를 것이라는 희망,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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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는 게 뭔지...


가뜩이나 살얼음판의 아슬아슬한 정치판인데 날씨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리더 멧돼지가 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시시각각 전해지는 국내외 뉴스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나처럼 게으르고 천하태평인 멧돼지도 리더라는 자리는 특별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어떤 일처리를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좋은 소식이 전해지는 바람에 지지율이 크게 오르기도 하고 반대로 크게 떨어지기도 하니 뉴스의 힘이 무섭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나에 대해 나쁜 소식을 전하는 언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를 죽여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한 언론사는 리더 전용 수레에 타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고, 또 다른 언론사는 회사를 통째로 나에게 우호적인 재벌 멧돼지들에게 팔아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사는 나를 찬양하는 뉴스만 매일 내보낼 테니 그렇게 되는 날 비로소 술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잠도 편히 잘 수 있을 게 아닌가.


한 해를 보내는 기념으로 전임 리더 멧돼지를 풀어주기로 했다. 사실 그는 리더로 재임하던 시절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만만한 자들 여럿으로부터 삥을 뜯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혔던 것인데, 마음 같아서는 한 10년쯤 더 가둬두고 싶지만 나를 보좌하는 똘마니 멧돼지들 중 상당수가 전임 리더 멧돼지의 심복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눈치를 전혀 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도 물론 아내 멧돼지와 장모 멧돼지가 나를 대신하여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 전임 리더 멧돼지를 딱히 비난할 입장은 못되지만 그를 풀어줌으로써 나라 전체의 일반 멧돼지들로부터 비난이란 비난은 내가 다 받아야 할 처지이니 그게 좀 번거롭다는 것이다. 전임 리더 멧돼지 역시 나의 선처에 감읍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똘마니 멧돼지들과의 회의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날리면' 멧돼지의 말을 몇 마디 섞어 썼다가 괜한 시비에 휘말렸다. 나는 사실 '날리면'이 쓰는 말을 뜻도 모르면서 그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했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 큰 뉴스거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바로 레귤레이션이다. 마켓에 대해서 정부는 어떻게 레귤레이션 할 거냐, 마켓을 공정하게 관리하고 그 마켓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GDP(국내총생산)를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아주 효율적인 시장이 될 수 있도록 공정한 경쟁 체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부가 시장에 대해서 관여하고 개입해야 하는 기본적인 방향이다. (…) 금융기관의 거버넌스가 아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일이다. (…) 2023년에는 그야말로 다시 대한민국, 도약하는 그런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더 아주 어그레시브하게 뛰어봅시다." 나는 아직도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 거버넌스, 어그레시브 등 내가 했던 말들의 의미를 여전히 모르고 있다.


최근에 아내 멧돼지는 밖으로만 나돌고 있다. 물론 나와 아내 멧돼지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고, 필요에 의한 공생관계이긴 하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아내 멧돼지는 나의 권력이 필요하고, 나는 아내 멧돼지의 재력이 필요할 뿐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남들처럼 알콩달콩 사는 모습이 부러운 것이다. 더구나 내일은 인간들이 반기는 성탄절 아니가. 동장군의 기세만큼이나 가슴에는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아, 사는 게 뭔지...'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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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다녀왔습니다
신경숙 지음 / 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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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소설가라는 책무를 다하기 위함인지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 작품에 비해 산문집은 작품 권수가 현저히 적다. 소설가로 등단한 어떤 작가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치중하는 탓에 소설가인지 에세이스트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에 비하면 신경숙 작가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명확히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불미스러운 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등단한 지 40년 가까운 작가가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 하나 없이 홀로 깨끗한 것도 이상한 일, 작가를 아끼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전히 작가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다. 표절을 옹호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표절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얼굴 똑바로 들고 나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신경숙 작가는 꽤나 양심적인 게 아닌가.


"물론 나는 이보다 더 나빠져도 요가를 계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가는 이제 나에게 한끼 식사 같은 것이 되었으니까. 계속 숨을 쉬듯이, 내가 작가이니 계속해서 글을 쓰듯이 요가는 이제 조건 없이 나의 일상이 유지되는 한 계속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  (p.122)


내가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우울한 그늘>을 읽었던 건 딱 10년 전이다. 작가의 소설 작품만 읽어오던 내가 산문집을 읽었을 때의 감회는 새로운 것이었다.(신경숙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소설가라는 책무를 다하기 위함인지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 작품에 비해 산문집은 작품 권수가 현저히 적다. 소설가로 등단한 어떤 작가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치중하는 탓에 소설가인지 에세이스트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에 비하면 신경숙 작가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명확히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불미스러운 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등단한 지 40년 가까운 작가가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 하나 없이 홀로 깨끗한 것도 이상한 일, 작가를 아끼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전히 작가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다. 표절을 옹호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표절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얼굴 똑바로 들고 나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신경숙 작가는 꽤나 양심적인 게 아닌가.


