껑충하게 큰 개망초의 여린 꽃대가 바람에 흔들린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듯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듯 서글픈 마음이 북받친다. 고향, 어머니, 소식도 없는 어릴 적 친구... 바람은 그렇게 꽃대 무성한 개망초의 군락에서 장난꾸러기 어린애처럼 한참을 머물다가 가겠노라는 인사도 없이 조용히 스러지곤 했다. 비가 예보된 하늘에는 서서히 먹구름이 몰려들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서둘러 비를 피하려는 듯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끈적끈적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어제보다는 한결 낮아진 기온.


조지 오웰이 쓴 <카탈로니아 찬가>를 다시 읽고 있다. 조지 오웰은 사실 소설보다는 신문기사와 논평에 더 특화된 인물인 듯 생각되지만 <동물 농장>이나 <카탈루니아 찬가>에서 보이는 그의 문학적 재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조지 오웰을 좋아하는 독자 중에는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겠지만 말이다. 둘러치든 메치든 조지 오웰의 탁월한 글솜씨가 나와 같은 사람의 평가에 의해 달라지는 건 전혀 없겠지만, 아무튼.


내가 <카탈루니아 찬가>를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24일 이스라엘에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 공격을 즉각 중단하라고 명령하고 가자지구에 대한 대규모 인도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이집트와 통하는 라파 검문소를 개방하는 한편 현장 상황 조사를 위한 제한 없는 접근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있다. 25일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야 인근의 대피소가 드론 공격을 받아 어린이를 포함해 최소 10명이 숨졌다는 CNN 방송의 보도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잔인성은 히틀러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제 사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몇몇 나라가 등장했을 뿐이다. 노르웨이, 아일랜드, 스페인이 그들 국가이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3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학살했음에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해 미국의 대학생과 유럽의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지진? 중국의 기근? 멕시코의 혁명? 걱정 말라. 내일 아침이면 현관에 우유가 놓여 있을 것이고, 금요일에는 <뉴 스테이츠먼>이 나올 것이다. 산업 도시는 멀었다. 연기와 궁핍의 얼룩은 지구 표면의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 알던 영국 그대로였다. 철로 때문에 파헤친 곳은 야생화로 덮여 있다. 외진 풀밭에서는 윤택한 빛을 발하는 준마들이 풀을 뜯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흐르는 냇가에는 버드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느릅나무의 녹색 가슴, 오두막 정원의 참제비고깔, 이윽고 런던 외곽의 드넓고 평화로운 광야, 진창 같은 강물 위의 짐배, 낯익은 거리, 크리켓 시합과 왕족의 결혼을 알리는 포스터, 크리켓 투수 모자를 쓴 남자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 빨간 버스, 파란 제복의 경찰관.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는 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카탈로니아 찬가' 중에서)


껑충하게 큰 개망초의 여린 꽃대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라고 썼던 조지 오웰의 판단은 현대의 작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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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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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몇 마리가 낮게 날고 있다. 먹이를 찾아 공원의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비둘기. 그 사이로 이제 막 걸음마를 습득한 듯한 아이가 비둘기를 쫓아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고 있다. 잔디밭에 사뿐히 내려앉는 비둘기. 비둘기를 붙잡으려는 듯 한 손을 길게 뻗고 잔디밭으로 향하는 아이의 손을 젊은 엄마가 낚아채고 있다. 아이는 제 뜻에 반하는 엄마의 손길을 뿌리치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떼를 쓰는 일이다. 아이는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에 털썩 주저앉는다. 젊은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이를 들쳐 안는다. 흐린 하늘은 손에 잡힐 듯 낮게 드리웠고, 아이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비둘기 떼는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가벼운 날갯짓을 한다. 비둘기의 날갯짓 때문인지 시간이 부드럽게 흐른다.


