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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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나조차 통제할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독서에 대한 편향성이다.  일상이 바쁠 때에는 오히려 팍팍한 일상을 책에서나마 보상 받으려는 심산으로 가볍고 부드러운 소설이나 시 또는 신변잡기적인 수필에 매료되지만,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여지없이 철학에 빠져들곤 한다.
학창시절부터 시작된 이러한 독서 습관이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졸업 무렵까지 장장 5년을 철학 서적에 묻혀 살았던 기억.  그에 따르는 행동의 편향성(금욕적 스토이즘에 가까운).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당시의 대학생들이 즐겨 출입하던 학사주점이나 당구장 또는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면, 속으로는 늘 '인간 쓰레기' 또는 '밥벌레들'로 치부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대부의 '돈 클레오네'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되어 나만의 세계에서 나와 배치되는 외부적 환경과 싸우곤 했다.  일단 그런 습관에 빠져들면 벗어나는 데만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었다.  그런 까닭에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그런 습관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부던히도 애를 썼었다. 나는 어쩌면 선천적으로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심리학 관련 서적에 넋을 놓아, 나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어느 여행기도 그렇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는 작가가 여행한 여행지의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보다는 내가 현 시점에서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 책을 읽으면서 맛보는 일상탈출의 짧은 휴식이 우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막상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자 결심한 순간에는 전문 웹사이트나 여행 전문서적을 뒤지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하기에 여행기는 일종의 성인들을 위한 동화와 같은 것이다.  큼직큼직한 총천연색 사진과 약간의 감상, 그곳의 역사적 배경을 적당한 지면에 할당하는 작업.  여행작가로서의 임무는 그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신영길이나 오다나처럼 아마추어 여행작가는 절제되지 않은 문체로 자신들의 감정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전업작가에게서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전업작가에게 여행기는  자신의 직업적 특권으로 누릴 수 있는 손쉬운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또는 그녀의) 명성과 역사적 지식을 배경으로 한 권의 책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는 또다른 기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나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계획할 무렵의 작가는 각종 문학상을 휩쓴 소설가로, 교수로, 방송인으로 또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했었다.    소설가로서의 본업에 충실하고자 모든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캐나다 밴쿠버에서 1년을 보내기로 결심한 작가는 비어 있는 일정 동안 시칠리아 여행을 계획한다.  사실 여행이란 장소와 환경만 바뀐 또 다른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에 도착하여 시칠리아로 떠나는 여정에서의 혼란과 시칠리아 북쪽의 작은 화산섬 리파리에서의 평범한 일상.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에서 아그리젠토에 이르는 여러 도시들과 그곳의 사람들, 작가의 감상이 곁들여진 음식과 여행지의 역사적 배경.  절제되고 평이한 문체.
가끔 이러한 여행기를 읽을 때는 옆에서 이국의 지명을 지도에서 찾아주는 비서를 따로 두고 싶을 때가 있다.  낯선 지명이 나올 때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명을 찾고야 마는 내 성미가 독서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보고 들은 진기한 것들'에 더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보태 적는다고 했다.
나는 그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곰곰 생각하고 있다.
작가가 말하는 '잃어버린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두에 잠깐 등장하는 자신의 과거였을까 아니면 많은 지면을 차지했던 여행지의 지난 과거였을까?
아무튼 나는 내가 바라는 소기의 목적이 이 책을 통하여 이루어졌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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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4/유하

    불의 뷔페

 소망교회 앞, 주 찬양하는 뽀얀 아이들의 행렬, 촛불을
들고 억센 바람 속으로 걸어간다 태초에
불이 있나니라, 이후의-

 칠흙의 두메 산골을 걸어가다 발견한,
그 희미한 흔들림만으로도
반갑던 먼 곳의 등잔불이여

 불빛을 발견한 오징어의 눈깔처럼
눈에 거품을 물고 돌진 돌진

 불 같은 소망이 이 백야성을
만들었구나, 부릅뜬 눈의 식욕, 보기만 해도 눈에
군침이 괴는, 저 불의 뷔페 色의 盛饌을 보라
그저 불밝히기 위해 심지 돋우던 시절은 지났다

 매서운 한강 똥바람 속,
촛불의 아이들은 너무도 당당해 보인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정 샹들리에이므로

