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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ㅣ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평점 :
봄의 등등한 기세에 눌려 겨울 한기가 무르춤한 오후, 두툼한 겨울 코트가 부끄러웠던 나는 코트를 벗어 손에 거머쥐고 걸었다. 그냥 주기 아까운 봄 햇살이 사방으로 쏟아지고, 햇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의 흥겨운 몸짓에는 도톰한 행복이 걸려 있었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한계를 뚫고 나온 아이들의 먼 시선이 향하고 있는 미래를 향해 나도 모르게 잠깐 한눈을 팔았었나 보다. 그것도 잠시 관성처럼 서둘러 현실로 되돌아온 나는 서경식의 유작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읽었다.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삶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자신이 쓴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었던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다만 그가 남긴 몇 권의 책들만 덩그러니 남아 화려한 책의 표지에는 삶의 덧없음을 먼지처럼 덧씌우고 있을 뿐이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 B 씨는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비행기에서 먹어."라며 오늘 아침 삶았다는 달걀을 대여섯 개 건네줬다. 언젠가 내가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게다. 그때의 감각이 30년 후에 되살아났다. 거꾸로 말하면 60대 중반을 지난 내 자신이 뜻하지 않게 30대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젊다'고 해서 반드시 즐겁고 기쁜 거산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어쩐지 어색하고 미숙하며, 가시가 돋혀 있으며, 더할 나위 없이 고독하기도 하다. 그런 감각까지 맨해튼에서 되살아났다. 30년 전의 나는 광기와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갈림길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지인들도 적지 않다. 그때 나는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B 씨는 지금도 건강할까. 그때의 일을 생각해낸 것도 호퍼의 작품이 가진 힘 때문이다." (p.41)
80년대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옥고를 치르던 형들의 구명운동을 위해 방문하였던 미국. 2016년 3월,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미국은 많은 게 변해 있었다. 소수자를 향한 차별적인 언행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자로 부상하고, 다양성이라는 가치보다 미국을 최우선으로 하는 '단일'을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저자는 달라진 미국의 낯선 환경에서 자신을 돕기 위해 선뜻 다가와주었던 많은 이들과의 추억을 되살리며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진실'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과 소회를 쓰고 있다.
"진심으로 재능을 인정하던 형이 이런 말, 이를테면 '평생토록 짊어졌던 무거움'에 짓눌린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테오는 형의 유작전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형이 죽고 나서 반년 후 신경쇠약으로 세상을 등졌다. 모마의 컬렉션 중 가장 유명하다고 말해도 좋을「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저 아름답다기보다는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나는 두 형이 옥중에 있었을 때도, 30년이나 지난 지금도 "너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라는 "가차 없는 고발"(사카자키 오쓰로, 「고흐의 유서」, 『그림이란 무엇인가』, 가와데쇼보신사, 2012년(초판 1976년))에 몸을 내던지는 심정으로 이 그림 앞에 서 있다." (p.163)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났던 서경식. 그의 글은 언제나 디아스포라의 고독과 약자에 대한 공감, 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유려한 문체를 통해 책을 읽는 우리로 하여금 예술 감상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삶과 예술이 거리를 둔 채 서로 완벽히 분리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우리에게 예술도 역시 삶의 일부일 뿐이라며 우리를 예술로 이끄는 것이다. 예술과 우리의 삶 사이에 흐르는 깊은 강물에 손수 돌다리를 놓아주면서 말이다. 그의 다정한 손길을 잡고 걷다 보면 음악이나 그림 등 우리가 소홀히 했거나 등을 돌린 채 데면데면 지내왔던 작품믈이 거리를 좁히며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그런 까닭에 서경식의 글에 매료된 독자라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그의 책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단절된 미국은 쇠퇴의 길을 차근차근 밟으며 전락하는 중이다. 다만 이 단말마의 고통은 오래 지속되면서 수많은 부패와 파괴를 거듭하며 인류 사회에 심대한 손상을 입힐 것이다. 미국이(그리고 세계가) 변한다는 것은 그 정도로 멀고 험난한 길이다." (p.251 '맺음말' 중에서)
그냥 주기 아까운 봄 햇살이 사방으로 쏟아진다. 나는 그 햇살 속을 거닐며 이름도 생경한 어느 예술가의 삶과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듣고 있다. 고인이 된 작가 서경식은 나의 질문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있는 여러 예술가들이 궁금하다. 에드워드 사이드, 디에고 리베라, 벤 샨, 로라 포이트러스...... 생경한 이름들을 나는 하나하나 되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