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나조차 통제할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독서에 대한 편향성이다. 일상이 바쁠 때에는 오히려 팍팍한 일상을 책에서나마 보상 받으려는 심산으로 가볍고 부드러운 소설이나 시 또는 신변잡기적인 수필에 매료되지만,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여지없이 철학에 빠져들곤 한다.
학창시절부터 시작된 이러한 독서 습관이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졸업 무렵까지 장장 5년을 철학 서적에 묻혀 살았던 기억. 그에 따르는 행동의 편향성(금욕적 스토이즘에 가까운).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당시의 대학생들이 즐겨 출입하던 학사주점이나 당구장 또는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면, 속으로는 늘 '인간 쓰레기' 또는 '밥벌레들'로 치부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대부의 '돈 클레오네'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되어 나만의 세계에서 나와 배치되는 외부적 환경과 싸우곤 했다. 일단 그런 습관에 빠져들면 벗어나는 데만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었다. 그런 까닭에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그런 습관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부던히도 애를 썼었다. 나는 어쩌면 선천적으로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심리학 관련 서적에 넋을 놓아, 나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어느 여행기도 그렇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는 작가가 여행한 여행지의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보다는 내가 현 시점에서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 책을 읽으면서 맛보는 일상탈출의 짧은 휴식이 우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막상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자 결심한 순간에는 전문 웹사이트나 여행 전문서적을 뒤지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하기에 여행기는 일종의 성인들을 위한 동화와 같은 것이다. 큼직큼직한 총천연색 사진과 약간의 감상, 그곳의 역사적 배경을 적당한 지면에 할당하는 작업. 여행작가로서의 임무는 그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신영길이나 오다나처럼 아마추어 여행작가는 절제되지 않은 문체로 자신들의 감정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전업작가에게서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전업작가에게 여행기는 자신의 직업적 특권으로 누릴 수 있는 손쉬운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또는 그녀의) 명성과 역사적 지식을 배경으로 한 권의 책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는 또다른 기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나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계획할 무렵의 작가는 각종 문학상을 휩쓴 소설가로, 교수로, 방송인으로 또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했었다. 소설가로서의 본업에 충실하고자 모든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캐나다 밴쿠버에서 1년을 보내기로 결심한 작가는 비어 있는 일정 동안 시칠리아 여행을 계획한다. 사실 여행이란 장소와 환경만 바뀐 또 다른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에 도착하여 시칠리아로 떠나는 여정에서의 혼란과 시칠리아 북쪽의 작은 화산섬 리파리에서의 평범한 일상.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에서 아그리젠토에 이르는 여러 도시들과 그곳의 사람들, 작가의 감상이 곁들여진 음식과 여행지의 역사적 배경. 절제되고 평이한 문체.
가끔 이러한 여행기를 읽을 때는 옆에서 이국의 지명을 지도에서 찾아주는 비서를 따로 두고 싶을 때가 있다. 낯선 지명이 나올 때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명을 찾고야 마는 내 성미가 독서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보고 들은 진기한 것들'에 더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보태 적는다고 했다.
나는 그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곰곰 생각하고 있다.
작가가 말하는 '잃어버린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두에 잠깐 등장하는 자신의 과거였을까 아니면 많은 지면을 차지했던 여행지의 지난 과거였을까?
아무튼 나는 내가 바라는 소기의 목적이 이 책을 통하여 이루어졌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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