 風前燈火, 불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
이젠 바람도 불과 함께 놀아난다
휘황찬란 늘어진 샹들리에 주위에 붙은 똥파리

 불의 소망 근처에서
불의 구린내를 빠는 똥파리의
윙윙 날개 바람

 바람 속으로 빽이 든든한
촛불들이 기쁘다 구주 기쁘다
걸어간다, 보무도 당당히, 오징어의 시커먼 눈들이
신바람으로 몰려가는, 불의 뷔페 파티장 쪽으로


 봄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었다.
지금은 영화감독이자 대학 교수가 된 시인 유하의 시가 생각나는 그런 날씨.
서울에 살지 않으니 한명회의 정자가 있었다는 압구정동의 거리를 걸을 수는 없겠다.
바람따라 가슴이 휑한 탓일까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아 이책 저책 책장만 넘기다가 얕으막한 동네 뒷산을 올랐다.
눈 녹은 물이 산길의 낙엽 밑으로 흐르고.....
물기 머금은 낙엽이 자신의 마지막 존재를 알리려는듯 낙엽 내음이 진동한다.
바람에 해묵은 솔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놀란 산새가 홰를 치는 오후.
인적이 끊긴 산길을 그렇게 홀로 올랐다.
오늘처럼 바람 부는 날에는 잊혀진 첫사랑의 기억도 마냥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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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이사온 아파트에는 유난히 어린 아이들이 많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는 나이 지긋한 부부들이 많아서인지 하루 종일 조용한,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이제 이사를 한 지 만 두달이 가까워 오는데 이곳은 아이들 재잘거림이 한시도 그치지 않는다.  주중에는 혼자 지내는 처지이고 보니 가끔 산책을 핑계삼아 외출을 하는데, 내 발길은 번번히 아이들 쪽으로 향한다.  나와 떨어져 아내와 같이 지내는 아들녀석 생각도 간절하지만, 순진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며칠 전이었다.
벤치에 앉아 아이들 뛰노는 모습을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유치원생쯤 된 꼬마에게 그보다 큰 아이들 서넛이 달려들어 강제로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른 된 입장에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강제로 아이들을 그 꼬마에게서 떼어놓았다 싶은 순간, 고마워해야 할 꼬마의 표정도 뭔가 이상했다.  마치 내가 크게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듯 씩씩거리는 게 아닌가.
  "형들이 널 괴롭히지 못하도록 도와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그 표정이 뭐니?"
하고 점잖게 타이르는데 녀석은 어이없다는듯 한마디 툭 내뱉었다.
  "에이, 형들하고 복불복 게임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왜 말려요?"
제법 쌀쌀한 날씨였던지라 혹여라도 감기에 걸릴까 싶어 그들의 행동을 말렸던 것인데 오히려 아이들의 놀이를 방해한 못난 짓이 되고 말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가위 바위 보를 하여 한 명의 술래를 정하고, 정해진 술래에게 나머지 아이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는 것이었다.  우리네 어린 시절에도 그런 놀이가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아이들 노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술래가 정해질 때마다 아이들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튀어 나오는 말이 있었다. 
"나만 아니면 돼!"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순진한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기에 적당한 말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말의 이면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도 괜찮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 말을 어디서 배웠는지 물었다.
아이들은 텔레비젼의 주말 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에서 배웠다고 했다.
평소에 TV 시청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프로그램의 포맷을 알 길이 없었기에 아이들에게 그런 말은 좋지 않다고 이르고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컴퓨터를 통하여 지난 방송분의 몇몇을 보고는 너무 놀랐다.  예능의 특성상 자극적이고 가학적인 장면은 어찌어찌 이해한다 치더라도 최소한 그런 장면을 연출할 때에는 벌칙을 수행하는 사람을 안쓰러워 하는 모습도 같이 보여주어야 함이 마땅한데 그런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 방송의 시간대도 주말의 프라임 타임임을 감안할 때 말도 안 되는 장면이었다.  그것도 1회분의 방송에서 여러번씩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자의 논리만 주입하는 교육환경에서 파급력 높은 지상파에서까지 그 논리를 강화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쩌면 자신의 부모가 병으로 쓰러져도 이렇게 외칠지 모르겠다.
  "나만 아니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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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 칼릴지브란
칼릴 지브란 지음, 강은교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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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학의 정수는 역시 시가 아닐까 ?
소설이나 수필, 희곡이나 평론 등 여타의 다른 쟝르의 문학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전해지는 중저음의 느낌을 글로 옮기려 할 때,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한 막막함.  그렇게 며칠이고 불면의 밤이 지나서 잿더미 속에 묻힌 몇 알의 낱알을 보석처럼 건져내는 것.  하세월이 지난 후 한알 두알 모아진 그 곡식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것.

