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탐독 - 정성일의 한국영화 비평활극
정성일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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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차안에서 우연히 듣게 된 책속의 한 구절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단순히 그랬다.  우연이 필연으로 만나는 그 한순간이 책과의 인연을 결정했다는 것, 전체 내용이 아닌 짧은 구절이 맘에 들어 책을 펼친다는 것은 지극히 낭만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충분한 근거가 되겠지만, 나는 그 대척점에 서서 무모했던 자신을 비난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에게 쓴 애도의 글.
<정은임의 영화 음악>을 진행하던 아나운서와 게스트의 관계였던 작가가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애잔함을 넘어 짙푸른 울음과도 닮아있다.
"첫 문장은 백번을 고쳐서 다시 써도 도무지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쓸 생각이다.  그것만이 내가 당신을 잠시라도 불러 세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멋지게 쓰려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  슬프다기보다는 그냥 아프다."(P.39)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난 후 두 달 동안 낙타만 그렸다는 작가는 자라서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의 평론가가 되었다.
겉도는 관계로 스쳐 지나쳤을 법한 진행자와 게스트의 자리.  한 진행자의 죽음이 작가를 그토록 저리고 아프게 했던 까닭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에서 그들은 서로 만났고, 서로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경청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는 그 프로의 애청자로서 아직도 고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나의 서평은 여기까지가 다이다.

사실 나는 평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라고 하면 어폐가 있지만 자라면서 평론에 대한  거부반응을 꾸준히 느껴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통합된 작품을 갈가리 찢어 작은 조각마다 메스를 들이대는 해체적 분석은 끔찍하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거만하며 다소 무례하기까지 한 글(평론)을 좋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싶다.  그럼에도 나는 평론을 읽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고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 중심에는 인내하며 끝까지 읽어야 할 필요성의 부재가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영화를 평하는 글은 그야말로 평론을 위한 평론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란 본시 현실 너머의 현실, 현실을 가장한 작위적 실체와 관객의 집단적 환상이 만나는 것인 만큼 평론은 무의미하다.  스크린 속의 스토리는 언제나 환타지일 수 밖에 없고, 관객은 그 시각적 환영에 몰입되어 현실을 잊는다.  영화를 본다는것은 일종의 감독이 만든 마술에 걸려든 관객의 최면 상태, 현실을 사는 관객이 일상의 따분함과 지루함 등 마주하기 싫은 모든 요소를 배제한 기형적 실체를 보는 집단적 광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잣대로 낱낱의 영화적 도구(또는 쇼트)를 분석한다는 것은 그 글을 읽는 독자(또는 관객)와는 거리가 먼 관심 밖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500 페이지를 훌쩍 넘긴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갖고 있는 영화적 소양과 그의 글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흡입력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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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얻은 좋은 습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내 딴에는 꽤 유용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무엇인고 하니 순간순간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는 '어떤 목표로 이것을 하고 있는지' 나의 뇌에 끝없이 각인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에서 '뇌'라는 기관이 가장 능동적이고 부지런한 기관인듯 보이지만, 실상은 이와 달라서 조금만 방심하면 가수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또는 기면증에 빠진 사람처럼 몽롱한 휴식을 즐기는 것이 '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
그야말로 가장 수동적이고, 가장 게으른 기관이 '뇌'인데, 일단 목표가 정해진 일이 생기면 각 기관에 명령을 전달하고는 그저 시간이 흐르는 것을 허락할 뿐,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 수시로 점검해야 하는 책임도 방기한 채 마냥 달콤한 휴식에 빠져버린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게으른 뇌에 매 순간 자극을 주기로 결심한 것인데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는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즉, 순간순간 자신이 하는 일을 인식하고, '살아있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결과는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일 '살아있음'을 '인식'과 같은 단어로 동일시한다면, '살아있지 않음'은 '인식하지 못함'과 같은 뜻이 되고만다.  내 자신이 나를 인식할 수 없는 상태, 즉 살아있되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은 내가 사라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길이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첩경이 될 수 있음이다.
진정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간순간 인식하는 것이다.  게으른 뇌를 자극하여 매 순간 깨어있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잠시의 '죽음' 또는 '수면 상태'에서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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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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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독특한 책이다.
