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네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편지로 남겼었지.
사람의 기억은 쉽게 잊혀지고 좋은 생각은 무시로 떠오르니 그때마다 잊지않고 종이쪽에 적고 시간을 내어 다듬는 것이 쉽지만은 않더구나.  
게다가 나의 게으름이 수시로 훼방을 놓아 한동안 손을 놓는 일이 다반사란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네게 대화로 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단다. 
나의 말을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삶의 고비를 한번도 겪지 않은 네가 지금 꼭 들어야 할 말도 아니기 때문이지.  
먼 훗날 나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할 때, 지금 쓰는 나의 편지가 네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뿐이란다.

아들아

알고있니?
그동안 너를 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단다.
그것이 비단 여기에서 그칠 일은 아닐테지만, 그간의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너는 내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이 되어 주었단다.
그뿐이겠니.  
나의 잘못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바로잡아 준 것도 실로 너의 도움이라고 말할 수 있단다.
너의 행동이 내게는 무언의 스승이었던 셈이지.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구나.

아들아

너와 떨어져 살면서부터 너의 하루하루가 늘 궁금했단다.
저녁에 주고받는 전화통화에서 나의 궁금증을 속시원히 해결해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걸 알고 있니?  어제 일어난 일이나 몇시간전에 있었던 일도 너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
너의 말투를 빌리자면 이랬단다.  "글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나는 그런 너의 모습이 한없이 좋았단다.  지금 사는 이 순간에 집중할뿐 흘러간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 모습은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꿈꾸던 삶이었단다.
어제의 통화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오는구나.
학교에서 남들은 이미 다 받은 어린이날 선물을 너만 못 받고 있다가 어제서야 받았다고 내게 말했었지.  나는 속으로 한참을 웃었단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네게 줄 선물을 받으러 오라는 것을 너는 까맣게 잊고 있지는 않았니?  너의 관심을 끄는 다른 일에 너는 넋을 놓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단다.  너 혼자 뒤늦게 받은 선물이 다른 아이들보다 몇배의 기쁨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니?  그렇게 잘 잊는 네가 필요한 것들은 너무도 자세히 기억하는 것을 볼때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단다.  어쩌면 그리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별하는지...

아들아

지금의 네 모습을 앞으로도 잘 간직하렴.
지난 일들 중에 꼭 기억해야 하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단다.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 여행에 올라 타렴.  그리고 네가 맞는그 순간을 맘껏 즐기렴.
지난 일을 되새기고, 다가올 미래를 염려하며 보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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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아침을 먹고 혼자 산책을 나섰단다.
잔뜩 흐린 하늘과 바람이 부는 날이었지.
그 길에서 나는 노란 산수유꽃을 만났지.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꽃망울을 터트리는 가녀린 산수유꽃이 얼마나 장하던지.....
오늘은 네게 그 꽃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단다.
믿지 못하겠다고?
그래.  세상엔 가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곤 한단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수화기를 통해 멀리 떨어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한번쯤 생각해 보았다면 너는 분명 기적을 믿는 것이란다.


아들아

산수유꽃에게 물었단다.  매년 봄철 한때 잠시 피었다 지는 것이 지겹지 않느냐고.
너무 유치한 질문이었지?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아주 많이 부끄러워 했단다.
  "우리는 순간을 나누어 영원을 얻는 것이랍니다.  벌과 나비에게 꿀을,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에게 향기와 아름다움을.  이런 것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죠.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얻는답니다.  우리가 주는 것에 비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우리는 매년 그 신비에 감탄한답니다.  당신네 인간들은 오히려 순간적인 것에 탐닉하고 영원한 것을 멀리하더군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알고 있는 이 자연스러움을 인간 중에는 지혜로운 자만 그리 한다고 들었어요."

 
아들아

나는 사랑, 믿음, 기쁨, 행복, 관심, 우정 등 영원한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반평생을 보냈는데 이것이 보편적 진리였다는 사실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단다.
어쩌면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 자리를 주었던 하느님이 몹시 후회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더구나.
삶은 화려할수록 금세 사라지는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평범한 것에 삶의 신비는 자신의 모습을 꽁꽁 숨기곤 하지.
어느 책에선가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는 것이지만 관계마저 끝내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는구나. 



아들아 


순간적인 것을 많이 나누렴.
순간적인 것을 탐하면 탐할수록 소중하고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한단다.
나의 아들은 순간을 미련없이 주고,  영원을 얻는 삶을 살았으면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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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

이런저런 문제로 고민이 많으신 할머니께서는 홀로 성당에 가셨고, 늦은 아침을 먹는 내내, 한없이 가라앉는 나를 느꼈었단다.

그래서일까?

너는 조용히 일어나 베란다로 향하더구나.

유리창에 길게 이어지는 빗줄기 너머, 네 시선은 도망치듯 아주 멀리 달아났었지.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에서, 오전내 너는 책만 읽더구나.

물끄러미 네 얼굴만 한참을 바라보았단다.