"물론 나는 이보다 더 나빠져도 요가를 계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가는 이제 나에게 한끼 식사 같은 것이 되었으니까. 계속 숨을 쉬듯이, 내가 작가이니 계속해서 글을 쓰듯이 요가는 이제 조건 없이 나의 일상이 유지되는 한 계속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  (p.122)


내가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우울한 그늘>을 읽었던 건 딱 10년 전이다. 작가의 소설 작품만 읽어오던 내가 산문집을 읽었을 때의 감회는 새로운 것이었다.(https://blog.aladin.co.kr/760404134/5263012) 그렇게 나는 강산이 한 번 바뀐 후에 제목도 생소한 작가의 에세이집을 손에 들었던 것이다. 책의 제목인즉 <요가 다녀왔습니다>. 요가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택의 표지에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자가 없었더라면 결코 쳐다보지도 않았을 제목 아닌가.


"나는 체력을 잃고 난 뒤에 자주 심각해지고 좌절에 빠지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물건을 사납게 내려놓고 문을 쾅쾅 닫고 기다림에 인색해졌다. 마구 날뛰는 말 한 마리가 심장 부근에 살고 있다가 어딘가로 내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자책하곤 했는데 요가를 시작하고는 그게 사라졌다."  (p.37)


15년 넘게 요가를 하며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 일상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한 이 산문집은 달라질 것 없는 우리네 일상처럼 지극히 편안하고 단조롭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경숙의 산문집은 <우울한 그늘>이 거의 유일했던 까닭에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의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면서 읽게 되는데 <요가 다녀왔습니다>는 너무나 평이한 문체와 마치 집안에서 입는 일상복의 느낌이어서 독자이자 팬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신경숙 작가도 그렇고 시나브로 나이가 들고 있음이다. 다름을 통하여 남보다 앞서가려 했던 젊은 시절의 마음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다른 작가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평이하고 소탈한 문체를 통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하는 것이다. 작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1인일 뿐이라는 느낌이 글 전체에 배어 있는 것이다.


"소설은 결국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시작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벽돌처럼 쌓으며 나아가야 소설이 완성된다. 앞 문장에 의해서 뒤 문장이 이루어지듯 숨쉬기도 들이쉬기가 있어야 내쉬기로 이루어진다. 복식 호흡을 익혀나가는 일은 숨쉬기가 요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p.141)


아침에 내리던 눈은 낮이 되자 비로 바뀌었다. 우산을 쓰고 하교를 서두르는 아이들이 보이고, 종일 어두웠던 하늘은 다가올 추위를 예고라도 하려는 듯 내내 깊고 우울하다. 요가를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으려는 게 아니라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고 그에 비례하여 늙어가는 자신의 몸에 알맞게 적응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오늘처럼 흐리고 우울한 날엔 나로 하여금 더더욱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뒷산도 이따금 힘에 겨울 때가 있는 걸 보면 나의 몸도 조금씩 기울어가나 보다. 작가처럼 나도 아파트 인근의 요가원을 알아봐야 할까? 그럴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강산이 한 번 바뀐 후에 제목도 생소한 작가의 에세이집을 손에 들었던 것이다. 책의 제목인즉 <요가 다녀왔습니다>. 요가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택의 표지에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자가 없었더라면 결코 쳐다보지도 않았을 제목 아닌가.


"나는 체력을 잃고 난 뒤에 자주 심각해지고 좌절에 빠지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물건을 사납게 내려놓고 문을 쾅쾅 닫고 기다림에 인색해졌다. 마구 날뛰는 말 한 마리가 심장 부근에 살고 있다가 어딘가로 내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자책하곤 했는데 요가를 시작하고는 그게 사라졌다."  (p.37)


15년 넘게 요가를 하며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 일상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한 이 산문집은 달라질 것 없는 우리네 일상처럼 지극히 편안하고 단조롭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경숙의 산문집은 <우울한 그늘>이 거의 유일했던 까닭에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의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면서 읽게 되는데 <요가 다녀왔습니다>는 너무나 평이한 문체와 마치 집안에서 입는 일상복의 느낌이어서 독자이자 팬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신경숙 작가도 그렇고 시나브로 나이가 들고 있음이다. 다름을 통하여 남보다 앞서가려 했던 젊은 시절의 마음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다른 작가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평이하고 소탈한 문체를 통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하는 것이다. 작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1인일 뿐이라는 느낌이 글 전체에 배어 있는 것이다.


