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의류 수거함 - 제3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0
유영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따금 한가한 시간이 찾아와도 멈출 줄 모르고 쉼 없이 작동하는 나의 뇌를 생각할 때 조금 걱정이 되곤 합니다.  마치 방전된 자동차가 '푸르륵 푸르륵'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 정적 속에 농밀한 절망만을 남겨둔 채 멈춰버리는 것처럼 나의 뇌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머릿속의 상상이나 걱정들은 대체로 쓸데없는 것들이어서 적어도 한가한 시간에는 나의 뇌도 육체와 함께 편히 쉬었으면 좋으련만 무슨 궁리가 그렇게도 많은지...

 

모처럼 맞는 한가한 오후를 『오즈의 의류수거함』을 읽으면서 보냈습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낯선 불청객이나 느닷없이 벌어지곤 하는 특별한 사건이 나의 오후를 방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쌓여 독서를 하려니 책의 내용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모래알갱이들처럼.  어쩌면 현실을 비껴간 작가의 작위적 구성이 약간의 거부감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대략 이렇습니다.  외고 입시에 낙방하여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도로시(본명), 구제 의류숍을 운영하는 마녀(닉네임), 자발적으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숙자 씨, 식당을 하는 마마, 탈북 새터민 카스 삼촌, 자살을 꿈꾸는 195.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뭉텅뭉텅 사라져가는 행복과 급기야 칼날 위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슬픈 자화상.

 

이야기는 독서실에서 늦은 귀가를 하던 도로시가 의류수거함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수거함 속으로 다 들어가지 않은 멀쩡한 스키니진을 발견한 도로시는 마치 득템한 기분이었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장비를 갖춰 동네의 의류수거함을 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의류수거함 속에는 옷만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버려진 강아지 토토를 맡길 데가 없어 구제 의류숍을 운영하는 마녀와 가까워지고 그녀에게 수거한 옷을 넘기게 됩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도로시가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거나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수의사 부부였던 숙자 씨는 구제역이 창궐하였을 때 가축 살처분 현장에 있었고, 그의 아내는 그 트라우마로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 후로 숙자 씨는 홀로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게 됩니다.  마녀를 통하여 알게된 마마는 유능한 자동차 딜러였습니다.  도박 중독자였던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과 함께 바쁘게 살아가던 어느 날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학교 폭력을 견디지 못한 아들은 집 근처의 건물 옥상에서 투신을 했던 것입니다.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마마는 아들이 숨진 옥상에 식당을 차렸습니다.  탈북을 하다 다리에 총을 맞았던 카스 삼촌은 도로시처럼 의류수거함을 털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도로시는 카스 삼촌과 구역을 나눠 옷을 수거하기로 약속하고 마녀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줄거리는 도로시가 누군가의 일기장과 상장 뭉치, 사진첩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그 물건들로부터 자살의 분위기를 감지한 도로시는 그 물건을 버린 사람을 찾기 위해 끝없이 시도합니다.  195번 의류수거함 위에 올려 놓은 책 속에 메모지를 끼워 놓음으로써 대화는 이어지고 결국 그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자살을 막아보려는 도로시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195는 결국 미국으로 마약 중독 치료를 받으러 떠나게 되지만 그 전에 도로시와 함께 의류수거함을 돌며 옷을 수거합니다.

 

"숙자 씨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  왜 그렇게 195의 일에 매달리느냐는 숙자 씨의 물음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숙자 씨에게는 단순히 자살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195의 존재가 이미 내 속에 깊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나의 세계로 들어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뚜벅뚜벅, 소리나게 걸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바람처럼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있다.  내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들어서는 사람도 있다.  195는 어어, 하는 사이에 쑤욱 내 속으로 들어왔다."     (p.118)

 

그렇게 밤의 세계에서 우연처럼 만난 사람들은 끈끈한 정으로 연결되어 갑니다.  폐지를 주워 손자들을 돌보는 할머니를 위하여 집에 보일러를 놓아 주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면서 부자 마을의 의류수거함을 터는가 하면 각자가 모았던 돈도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여태껏 살아오며 이렇게 자존감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항상 1등만 해온 너는 이런 내 심정을 잘 이해 못할 거야."  195는 정면을 응시한 채로 힘없이 웃었다.  "자존감이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그 대신 자존심이 자리하고 있지."  "그것들의 차이가 비슷한 거 아닌가?"  "그렇지 않아.  굳이 설명하자면 자존감은 포용이란 토양에서 자라나고 자존심은 경쟁이란 토양에서 자라나지.  자존감이 이타심이란 열매를 맺는 반면, 자존심은 이기심이란 열매를 맺어."  나는 195가 너무나 쉽고 간단한 설명으로 나를 이해시켜준 데에 크게 감탄했다."    (p.218~p.219)    