'아! 네 얼굴에 투영되는 그 고운 마음결이 어쩌면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감탄했단다.

시시각각 변하는 너의 표정에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지.

나는 화장실로 향했단다.

화장실 거울에는 잔뜩 굳은 내 얼굴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단다.

 

아들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몸만 굳어가는 것이 아니란다.

마음 결결이 피어나던 그 많은 표정을 함께 잃는 것이란다.

마음을 숨기며 어색하게 굳어지는 나.

나는 그렇게 교육받았단다.  그렇게 나의 몸은 마음과 차츰 멀어졌단다.

몸은 자라는데 마음은 한없이 작아지고 있음을 나는 미처 몰랐었구나.

 

 

아들아

 

네 마음이 맘껏 즐길 수 있는 곳은 너의 얼굴이란다.

네가 너른 들에서 네 몸을 키우듯이, 마음이 자라는 네 얼굴을 고이 간직하렴.

마음이 숨쉬는 그 공간을 결코 잃어서는 안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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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어제는 네가 유치원을 졸업한 날이었지.

졸업식에 가지 못하는 나는 하루 종일 너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금 섭섭하지 않았을까?’ 걱정했단다. 

꽤 많은 아빠들이 졸업식에 참석했었다는 말을 너의 엄마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얼마나 미안했던지.....

반에서 가장 큰 꽃다발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는 너의 말은 내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단다.

지난 설 연휴에 너와의 짧은 산책에서도 피곤하지 않겠냐며 나를 먼저 걱정했었지.

어느새 너는 마음마저 훌쩍 자라있더구나.

너와의 지난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시간에 비해 턱없이 짧은 기억은 아쉬움만 더하였단다.

 

아들아

 

어떤 일의 말미에 서면 지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시원섭섭함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이 교차하곤 하지.  어쩌면 약간의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슬쩍 동행할지도 모르겠구나.

네 나이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단다.

너는 아무개의 엄마가 특송을 했는데 어떻게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신기했다는 것과 송사와 답사를 누가 했었다는 것과 저녁에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와 같이 탕수육을 먹으러 나갔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았겠니?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너를 생각하면 대견함과 함께 그 빡빡한 생활에 내가 먼저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구나.

너는 그저 새로 산 가방과 옷과 신발에 마냥 즐겁기만 한데.....

 

아들아

 

자란다는 것은 새로운 규칙을 하나씩 덧붙이는 것이란다.

늘어난 규칙이 때로는 힘들고 지치게 하더라도 불평없이 견디렴.

그럴수록 더욱 잘 지키려 노력하면 네 몸은 자연스레 따라가는 법이란다.

갈등과 고민은 네 머리 속에 있는 규칙과 네 몸이 분리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란다.

네 몸이 익숙해지면 규칙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지.  오히려 규칙을 잊고 자유로워짐을 느낄 수 있단다.

기억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의 첫번째 졸업식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비된 자의 지나친 욕심이겠지?

 

아들아

 

너의 졸업과 곧 있을 입학을 생각하며 프랑스의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말을 적어보고 싶구나.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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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오후들어 바람이 점차 강해지는 날이었지.

오전 내 집안에 있던 네게 밖에 나가 자전거를 타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었을 때 너는 집에서 종이접기를 하거나 책을 읽고싶다 말했지.

아빠는 그때도 알고 있었단다.

일단 밖에 나가면 다시 들어오기 싫어할 거라는 걸.

네가 크면 다 알게 되겠지만 공부는 머리에 지식만 넣는 것이 아니란다.

공부는 끝없는 인생의 사막을 건널 때 나침반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거란다.

그러자면 하나의 나침반으로는 너무 위험하단다.

가장 튼튼하고 멋진 나침반을 너의 머리에 간직하더라도 만일을 대비하여 네 손에도, 발에도, 가슴에도 하나씩 준비하면 좋지 않겠니?

네가 종이접기를 잘 하는 것도 네 손에 또 다른 나침반을 준비하는 일이란다.

네가 "파랭이"라는 애칭을 붙여준 파란 자전거를 열심히 타면 네 발에는 또 하나의 나침반이 생겨나겠지.

"아빠, 이런 날 이불 속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편안해지는 기분 아빠도 알아?"

했을 때 아빠는 알았단다.  마음이 향하는 곳을 잘 알고있는 너는 가슴에도 하나의 나침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하나의 나침반이 고장나 못쓰게 되더라도 네가 준비한 또 다른 나침반이 너를 안전한 오아시스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는단다.

 

아들아

사막의 밤은 몹시 춥단다.

따뜻한 밤을 지새려면 모닥불이 필요하겠지.

너에게 따뜻한 모닥불이 되어주는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란다.

사막을 걷다가 길 잃은 사람을 만나거든 가만히 너의 나침반을 건네주렴.

그러면 차가운 사막의 밤에도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따뜻하게 아침을 맞을 수 있는 거란다.

 

아들아 꼭 기억하렴.

사막을 건널 땐 둘 이상의 나침반과 믿음직한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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