윌라 캐더의 소설 <루시 게이하트>를 읽었던 건 어젯밤, 나는 그때의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곰곰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 사람의 이름이 소설의 제목으로 올랐을 때, 소설은 결국 비극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이후 그 비극의 강도는 점차 약해지고 소멸하여 현대인에게 비극의 서사는 그닥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게 되었거나 비인기 장르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어디 한번 이 책을 읽어볼까' 하고 가볍게 마음먹는 단계까지도 꽤나 오랜 시일이 걸렸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책은 나의 선입견이 별것 아니라는 듯 처음에 들었던 생각을 가볍게 밀어 제친 후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단 한 번도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책의 두께가 얇았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깊은 사유가 깃든 문장들이 소설 곳곳을 장식하여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루시는 생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사랑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카만 물처럼 인간을 집어삼키는 열정을 발견했다. 이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바깥세상이 어둡고 끔찍한 곳인 것만 같았다. 세상이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된 것 같았다."  (p.36)


사람은 본디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 이를테면 외모, 건강, 부모의 재산 등은 단지 자신의 운에 의해 취득된 것일 뿐 개인의 노력에 의한 정당한 대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혜택으로 인해 오만해지거나 타인의 노력을 무시하는 등 주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나라 모 재벌의 2세가 소위 '멸콩' 놀이를 하며 재산을 탕진하고 기업 경영을 어렵게 만들었음에도 반성은커녕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 '너나 잘하세요. 별 미친놈 다 보겠네' 하는 말로 대응을 하지 않던가. 이 책의 주인공인 루시 역시 다르지 않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명랑하고 예쁜 외모의 루시는 여섯 살 때 엄마를 잃고 12살이나 많은 언니 폴린의 손에서 컸다. 그런 루시를 아빠는 마냥 예뻐만 했던 터라 루시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버릇이 남아 있었다. 생업으로 시계 수리를 하면서 동네 음악대를 지휘하고 클라리넷 교습도 하는 루시의 아버지. 고향을 떠나 시카고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던 루시는 성악가 서배스천의 보조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것은 어쩌면 아내가 있는 서배스천을 사랑하게 된 루시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고장에서 성장한 해리 고든의 사랑을 뿌리친 것도, 사랑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와 젊은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도 결국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삶이자 운명이었다.


"열정과 맹렬함, 앞뒤 살피지 않고 하나의 충동에 자신의 온 존재를 오롯이 불태우는 성정, 바로 그것이 그가 루시에게서 발견한 경이였다. 루시는 감정의 불씨가 붙으면 불화살이 되어 끝까지 날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세월이 흐르자 그는 마음속 어둠에 익숙해졌다. 다리를 잃은 사람이 의족을 달고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p.227)


정의롭거나 우직한 것은 아니지만 불행으로부터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삶을 되짚어 보면 그런 순탄한 삶의 이면에는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인의 성향과 자신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적당한 행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 해리 고든의 운명이 그러했다. 루시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 불행을 향해 돌진하지는 않았다. 루시가 죽고, 그녀의 언니 폴린이 죽고, 시계 수리공이자 해리의 유일한 체스 상대자였던 루시의 아버지마저 죽은 후에야 비로소 해리 자신의 삶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동경하기를 그만두고 기억하기를 시작하자 삶이 시작되었다."라는 캐더의 유명한 문장처럼 말이다. 해리는 이제 동경을 멈추고 기억하는 삶으로 접어든 것이다. 현실에서 그것은 무력한 듯 보이지만 결코 위험하지 않은, 해리와 같은 사람에게는 꽤나 어울리는 삶의 방편일지도 모른다.


"'고향'이 무엇이겠나, 결국 실망을 겪고 참아내는 법을 배우는 곳 아니겠나? 게이하트 가족이 살던 집을 떠나는 길,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잠시 보도에 멈춰 서서 지금껏 수천 번은 족히 그랬던 것처럼 세 개의 작은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달아나려는 발자국을."  (p.236)


비둘기를 쫓던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제지하던 젊은 엄마도 보이지 않는다. 비둘기의 날갯짓 때문인지 시간은 부드럽게 흐르고, 흐린 하늘은 여전히 정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공원에는 여전히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주인이 던진 공을 쫓아 강아지 한 마리가 사력을 다해 내달리고 있다. 삶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공을 쫓아 무작정 잔디밭을 내달리는 저 강아지의 삶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둘기를 잡으려던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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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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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나 과학사를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에 대한 인류의 지배력이 가장 강하고 그로 인하여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20세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하고 묻는다면 글쎄요? 하는 물음표가 달릴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주식 격언에도 있는 것처럼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니까요. 인류의 힘이 가파르게 상승했던 20세기를 지나쳐 온 우리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맞닥뜨릴 시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물론 AI와 같은 초자연적인 과학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퇴장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며칠, 고인이 되신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를 읽는 내내 나는 문득 지난 1세기의 의미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크고 작은 분쟁도 많았고, 지역에 따라 생존의 위기에 처한 나라도 있었지만, 지구 전체로 볼 때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안정된 시기를 보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와 같은 힘의 밑바탕에는 어쩌면 다정함이나 사랑과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불쑥 들었던 것입니다.