아니, 독특한 사람이라고 해야 옳겠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지만, 자신만의 독서법이 있고, 책에 대한 취향이 있고, 자신만의 독서관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자신의 선에서 끝날뿐이고, 타인이 수긍할만한 독서론으로 인정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날이 책의 매출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여전히 독서 인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만의 독서법과 독서론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지知의 거장’으로 불리우는 작가의 광적인 지적 욕구와 다독과 속독으로 대변되는 그의 독서법은 부러움과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듯하다.
요즘 내가 선택한 독서법과 견주어 볼 때, 나조차도 선뜻 동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지난 날에 읽었던 책 중에 다시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고 있으며, 그 내용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고 있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음악적 책읽기’인데 작가는 이 방법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책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피고 끝까지 읽어야 할 책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여, 도움이 되지 않을 책은 과감히 그만두고, 읽어야 할 책은 빠른 속도로 읽는 ’회화적 책읽기’를 권하고 있다.  나는 그의 독서법을 비판할 의향은 전혀 없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는 작가의 열정이 그저 부러울뿐이다.
  "아마도 끊임없는 삶의 연속선상에서 보는 것,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반복하고 피드백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어느 날 정신적인 비상을 이루는 때가 찾아와 모든 것을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나의 생활을 지탱해 준 기대이자 신념이었다."(P.185)
수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듯 다양한 전문 분야를 넘나들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 더하여진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학창시절 이후 문학이나 교양 서적을 거의 읽지 않고 있다는,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작가의 거침없는 발언이 결코 지적 오만이나 거드름으로 비춰지지 않는 까닭은 그는 이미 평범함을 넘어선 ’비범함’의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리라.
"세상에는 시간이 많은 사람과 너무 바빠서 정신없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시간이 많은 사람 쪽이다.  그리고 출판계의 상당한 부분이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의 시간 보내기용 소비(시간도 돈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을 위한 책이 서평에서도 지속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추세이다."(P.215)
........................(중략)......................................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과 그들이 쓰는 ’맛깔 나는’ 문장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런 사람들이 쓰는 서평은 기본적으로 읽지 않는다.  읽더라도 대충 훑어보며 책 제목은 재빨리 체크하고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읽는 정도이다.  나의 서평은 그렇게 취미로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세상에는 서평을 취미로 쓰는 사람들이 일생 동안 한 번도 펼쳐 볼 일이 없는 책 가운데, 그들이 좋아하는 책보다 몇 배나 귀중한 책이 산더미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P.216)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얼마나 시간이 많은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으로 마음이 내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만의 독서론을 갖게 되기까지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할까' 하는 반성도 같이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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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건강진단을 받았고, 며칠 전 그 결과를 보았다.
결과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  내 본 나이보다 신체 나이가 너댓 살 아래로 나왔으니 말이다.
담배를 끊는다면 0.8세가 더 줄어들 수 있단다.
그러나 그 결과만으로 기뻐할 수도 없는 것이 나도 이제는 가는 글씨를 읽을 때면 안경을 벗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신체 나이가 내 또래의 평균에 비해 조금 좋았다는 것일뿐 모든 신체기관의 노화가 멈춘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렷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자도 마흔을 넘기면서 시력이 나빠졌고, 예순에는 귀마저 어두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마 그랬던 듯하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 예순을 이순(耳順)이라 했다.
시력이 좋다는 것은 장점도 되지만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어차피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보지 못할 바에야 더 작은 것을 남들보다 잘 본들 그 무엇이 달라질까.  오히려 우리는 잘 보게 됨으로써 내것과 네것,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편가름하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자신의 욕심을 키울뿐이다.  공자가 눈이 어두워지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 마흔을 넘기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 시력이 좋을 때는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좇아 많이도 욕심내었었다. 
듣는 것 또한 그렇다.
안 들어도 될 소리까지 자세히 듣는 것은 타인에 대한 미움과 분란만 일으킬뿐이다.
