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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유감
이기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12월
평점 :
한 국가의 민주화를 가늠하는 척도는 각 언론사의 논조에 달려 있다. 예컨대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나 그의 측근에 대한 찬양이나 우호적인 기사를 쓰는 신문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라면 그 나라는 분명 독재 국가이거나 독재화가 진행되는 국가임이 분명하다. 반면에 권력자를 자유롭게 비판하거나 권력자를 희화화하여 유쾌한 조롱 거리로 삼는 언론이 다수라면 그 나라는 분명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각국의 자유민주주의지수(LDI)를 기반으로 민주주의 순위를 발표하는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의 자료를 비교할 것도 없이 말이다. 참고로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현재 독재화가 진행되는 국가 중 한 곳으로 발표되었다.
올해는 1974년 박정희 군부독재에 맞서 외쳤던 10‧24 자유 언론 실천 선언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게다가 1975년 3월 17일은 동아일보가 자유 언론 실천 운동을 하던 기자‧PD‧아나운서 등 130여 명을 무더기로 해고한 날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작금의 대한민국 언론 환경이 정상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물론 내가 언론계에 근무하는 것도 아니요, 가족이나 친척 중 누군가가 언론과 관련 있는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한 국가의 발전에 있어 언론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걸 알기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 뉴욕에서 'ㅏ이든 날리면' 발언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주변 기자들에게 다 함께 들어보자고 한 것이 '바이든 날리면' 사태로 번졌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발언을 부인하면서 최초 발견자인 나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권력의 외압보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전‧현직 기자들의 태도였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자들은 중립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차갑게 거리두기를 하고,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했다. 나에게 가짜뉴스를 퍼뜨렸다고 비난을 퍼붓던 기자들이 오히려 가짜뉴스를 만들어 나를 공격했다. 언론 자유를 입버릇처럼 외치던 기자 출신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진실을 흐리며 언론을 탄압했다." (p.9 '프롤로그' 중에서)
MBC 기자 이기주를 전 국민이 아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비난하는 정권이었다. 나 역시 대통령실이나 보수 언론의 적대적인 비난이 없었더라면 이기주라는 이름 석자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마지막 도어스테핑 현장에서 비서관과의 공개 설전으로 인해 이기주 기자를 알게 되었고, 그가 쓴 기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나토 정상회의 순방길에 민간인 신분의 여성 신모 씨를 동행했던 사실을 특종 보도하기도 했고, 미국 뉴욕 순방 동행 취재 중 비속어 논란 발언을 최초로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퍼스트 펭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그토록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느냐고 묻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는 윤석열 대통령이 살아 있는 권력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윤석열의 사전에 내로남불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정치인 윤석열의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p.54)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대기업에 다니던 자신이 갑작스럽게 기자의 길로 전향하게 된 사연과 기자가 된 이후의 여러 사건들, 그리고 기자로서의 소명의식이나 각오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드는 생각이겠지만 요즘처럼 소위 '기레기'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의문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용기'나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자 역시 한 가정의 가장이자 직업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고사는 문제는 저자 역시 피하기 어려운 과제였을 터, 이 모든 사태에 두려움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나는 어느 날 길을 걷다 곤봉과 방패를 목격한 우연한 계기로 기자가 됐다. 그동안 실망과 좌절도 많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자의 힘을 의심하지 않는다. 언론 탄압과 줄 세우기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권력 감시의 현장을 지키는 기자들, 그리고 힘든 여건에도 발주 기사가 아닌 발굴 기사로 거대 기득권과 싸우는 용기 있는 기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 싸움 끝에 무엇보다 큰 기득권인 기자 권력의 벽도 함께 해체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p.215 '에필로그' 중에서)
역사는 종종 몇 사람의 용기와 말도 되지 않는 우연이 만나 크게 뒤틀리곤 한다. 사람의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우연과 결부된 갑작스러운 결단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꾸곤 한다. 저자가 광우병 시위 현장에서 목격한 곤봉과 방패로 인해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말이다. 1975년의 오늘은 동아일보가 자사의 언론인 130여 명을 무더기로 해고했던 날, 이기주 기자가 쓴 <기자유감>을 읽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 아닌가. 게다가 '기레기'들이 판을 치는 요즘의 언론 환경에서 이기주 기자와 같은 참 언론인이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올봄 첫 황사가 유입되었다는 오늘, 어제까지 포근하기만 하던 날씨는 봄바람과 함께 급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