 

사실 이 소설 속의 이야기는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현실에서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이 몇 달씩 의류수거함을 털 수 있다는 것도 있을 수 없거니와 정기적으로 옷을 수거해 가는 허가 받은 업자가 그것을 모를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작가가 의도했던 것은 아마도 의류수거함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고등학생인 도로시가 미처 몰랐던 세계를 경험하고 나눔을 베품으로써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주제를 다르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에 지식을 우겨넣음으로써 현실과 점점 멀어지는 부작용을 겪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것도, 부자로 살고 싶은 욕심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도 모두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죠.  내가 매일 들르는 식당 아주머니가 오늘 "수고하세요." 라는 나의 인사에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과 라일락 꽃의 향기가 어제보다 조금 옅어졌다는 것과 공원의 등나무 넝쿨에 꽃이 피고 있다는 것 등을 생생히 느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우리가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상상의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런 생각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이 사람 이거 순전히 날로 먹으려고 하네.  책을 뭐 이따위로 설렁설렁 썼지?'하는 생각 말이다.  하루키의 에세이집이 대부분 신변잡기를 늘어놓은 가벼운 것들이어서(물론 아닌 것도 있다.  작가가 유럽을 여행하며 쓴 <먼 북소리>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하루 중 절반 이상의 시간 동안 인상을 쓰며 지내는 사람이라면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읽기에 앞서 한번쯤 정신과 상담을 받기를 권하고 싶다.  의사로부터 '정신적으로 아무 이상 없다'는 소견서를 받은 사람만 읽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왜냐하면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분명 반쯤 미친 놈으로 보일 테니까.

 

앞에서 말한 하루키 에세이집의 특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책을 꼽으라면 최근에 출간된 <더 스크랩>이 아닐까 싶다.  이건 뭐 숫제 에세이집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다.(특히 한국 에세이스트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 정도가 더 심할 듯.)  가까운 친구들을 일개 분대쯤 집으로 불러서는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이기도 하고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던 유명 연예인의 가십을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기사라도 되는 양 입에 침을 튀기며 말하는 사람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가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무척이나 쉽게, 즐기면서 썼음을 실토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짧은 글들은 1982년 봄부터 1986년 2월까지 약 사 년에 걸쳐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연재한 글이다.  연재하는 걸 싫어하고, 어떤 글이든 일 년 이상 계속 쓰면 질리는 체질인 내가 <넘버>에 장기 연재를 한 것은 예외 중의 예외다.  어째서 이렇게 오래 썼는가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다.  먼저 한 달에 한두 번 <넘버>에서 미국 잡지며 신문을 왕창 보내준다.  보내주는 것은 <에스콰이어> <뉴요커> <라이프> <피플> <뉴욕> <롤링스톤> 등의 잡지와 <뉴욕타임스> 일요판이다.  나는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긴다.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그걸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쓴다.  이것으로 한 편 끝.  어떤가요, 즐거워 보이죠?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거저먹기였다."    (p.4)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가 대부분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로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의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집도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격하게.  왜냐하면 하루키의 에세이집은 개콘을 보듯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 심각할 겨를이 없다.  때로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기도 한다.  아마도 나는 앞에서 제시했던 정신과 상담을 빼먹었기 때문이리라.  책에는 <스타워즈의 츄바카>라는 제목의 꼭지가 있다.  갑자기 <스타워즈>에 열광하는 아들 녀석 생각이 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새삼 깨달았는데 원숭이 츄바카 캐릭터가 정말로 귀여웠다.  어디가 귀여운가 하면, 츄바카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므고오"라든가 "아구"하는 정도로 대부분 소통을 마친다.  나 역시 그 정도의 단어로 볼일을 보면서 때때로 제국군과 공중전을 하며 인생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p.105~p.106)

 

작가는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수필집에서도 그의 관심사를 빠트리지 않는다.  음악(특히 재즈), 영화, 소설, 섹스, 애완동물, 마라톤 등이 그것이다.  나는 이따금 '하루키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시시한 글들을 쓸까?'하는 생각과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책을 나는 도대체 왜 읽을까?'하는 의문에 빠지곤 한다.  그럼에도 내가 하루키의 수필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어떤 작가도 하루키처럼 쓸 수 없다는 데 있다.  예컨대 그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와 같은 사람이 피에트 몬드리안의 대표작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을 보면서 '저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루키가 쓴 '쉬워 보이는' 글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는 점은 참으로 신기하다.