  이 말들이 비록 모호하다 해도 결코 명백하게 말하려고 애쓰지 말라.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끝이 아니라 시초.
  그러므로 바라건대 그대들 언제나 시초로서 나를 기억하기를.
  생명, 살아 있는 모든 존재란 결정(結晶)으로부터가 아니라 안개 속에서 잉태되어지는 것.

칼릴 지브란이 그의 산문시 <예언자>를 쓸 때 그런 기분이었을까?
정든 고장 오펄리즈 시를 떠나는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이이며, 가장 사랑받은 이, 또한 시대의 여명이었던 예언자 알무스타파.
작가 자신이 직접 전하기에는 너무나 길고 깊었던 이야기들.
한계를 느꼈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 안에 전할 자신이 없었음이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생명이 탄생하고 파괴되는 십이지(十二지)의 약속된 기한.
우주가 순환하는 그 열두 해의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많은 이야기들.  돌아갈 그의 배는 안개에 휩싸여 오고 있었다.
사랑, 결혼, 아이들, 나눔, 먹음과 마심,일, 기쁨과 슬픔, 집, 옷, 매매, 죄와 벌, 법, 자유, 이성과 열정, 고통, 자기 인식, 가르침, 우정, 말하기, 시간, 선과 악, 기도, 쾌락, 미, 종교, 죽음 등 남겨진 사람들의 질문은 끝이 없는데, 이제는 가야할 때.

  어제란 오늘의 추억이며, 내일이란 오늘의 꿈임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대들 속에서 노래하고 명상하는 것은 우주에 별이 흩뿌려지던 최초의 순간, 그 속에 아직도 살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 가운데 누가 그 사랑의 무한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누가 아직 바로 그 사랑을, 무한함에도 존재의 핵심에 둘러싸여져 이 사랑의 생각에서 저 사랑의 생각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사랑의 행위로부터 다른 사랑의 행위로 움직이지도 않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가?
  사랑이 그렇듯 시간도 무한하며, 결코 나누어지지 않고, 자취도 없는 것이란 말인가?

이 책은 화가로, 철학자로, 시인으로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칼릴 지브란의 산문시이며 오펄리즈시에 남겨진 사람들이 떠나는 알무스타파에게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의식주의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종교와 죽음의 근원적 질문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깊은 성찰을 통한 깨달음을 감성적 언어로 전하고 있다.
레바논에서 태어나 서구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하여 '현대의 성서'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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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폭설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했다.
이렇게 가끔 자연은 우리들 앞에 예기치 않은 상황을 펼쳐보임으로써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런 갑작스러움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나 보다.
점심 시간에 나누었던 대화의 전반을 차지했던 것은 갑자기 내린 눈으로 인한 혼란과 자신들이 겪었던 불편함과 의미없는 불평이었다.
내가 "아름답지 않아?  3월에 이런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라고 말했을 때 같이 대화를 나누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졸지에 나는 원치 않았던 이상한 놈이 되고 만 것이다.
"아직도 그런 낭만을 간직하고 있으니 좋겠군."하며 어깨를 치는 사람의 표정에서는 신기한 표정이 역력했다.
심지어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사람의 표정에서도 그와 똑같은 표정을 읽었을 때 나는 새삼 놀랐다.

우리 사회에서(물론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이런 1차원적인 집단적 사고가 관습처럼 굳어 있음을 흔히 보게 된다.
안락과 행복이 최상의 선이며 그외의 것은 악으로 치부하는 고정관념 또는 집단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갈등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이러한 순응적 사고는 지금 겪고 있는 '소통의 부재'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어쩌면 사람들은 생각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의심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고정관념에 묶여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생각을 들으려 하지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화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이나 비열한 속임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M.스캇 펙 박사가 그의 저서에서 썼던 말이 떠올랐다.
부모나 고용주 또는 정부처럼 통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를 위협적인 것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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