"소설은 결국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시작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벽돌처럼 쌓으며 나아가야 소설이 완성된다. 앞 문장에 의해서 뒤 문장이 이루어지듯 숨쉬기도 들이쉬기가 있어야 내쉬기로 이루어진다. 복식 호흡을 익혀나가는 일은 숨쉬기가 요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p.141)


아침에 내리던 눈은 낮이 되자 비로 바뀌었다. 우산을 쓰고 하교를 서두르는 아이들이 보이고, 종일 어두웠던 하늘은 다가올 추위를 예고라도 하려는 듯 내내 깊고 우울하다. 요가를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으려는 게 아니라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고 그에 비례하여 늙어가는 자신의 몸에 알맞게 적응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오늘처럼 흐리고 우울한 날엔 나로 하여금 더더욱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뒷산도 이따금 힘에 겨울 때가 있는 걸 보면 나의 몸도 조금씩 기울어가나 보다. 작가처럼 나도 아파트 인근의 요가원을 알아봐야 할까? 그럴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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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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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참사 시민 분향소에 다녀왔다. 스산한 날씨였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나이의 청년들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정 사진에 걸린 검은 띠만 제거하면 금방이라도 싱그러운 생명력이 되살아날 것만 같은 얼굴, 얼굴들. 제단에 국화꽃을 놓으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사람들과 그들 틈에 섞여 짧은 조문을 마쳤던 나는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의문만 가슴 한가득 품은 채 분향소를 벗어났다. 참사 후 달포가 지나는 동안 마치 비현실적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고 있는 듯한 유가족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의 이쪽 편에서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 시민들. 도로 건너편에는 '정치 선동꾼 물러나라'거나 '윤석열 잘한다'는 현수막을 걸고 유가족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타인의 슬픔을 마치 자신의 슬픔인 양 함께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들. 저들처럼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보인다. 타인의 아픔을 조롱하고 위로는커녕 막말과 욕설을 퍼붓는 인간 말종의 모습을 우리는 그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분향소에서의 감정이 되살아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황시운의 산문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자정이 넘어서야 다 읽었다. 어쩌면 나도 장애를 가진 누군가의 고통을 그저 머리로만 인식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인식의 저변에는 '나는 절대로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오만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책에는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2011년 '제4회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던 작가가 같은 해 봄 추락 사고를 당하여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갖게 되면서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사고가 일어나던 순간을 전후해서 벌어졌던 일들 중 일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수술 후 일정 기간 동안의 일은 선별적으로 기억하고 잇다. 그러나 허방을 딛던 순간 벼락처럼 덮쳐왔던 공포랄지 불안이랄지, 무언가가 쑥 꺼지는 듯한 상실감이랄지, 아무튼 그 순간의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끔찍한 감각은 그로부터 꽤나 오랫동안 눈만 감으면 나를 휘감았다 깜빡 잠이라도 들라치면 찾아오는 추락의 악몽뿐만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수시로 찾아오는 그 감각 때문에 몸서리쳐야 했다."  (p.193)


책은 사고 이후 하반신 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되면서 겼었던 여러 일들을 다룬 1부 '어쨌든 다시 봄', 조카들과 엄마 아빠 등 가족의 이야기를 쓴 2부 '그간에 밀린 이야기들', 사고 후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여러 에피소드를 다룬 3부 '움직여라, 발가락', 그럼에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가 실린 4부 '다시 시작할 산책'과 '작가의 말'로 끝을 맺는다. 작가는 어쩌면 이 한 권의 에세이를 완성하기까지 사고 후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죽음보다 더한 낙담과 고통의 순간들을 일상처럼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 명의 독자인 나는 그 고통의 강도를 1/10도 체감하지 못한다.


"다음날이 되어서도 그 남자가 한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제야 모멸감이 밀려왔다. 남자는 전날 밤의 일을 기억해냈을까. 만약 기억해냈다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했을까. 아니면 별일 아니었다고 생각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까. 나를 이토록 두려움과 모멸감에 빠트려놓고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병신이라니. 병신 같은 년이라니. 재수가 없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그런 끔직한 욕지거리를 한 남자는 물론 그 순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나에게까지 화가 치밀었다."  (p.276)


우리 사회의 약자들은 언제나 시간의 변방에서 살아간다. 현실에서 살아 있지만 그들은 살아 있다는 티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그들에게 되돌아가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조롱이나 욕설일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인 동시에 최고 권력층으로부터 학습된 무언의 명령일지도 모른다. 단식을 하는 참사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하거나 동지섣달의 한파 속에서 자식을 잃고 울먹이는 유가족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인들을 양산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겨울 한파보다 더 시리게 다가온다.


"친구의 말은 정말이지 큰 위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항상 나와 함께 턱을 넘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도 그들도 턱을 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안 되는 것일까."  (p.84)


타인에 대한 공감의 폭이 가면 갈수록 줄어드는 이유를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낮은 독서량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한 개인이 직접체험을 통하여 취득할 수 있는 공감의 폭은 무척이나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독서 혹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한 간접체험이 없다면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체험은 한낱 상상 속의 세상이자 그곳에 사는 외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계인과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뿐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는 경계심 가득한 적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반사회적 인격장애인만 양산하는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입니다.'라는 문구가 정언명령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회, 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그렇게 되는 날 황시운의 산문집 제목은 <당신들이 모두 아는 이야기>로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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