 

"특히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여름의 에게해는 그야말로 섹스의 도가니 같다.  대낮부터 거리 한복판에서 아베크족들이 위장까지 닿을 정도로 딥키스를 한다.  뭐 별로 상관없지만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정말로 육식동물이라는 느낌이 든다.  특히 개트윅 공항에서 단체로 우르르 몰려오는 영국 펑크 소년소녀들의 기세는 엄청나서, 성기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로큰롤이라도 할 것 같다."    (p.94)

 

그러나 내가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결국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는 듯하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과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벗겨놓고 보면 다 오십 보 백 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도 마음속 밑바탕에는 그런 철학이 깔려있는지도 모르겠다.  간혹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그저 '시간 죽이기' 용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하루키를 몰라도 한참 몰라서 그런 것이다.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읽는 내내 유쾌한 기분에 휩싸이다가도 다 읽고 나면 문득 심각해지곤 한다.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를 보면서 무작정 웃을 수만은 없는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육체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내가 인간을 육체적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짝짓기가 필요했던 청년기 이후로는 아마 없었던 듯합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육체적 질병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죠.  나란 놈에게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책에 등장하는 위인이나 세미나에서 만난 지식인, 혹은 성당의 미사나 사찰의 법회에서 만난 종교인에게서 아름다움을 느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저란 놈은 참으로 특이한 족속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경계에서 춤추다』를 읽으며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서경식 작가와 타와다 요오꼬 작가에게 신뢰를 넘어선 아름다움, 즉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에세이스트 서경식과 일본 소설가 타와다 요코꼬가 열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주고 받았던 편지를 모은 책입니다.  편지글이 갖는 은근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주였다면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두 작가는 '남과 여'라는 이질적인 성별과 10여 년의 나이차가 나는, 속물적 시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그런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작가는 그들이 나누었던 열가지의 주제에 대해 지성인으로서의 폭 넓은 사색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고고한 기품을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여행'을 주제로 나누었던 두 작가의 편지 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툭 하면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만, 그것은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닙니다.  '거주'를 찾아 헤매는 방랑과도 같은 것이죠.  나이와 더불어 여행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져갑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다 한들,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저에게는 일상의 '거주' 또한 여행 같은 것이니까요."    (p.68 서경식이 타와다 요오꼬에게)

 

"오늘날 세계는 인터넷을 통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철도에 의한 이동은 육체의 이동입니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수천 킬로미터나 옮겨놓는 것이죠.  이것은 이른바 집필활동이 서재 안에 갇혀 있는 무엇이 아니라 무대예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일본어가 고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언어를 그 내부에 포함하는 까닭에 온갖 언어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의 형태로부터 또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움직여가는 운동 자체에 창작활동이 있는 것이고 또한 이동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탐구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일지도 모릅니다."    (p.75~p.76 타와다 요오꼬가 서경식에게)

 

이 편지들은 재일교포 2세 작가로서 2006년 4월부터 2년 동안 한국에 머물렀던 서경식 작가와 1960년 일본에서 태어나 1982년 이후 독일에 거주하는 타와다 요오꼬 사이에 오고갔던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위에서 짧게 인용한 글만으로는 내가 느꼈던 감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두 사람의 편지가 마치 서로 다른 악기 두 대가 화합하여 멋진 앙상블을 이루는 협주곡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언어가 사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았을 때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구나! 하는 느낌도 함께 말입니다. 

 

두 저자의 사유의 방향은 서로 합치 되기도 하고 때론 어긋나나거나 교차하기도 하는데, 이는 생생한 소통의 현장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이를 통해 고정된 관념을 깨뜨리고 또 다른 사유의 길로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집, 이름, 여행, 놀이, 빛, 목소리, 번역, 순교, 고향, 동물 등의 열가지 주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시하고 그에 화답하면서 또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이렇게 엮여가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목소리에 대하여 쓴 타와다 요오꼬의 말은 재밌습니다.