"다만 깊이 사랑하는 모자 모녀끼리의 눈치로, 어느 날 내가 문득 길에서 어느 여인이 안고 가는 들국화 비슷한 홑겹의 가련한 보랏빛 국화를 속으로 몹시 탐내다가 집으로 돌아와 본즉 바로 내 딸이 엄마를 드리고파 샀다면서 똑같은 꽃을 내 방에 꽂아 놓고 나를 기다려 주었듯이 그런 신비한 소망의 닮음, 소망의 냄새 맡기로 내 애들이 그렇게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P.381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중에서)

그렇습니다. 20세기를 주로 살았던, 말하자면 20세기 토박이 작가인 박완서는 그녀가 썼던 어떤 글에서도 어머니 손길과 같은 다정함이 묻어나곤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주된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의 온도를 가장 섬세하게 포착한 작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려한 수사나 기발한 표현이 눈에 띄지는 않지만 시대의 정서를 잘 포착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기 작가가 갖추어야 할 최대의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까닭에 작가는 불혹이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판단이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닐 테지요.

"나는 용감하게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나는 그가 주저앉는 걸 봄으로써 내가 주저앉고 말 듯한 어떤 미신적인 연대감마저 느끼며 실로 열렬하고도 우렁찬 환영을 했다. 내 고독한 환호에 딴 사람들도 합세를 해 주었다. 푸른 마라토너 뒤에도 또 그 뒤에도 주자는 잇따랐다. 꼴찌 주자까지를 그렇게 열렬하게 성원하고 나니 손바닥이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P.172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중에서)

박완서 작가의 애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작가의 삶을 비교적 길게 지켜보았던 나로서는 그녀의 글을 예사로 읽기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하나뿐인 아들마저 허망하게 잃었던 작가가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보였던 절절했던 심정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천주교 신자인 작가가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있어야 해.'라고 썼던 당시의 피폐했던 삶과 끝내 그것을 극복하고 '이 세상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썼던 작가의 고백을 나는 마치 내가 겪은 일인 양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의 글에는 언제나 사랑이 넘쳤습니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사랑이 있는 시대, 사랑이 있는 정치, 사랑이 있는 역사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고로 우리는 사랑이 있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 역사에 사랑이 개입해 본 적이 있나요. 우리 정치사에 사랑이 있어본 적이 있나요?"  (P.158)


21세기를 갓 시작한 우리는 정말 주변의 사랑을 모두 잃은 채 엄혹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뭐니 뭐니 해도 정치권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대의 작가들 중 많은 이들이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잃고 극단적인 편가름과 서로에 대한 증오만 키우는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국민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대 '자유주의 세력과 동료 시민'으로 양분하여 내 편이 아닌 자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학계나 예술계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박완서 작가는 어쩌면 사랑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스스로를 사랑의 장으로 이끌었던 21세기의 마지막 작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직 증오와 파멸뿐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서막은 그렇게 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제 현실이 아닌 교과서에서나 배울 수 있을 듯합니다. 단지 한 권의 책을 통하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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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잔혹동화 속 문장의 기억 Andersen, Memory of sentences (양장) - 선과 악, 현실과 동화를 넘나드는 인간 본성
박예진 엮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원작 / 센텐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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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말보다는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 아닐까 싶다. 사실 자신의 인생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는 데는 어떤 유명인사의 말도 있겠지만 자신이 존경하는 어떤 인물, 즉 '롤 모델'의 역할이 크다. 그런 까닭에 누군가를 감화시키는 말보다는 모범이 될 만한 누군가의 행동, 더 나아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이 각자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되는 셈이다. 백 번의 말보다는 열 번의 시범이, 열 번의 시범보다는 단 한 번의 체험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모범이 되는 행동을 선보이는 훌륭한 부모를 가졌을 리 만무하고, 인생의 목표를 세울 만한 감동적인 체험을 할 기회가 모든 아이들에게 주어질 리도 만무하다. 그러므로 시간이 더디고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할지라도 누군가의 말에 의한 교육은 비교적 공평하고, 개인이 노력만 한다면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겠다.


