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매미 소리가 가득하다.
도심에서 듣는 매미 소리는 청량감이 덜하다.  오히려 한여름의 권태 - 李箱의 권태에 내포된 녹색과 그 건너로 보이는 단조로움(문태준의 시) - 를 부추긴다.  그도 그럴 것이 ’찌르르~’하고 큰 소리로 울어대는 말매미 소리는 쉼 없이 쌀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어릴 적 원두막에 누워 듣던 ’매앰~매앰~’하고 울던 참매미나 먼지나는 신작로를 따라 높게 자란 미류나무에서 ’찌울~ 찌울’하고 울던 찌울매미는 도심에서 찾기 어려워졌다.
이솝우화를 보면 매미나 여치는 여름 내내 신선한 그늘에서 노래나 읊다가 추운 겨울날 개미집에 밥 얻어 먹으러 가서 구박을 당하는 부정적 이미지의 곤충으로 비친다. 
대체로 서양에서 매미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엘리어트는 그의 명시 ’황무지’에서 그 황량함을 더하기 위해 매미를 울리고 있고,( 바위사이의 물웅덩이/만약 거기에 단지 물소리만 있었다면/매미소리가 아닌/그리고 마른 풀들의 노래소리) 크리스토퍼 모오리는 ’부숴진 전선의 전압처럼 숲 속에서 매미가 운다’ 했다. 
반면, 에스파냐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로르카는 그의 시 <매미>에서 "매미!/오 행복한 매미!/흙 침대 위에서 너는 죽는다/
빛에 취해서"라고 노래했다.  프랑스 남동부의 프로방스 지방 농민들은 매미가 세르고(sergo) 세르고----- 라고 운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세르고는 라틴어로 ’일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매미는 무더위에 지쳐 나무 그늘에서 쉬고있는 농민들에게 권농가를 불러 주고 있는 셈이다. ’여름이 얼마남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일하라’는 그 매미소리에서 그들은 다시 용기를 얻어 일터로 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서양에서 매미는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다지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긍정적 이미지의 곤충으로 우러름을 받고 있다. 
매미는 석가가 마야부인의 몸에서 갈라져 탄생했듯이 외피로부터 갈라져 나온다 하여 석충(釋蟲)으로 존대 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많은 시인들도 매미를 시의 소재로 씀에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박은숙 시인은 그녀의 동시 <매미>에서 "매미야,/넌 참 좋겠다/하루 종일/실컷 노래할 수 있으니"라고 썼고, 최태준 시인은 매미 소리를 "온몸으로 부르는 영혼의 찬가"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문태준 시인의 시에서서 매미 소리는 여름날의 나른한 정적을 깨트리는 삶의 위안이었다.  문학 평론가 이어령은 한국의 선비들에게 매미는 “감각적 감상이라기보다 은둔자의 생활과 그 심정을 주장하기 위한 이념적 장치”로 활용되면서 “시인의 시선은 혹은 청각은 매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횡단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매미 소리는 도시인의 수면을 방해하는 해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개 삼아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던 순간, 감미로운 자장가를 불러주던 매미 소리는 에어컨이 없어도 그 얼마나 깊이 잠들게 했던가.
잃어버린 전원에의 그리움이 되어버린 매미 소리.
우리의 아이들은 그 그리운 추억마저 추억할 수 없는 도시의 미아로 자란다는 현실이 못내 가슴 아프다.
어느 날 문득, 추억처럼 참매미 소리가 '매앰~ 매앰~"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노래 소리를 들어볼 일이다.  그들은 분명 노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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