 

"저는 얼굴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음성이나 말할 때의 리듬, 언어 선택 등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드는 편인데 같은 사람이라도 다른 언어를 말하면 이미지가 싹 바뀌어버리기도 해서, 나는 정말로 이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일까 싶어 불안해집니다."    (p.130)

국적, 성별, 세대가 모두 다른 두사람이 ‘언어(소통)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두사람이 지니고 있는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가진 재일조선인인 서경식은 스스로를 ‘모어라는 감옥의 수인’이라 규정해왔으며, 타와다 요오꼬 역시 일본인 여성 지식인이지만 1982년부터 지금까지 독일에서 수십년간 살면서 독일어를 제2의 모어로 삼아 살아가는 이민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모어와 투쟁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사유하기를 희망하는 두 작가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나는 아름다운 두 지성인의 사유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정확히 오후 3시경이었나 봅니다.  흐린 하늘에 휙 긋고 지나가는 빗줄기.  창유리로 맥없이 떨어지던 빗방울.  바람이 불고 지난 가을의 마른 낙엽이 스산하게 흩날렸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섞바뀌는 계절의 빈 자리에서 고독처럼 머물렀습니다.  이 순간에도 삶의 가장 밑바닥을 밟고 있는 어느 예술가의 고독한 외침이 들릴 것만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것이 예술입니다.  피를 토하지 않는 예술은 다 거짓처럼 보일 뿐, 한 점 감동도 전하지 못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는 워낙 유명하여 그림에 무지한 저도 몇 번이나 읽고 보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화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문학가요, 명철한 철학자였던 듯합니다.  그가 그린 그림의 기저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색의 물결들이 암반처럼 자리했겠지요.  그러나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았던 예술가의 삶을 더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화가 이중섭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제가 이중섭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미술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 소개된 그의 그림을 보았을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황소>였지요.  국어 교과서에도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 한 편이 소개되었던 듯합니다.  저는 그때 선생님이 일러주신 대로 받아적었을 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어떠한 호기심도 없었던 듯합니다.  제 머릿속에는 그저 이중섭이라는 이름이 서 푼짜리 지식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우연처럼 손에 잡았을 때, 저는 그저 서 푼짜리 지식에 약간의 윤기를 더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가벼운 지식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도 큰 것이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그렇듯  그도 시대의 우울함을 온 몸으로 겪어낸 듯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에 두고 그가 견뎌야 했던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그림에 대한 희구와 갈망은 제가 읽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무척이나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말할 것도 아닌 것이 고흐의 그림이 사색과 순간적 느낌, 자연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되었다면 이중섭의 그림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태현, 태성에 대한 그리움과 순수, 강한 생명력에서 비롯되었던 듯합니다.

 

"나만의 사람, 마음의 사람인 남덕이여!  나는 당신의 편지와 그립고 그리운 아이들과 당신의 사진을 기다리고 있소.  지금은 싸늘하고 외로운 한밤중, 뼈에 스미는 고독 속에서 혼자 텅 빈 마음으로 있소.  그림도 손에 잡히지 않아 휘파람,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시집을 뒤적이기도 하오.  당신의 편지가 늦어지는 걸로 보아 혹시 당신이나 아니들이 감기로 눕지나 않았는지요?"    (p.121)   

 

책에는 유화, 수채화, 스케치, 구아슈화, 은종이 그림 등 이중섭의 대표 작품 90여 점과 더불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이중섭이 일본에 있던 아내 이남덕(마사코) 여사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이남덕 여사가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 이중섭이 결혼 전 마사코에게 띄운 그림엽서 등이 담겨 있t습니다.  놀라운 것은 남존여비의 사상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당시에 이중섭의 편지는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하나 숨김 없이 적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요즘의 연인들이 쓰는 연애편지도 이보다 더 뜨겁고 열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하나하나의 문장이 미려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가장으로서의 심경, 고생하는 아내에 대한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복합된 감정이 그의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겠지요.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다른 사람은 무엇을 사랑해도 상관이 없소.  힘껏 사랑하고 한없이 사랑하면 되오.  나는 한없이 사랑해야 할, 현재 무한히 사랑하는 남덕의 사랑스러운 모든 것을 하늘이 점지해주셨소.  다만, 더욱더 깊고 두텁고 열렬하게, 무한히 소중한 남덕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열애하고, 두 사람의 맑은 마음에 비친 인생의 모든 것을 참으로 새롭게 제작 표현하면 되는 것이오."    (p.128)