"안데르센은 특히 인간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글들을 여러 편의 동화로 발표했습니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많은 상처를 받은 만큼, 다른 아이들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교훈을 주고자 그런 잔혹동화를 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가 이런 잔혹동화 속 숨은 의미를 알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겪어 가며 다시 부모가 된 뒤에야 잔혹동화 속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을 깨닫게 되겠지요. 어쩌면 이마저도 인생의 풍파를 다 겪은 후에서야 동화 속 주인공들이 현실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테니까요. 그게 우리들의 인생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p.12~p.13 '프롤로그' 중에서)


북 큐레이터이자 고전문학 번역가인 박예진 작가가 쓴 <안데르센, 잔혹동화 속 문장의 기억>은 Part. 1 '인간을 파멸시킨 욕망 잔혹동화', Part. 2 '목숨과 맞바꾼 사랑 잔혹동화', Part. 3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마법 잔혹동화', Part. 4 '사유에 묻히게 하는 철학 잔혹동화' 등 총 4부로 나누어 각 파트에 각각 네 편의 잔혹동화를 배치함으로써 전 세계에서 오늘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안데르센의 명작 열여섯 편이 등장한다. 책에는 제목만 들어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어공주',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빨간 구두' 등도 있지만, '부시통'과 같은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동화도 실려 있다.


"sentence 280

Everything has its beauty, but not everyone sees it. The difference in appearance doesn't matter, as long as you have a good heart.

모든 것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보지는 못하죠. 외모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훌륭한 마음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p.221)


이 책은 어쩌면 이제 막 인생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책은 아닐지도 모른다. 동화의 전체 스토리를 뚝 떼어 놓은 채 '인생 그 자체가 가장 훌륭한 동화이다.'라는 동화 속 문장을 이해하기에는 아이들의 인생 경험이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동화 속에 내재된 특별한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 오직 재미 하나만으로도 안데르센의 동화에 한껏 빠져들 수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을 지닌 누군가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새기는 평화로운 시간을 갖게 하는 그런 풍경이 그려지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다 자란 어른이 아이의 시점으로 되돌아가 안데르센의 동화를 매개로 인생의 의미를 곰곰 되짚어보는 책인 셈이다.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음으로써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를 찾고 존중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을 겁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그의 동화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들은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p.266~p.267 '에필로그' 중에서)


가난한 환경으로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까닭에 꿈을 포기해야 했고, 양성애적 애정 문제로 인해서 실연의 상처를 오랫동안 안고 살아야 했던 안데르센. 불행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경험들이 오히려 삶의 은유로 가득한 아름다운 동화를 탄생하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삶의 밑바닥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인간을 현혹하는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된 삶의 진실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었던 인간의 욕심, 절제되지 않는 욕망, 쉽게 부서지는 인간의 허영심 등은 어른들에게 주는 안데르센의 따끔한 교훈인 셈이다. 나는 박예진 작가의 저서 <안데르센, 잔혹동화 속 문장의 기억>을 읽는 내내 안데르센으로부터 각성의 회초리를 맞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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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 잤으면 하는 너에게 - 고단한 하루 끝, 숙면 기원 에세이
미내플(유민애) 지음 / 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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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피곤이 아침 기상시간에 몰리던 시기가 있었다. 아침을 먹고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 혹은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만 하는 그 짧은 시간에 쌓인 피로가 집중되다 보니 시간을 넘겨 더 잘 수만 있다면 나의 운명을 악마의 유혹에 팔아넘길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나 장점도 있었다. 잠에서 빠져나오는 게 힘들 뿐 일단 정신이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뿐했고 하루를 별 탈 없이 잘 보낼 수 있었다. 단지 일어나는 순간이 힘들었을 뿐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일과에서 쌓인 피로가 저녁 귀가 시간에 집중된다. 밖에서 일을 마치고 일단 귀가하면 그때부터 만사가 귀찮고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해진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싫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언제나 그렇듯 습관처럼, 뇌 속에 주입된 일과의 반복이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것처럼 하루를 거뜬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시기가 지나고 좀 더 나이가 들자 하루의 피로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동행이 자연스러운 불치병처럼 말이다. 피로가 풀려 개운하다거나 가뿐하다는 느낌은 옛날 옛적의 동화 속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일주일의 피로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주말 시간에 더 깊은 피로감으로 몰려온다는 점이다. 친척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행사에 참가하느라 쉴 시간이 없었던 주말이면 다음 주에 견뎌야 할 시간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진짜 휴식을 취하려면 지금 머릿속에 가득한 걱정부터 내려놓자. 물론 그게 얼마나 힘든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걱정에 휩싸일 때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져 시간만 흘려보내곤 하니까. 그러나 걱정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는 몸의 긴장이 풀릴 수 없다. 휴식답게 휴식할 수 없다."  (p.30)