지금도 청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젊은 시절에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제는 알게 모르게 많이 못듣게 되었으리라.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 시력과 청력이 떨어지는 것은 남은 기간 동안 욕심과 미움없이 살다 가라는 신의 섭리가 아닐까?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그나마 밤에는 눈과 귀를 쉴 수 있었는데, 밤도 대낮같이 밝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욕심을 키워왔으며, 또 얼마나 많은 미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공자는 쉰에 이르러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자신의 신체가 점점 쇠락하는 것을 인식하고, 하늘의 섭리를 깨닫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이치인 듯하다.
내가 젊은 시절에 시력과 청력을 낭비하여 욕심을 키우고, 나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그 얼마나 보태었는지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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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매미 소리가 가득하다.
도심에서 듣는 매미 소리는 청량감이 덜하다.  오히려 한여름의 권태 - 李箱의 권태에 내포된 녹색과 그 건너로 보이는 단조로움(문태준의 시) - 를 부추긴다.  그도 그럴 것이 ’찌르르~’하고 큰 소리로 울어대는 말매미 소리는 쉼 없이 쌀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어릴 적 원두막에 누워 듣던 ’매앰~매앰~’하고 울던 참매미나 먼지나는 신작로를 따라 높게 자란 미류나무에서 ’찌울~ 찌울’하고 울던 찌울매미는 도심에서 찾기 어려워졌다.
이솝우화를 보면 매미나 여치는 여름 내내 신선한 그늘에서 노래나 읊다가 추운 겨울날 개미집에 밥 얻어 먹으러 가서 구박을 당하는 부정적 이미지의 곤충으로 비친다. 
대체로 서양에서 매미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엘리어트는 그의 명시 ’황무지’에서 그 황량함을 더하기 위해 매미를 울리고 있고,( 바위사이의 물웅덩이/만약 거기에 단지 물소리만 있었다면/매미소리가 아닌/그리고 마른 풀들의 노래소리) 크리스토퍼 모오리는 ’부숴진 전선의 전압처럼 숲 속에서 매미가 운다’ 했다. 
반면, 에스파냐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로르카는 그의 시 <매미>에서 "매미!/오 행복한 매미!/흙 침대 위에서 너는 죽는다/
빛에 취해서"라고 노래했다.  프랑스 남동부의 프로방스 지방 농민들은 매미가 세르고(sergo) 세르고----- 라고 운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세르고는 라틴어로 ’일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매미는 무더위에 지쳐 나무 그늘에서 쉬고있는 농민들에게 권농가를 불러 주고 있는 셈이다. ’여름이 얼마남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일하라’는 그 매미소리에서 그들은 다시 용기를 얻어 일터로 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서양에서 매미는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다지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긍정적 이미지의 곤충으로 우러름을 받고 있다. 
매미는 석가가 마야부인의 몸에서 갈라져 탄생했듯이 외피로부터 갈라져 나온다 하여 석충(釋蟲)으로 존대 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많은 시인들도 매미를 시의 소재로 씀에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박은숙 시인은 그녀의 동시 <매미>에서 "매미야,/넌 참 좋겠다/하루 종일/실컷 노래할 수 있으니"라고 썼고, 최태준 시인은 매미 소리를 "온몸으로 부르는 영혼의 찬가"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문태준 시인의 시에서서 매미 소리는 여름날의 나른한 정적을 깨트리는 삶의 위안이었다.  문학 평론가 이어령은 한국의 선비들에게 매미는 “감각적 감상이라기보다 은둔자의 생활과 그 심정을 주장하기 위한 이념적 장치”로 활용되면서 “시인의 시선은 혹은 청각은 매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횡단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매미 소리는 도시인의 수면을 방해하는 해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개 삼아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던 순간, 감미로운 자장가를 불러주던 매미 소리는 에어컨이 없어도 그 얼마나 깊이 잠들게 했던가.
잃어버린 전원에의 그리움이 되어버린 매미 소리.
우리의 아이들은 그 그리운 추억마저 추억할 수 없는 도시의 미아로 자란다는 현실이 못내 가슴 아프다.
어느 날 문득, 추억처럼 참매미 소리가 '매앰~ 매앰~"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노래 소리를 들어볼 일이다.  그들은 분명 노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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