 

이중섭의 그림은 엄혹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이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의 기도요, 단란한 가정을 꿈꾸었던 절실한 소망일 것입니다.  비록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삶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림 속에서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꿈을 꾸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며 현실의 고단함을 위로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5-03 17:15   좋아요 0 | URL
멋집니다^^

꼼쥐 2014-05-06 17:2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그릿 Grit - 잠재력을 실력으로, 실력을 성적으로, 결과로 증명하는 공부법
김주환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아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공부'와 관련된 서적에 저절로 손이 가거나 한동안 시선이 머물곤 합니다.  이럴 때 드는 생각은 '나도 별수 없이 대한민국의 학부형이구나' 하는 자괴감입니다.  주말부부로 지내다 보니 아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그리 많지 않은데 말입니다.  괜한 욕심만 키우는 셈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조바심에서 읽게 되는 것이 또 '공부'에 관한 책입니다.  이 정도면 병적인 집착이지요? 참으로 구제불능입니다.

 

그렇게 읽게된 책이 김주환 교수의 <그릿>입니다.  <회복탄력성>으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김주환 교수 바로 그분입니다.  사실 '공부'에 대한 책은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이 시중에 나와 있는지라 어떤 책이 좋고, 어떤 책이 그저 그런 책인지 구분조차 하기 어렵지만 초등학교 이상의 자녀를 둔 부모라면 새로운 책이 출간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 것 또한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자신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책에 비해 비교적 솔직하고 체계적으로 쓴 책인 듯 여겨집니다.

 

"선유(작가의 딸)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도 나는 꼭 일류대학에 갈 필요는 없으며, 심지어 대학을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선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진심이냐고 되물었고, 나는 정말 진심을 담아 얘기했다.  이는 나의 개인적 신념이기도 하다."    (p.125)

 

사실 이런 책을 한두 권 읽다 보면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릅니다.  아이들마다 타고난 재능도 제각각이고 자라는 환경도 각기 다른데 일률적으로 어떤 법칙이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책이 꾸준히 팔리는 걸 보면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불안감이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구나 하는 딱한 마음도 듭니다.  어쩌면 저도 그 중 한 사람에 속하겠지만 말이죠.  딸을 서울대 경영대에 입학시킨 저자에게 특별한 공부 비법 하나쯤 배워볼까 싶어 이 책을 읽었던 저로서도 딱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비인지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릿(grit)이다.  그릿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위해 꾸준히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릿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위해 열정을 갖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이다.  그릿은 스스로에게 동기와 에너지를 부여할 수 있는 힘, 즉 '자기동기력'과 목표를 향해 끈질기게 전진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조절하는 힘, 즉 '자기조절력'으로 이루어진다."    (p.84)

 

책은 총 5개의 장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공부를 둘러싼 오해와 착각  2. 그릿, 성취의 원동력  3. 그릿을 시작하는 힘, 자기동기력  4. 그릿을 완성하는 힘, 자기조절력 5. 시험 잘 보는 법, 그릿을 발휘하라  부록: 서울대 경영대 합격생 선유가 말하는 공부전략 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의 학창시절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블로그에서도 두어 번 말한 적이 있지만 저는 비교적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이 책의 기준으로 본다면 공부와는 거리가 먼, 절대로 공부를 잘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이었죠.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그런 날이면 항상 가족들에게 폭력을 일삼았고, 그게 두려웠던 저는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같은 동네의 친구집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습니다.  위로 있었던 형과 누나들은 일찍부터 아버지를 피해 도시에 나가 학교를 다니거나 취직을 한 상태였고, 저와는 나이차가 있는 어린 여동생과 저는 무지비한 폭력을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했었죠.