자기계발 유튜버이자 고민 상담가로 잘 알려진 미내플(유민애) 작가의 저서 <오늘도 잘 잤으면 하는 너에게>를 택배로 받았던 건 어제 오후.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던 나는 나도 모르게 후루룩 다 읽고 말았다. 작정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고 이 책의 내용이 가볍다거나 한 번 빠르게 읽고 구석으로 던져버려도 되는 그런 책도 아니다.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불면증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 저자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맞춤 처방전을 제시함으로써 같은 시기를 통과하는 젊은 세대에게 큰 도움이 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에 이어 1장 '고단했던 하루 끝, 나를 보듬는 시간', 2장 '나를 괴롭혔던 건 너일까? 나일까?', 3장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해 볼 것'에 이어 에필로그 성격의 '땡스 투'로 끝을 맺고 있는 이 책은 각 장의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젊은 시절에 공통적으로 겪을 수 있는 일과 관계, 그것으로부터 오는 여러 고민들과 불면의 나날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저자 자신이나 주변의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인해 여러 날 잠들지 못하고 피곤에 절어 다른 문제까지 야기하는 불상사는 막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물론 해결하지 못한 어떤 문제로부터 매번 도망치거나 문제를 회피하라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꾸준히 동력을 잃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계기로 삼는가가 중요하다. 일을 끝까지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시한폭탄 같은 불안을 동력으로 삼는다. '패배자가 될까 봐', '남들이 무시할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듯 자신을 몰아붙인다. 몸과 마음의 근육이 제대로 단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안감에 불을 지핀다면, 머지않아 번아웃으로 향하는 지름길로 가게 될 것이다."  (p.163)


어떤 특정한 고민은 그 시기가 지나면 유효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고민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셈이다. 결혼을 하지 못했거나 때를 놓친 채 50대가 된 사람이 있다면 결혼은 이제 그에게 큰 고민거리가 되지 못한다.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가벼운 주제로 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효기간이 존재하는 이런 고민들은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다. 종국에는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죽음'도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음을 나는 책을 통하여 배웠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의 바이오리듬도 변하고 젊은 시절처럼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던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만, 숙면의 가장 큰 적이라는 고민을 적절히 조절하고 해결하는 일은 내게도 필요한 듯 보인다.


"내 문제를 어떻게든 마주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때, 내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나아가려고 노력할 때, 내 주변 사람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때, 오래 울기를 그만둘 때 세상은 언제나 더 또렷해졌다."  (p.215)


피곤해서 저녁 일찍 취침에 들었지만 이유도 없이 새벽에 깨서 다시 잠들기 위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눈은 더 한층 말똥말똥해지고 잠은 구만리 밖으로 달아나는 날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낮에 활동량을 늘리고, 햇빛을 쪼이는 시간을 늘려도 소용이 없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고 있음이다. 피곤은 이제 익숙한 배우자처럼 상시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나는 미내플 작가의 책 <오늘도 잘 잤으면 하는 너에게>를 뒤적이며 찡한 마음으로 '더 좋은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야' 마음속으로 내게 깊은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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