 

그 끔찍했던 시절에 저의 유일한 소망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의 빈곤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자식들이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순간부터 학교는 이제 그만 다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받았던 장학금으로 중학교를 그럭저럭 다닐 수 있었고, 중학교 2학년 무렵 형들이 있던 도시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해방의 순간이었죠.  저는 그때부터 지독하게 공부만 했던 것 같아요.  밤 11시에 잠들어서 새벽 2시에 일어나는 강행군을 끝까지 버텼었죠.  2시에자명종 시계를 맞춰 놓으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어요.  2시에 자명종이 울리면 혹시나 곤히 잠든 형이 깰새라 단박에 일어나곤 했었죠.  2시부터 5시까지 책을 읽고 5시에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 안치고는 자취방 근처의 산을 휘감고 도는 우회도로를 따라 전력질주하듯 1시간을 뛰었습니다.

 

사실 저는 어려서부터 체력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장염으로 죽음의 문터까지 갔었죠.  당시의 저는 자신의 한계까지 저를 몰아붙였던 셈입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도시락을 싸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등교하여 남들처럼 수업을 받은 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밤 11시까지 책을 읽고 잠을 자는 반복적인 생활.  학원 수강은 고사하고 참고서 살 돈도 없어 친구의 문제집을 베껴서 수학문제를 풀거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이면지를 얻어 연습장으로 쓰곤 했던 힘겨운 나날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누나와 학교 선생님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입시를 치른 후 장학금 때문에 서울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지금도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4년제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형의 등록금과 저의 용돈을 벌기 위해서 낭만적인 대학생활은 즐길 수 없었고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어찌 버텼나 싶은 세월입니다.

 

제 얘기가 자랑질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공부에 관한한 저는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아요.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저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설명을 연습장에 빠르게 받아 적으면서 암기와 집중을 동시에 해결했었습니다.  말을 글씨로 받아 적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속기사도 아닌데 말입니다.  선생님 얼굴을 보면서 연습장에 글씨를 쓰는 저만의 방식은 수업 내내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시 보기 위해 그랬던 건 아닙니다.  그러나 효과는 만점이었죠.  시험을 치를 때 그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으니까요.  굳이 시간을 들여 복습을 할 필요도 없었구요.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생각과 달랐던 점은 더러 있었지만 바로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계획을 짤 때는 '이만큼 하면 많이 하는 거지 뭐.'라는 한계를 두는 대신,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많은 공부량을 전제로 한 계획을 세워보자.  그러고는 불도저처럼 밀어붙여라.  일별 계획을 세워놓고 목표량을 달성할 때마다 자신이 지킨 것을 펜으로 지우면서 뿌듯한 성취감을 느껴보라.  그럴 때마다 자신과의 투쟁에서 싸워 이긴 듯한 뿌듯한 승리감을 만끽할 것이다."    (p.240)

 

이 부분에서 저는 저자의 생각과는 다르게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의지가 부족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십중팔구 며칠 지나지 않아 계획표 쓰는 것마저 그만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계획과 실천 결과는 늘 엇나가기 때문이죠.  오히려 '최소한 이만큼은 하자.'라는 식으로 최소 학습량을 계획하면 실천 결과와 계획이 맞아떨어져 게획을 세우는 본인 스스로도 놀랄 것입니다.  그때부터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을 테구요.

 

장황한 얘기를 늘어놓았네요.  아무튼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독서를 좋아한다는 것과 체력이 좋다는 것이겠지요.  독서와 체력이 우선순위에서 빠진 공부 관련 책이라면 읽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의 공부를 지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어쩌면 공부 방법의 선택도, 부모의 확고한 신념도 일정 부분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4-04-03 23:39   좋아요 0 | URL
아들에게도, 학생들에게도, 꼼쥐님 겪어오신 얘기를 해주시는게 그 어떤 책보다 더한 가르침이겠어요.
저 역시 지금도 공부에 관한 이런 책들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간답니다. 아마 해결못한 어떤 아쉬움이 무의식중에 남아있기 때문인가봐요.
공부법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서 저도 제 아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자신있게 말 못하겠더군요.

꼼쥐 2014-04-04 20:45   좋아요 0 | URL
제 주변에서 보더라도 자신만의 확고한 주관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잘 보지 못하겠더군요. 늘 휘둘리고 말이죠. 이 방법이 좋다 하면 이 방법으로, 저 방법이 좋다 하면 저 방법으로, 그렇게 시간만 보내는 게 현실인 것 같아요. 아이들이 공부 방법을 실험하는 마루타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