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지른 모유
시쿠 부아르키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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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의무가 지배하는 일상의 촘촘한 시간 너머로 휴식처럼 드문드문 비가 내렸다. 뭘 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나 목표도 없이 빗줄기는 그저 흘러내리다 기척도 없이 멈춰 서곤 했다. 결코 작위적이거나 어색하지 않은 부작위의 현장. 우리의 삶도 이처럼 자연스러울 수 잇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흘러갈 수만 있다면 우리 곁에서 불행한 사람이 더는 눈에 띄지 않을 텐데... 우선 나부터 시간을 감싸는 저 빗줄기로부터 작은 위안을 얻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누군가에게 기쁨의 인사를 나누었을 텐데...


시쿠 부아르키의 소설 <엎지른 모유>를 읽는 동안 오가는 삶의 풍경들을 생각했다.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100세 노인 에우라리우의 독백으로 꾸려진 이 소설은 독자들의 시선을 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이끌어 간다. 물론 소설에서 주인공은 몸은 물론 그의 기억마저 온전하지 못해 횡설수설하거나 때로는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거나 부정하기도 하지만, 소멸되어 가는 개인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스러지지 않는 것은 가슴에 아로새겨진 숭고한 사랑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내가 얼마나 네가 오는 것을 좋아하는지 안다면, 너는 매일같이 달려올 것이다. 너는 아직까지 나를 인정해 주는 유일한 여자이다. 네가 없다면, 나는 굶어 죽을 것이다. 네가 없다면, 나는 마치 부랑자처럼 매장당할 것이다. 나의 과거도 꺼져갈 것이다. 아무도 나라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p.125)


빗소리가 굵어졌다 가늘어지는 반복을 거듭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기도 하고, 잠에서 깬 나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아파트 정원수의 묵묵함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중심 서사는 첫사랑이었던 아내 마틸지의 실종이다. 에우라리우의 생애는 마틸지와 함께 했던 삶과 마틸지가 없는 이후의 삶으로 나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 속에는 상대방에 대한 질투와 불신, 분노와 절망, 의심과 회의 등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하나 둘 들러붙는다.


"만일 이 근처에 신부님이 있으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도록 나에게 좀 안내해 줘라. 나는 아내를 알게 된 날부터 평생을 죄악 속에서 살았으니까. 미사에 다니던 그 시절, 어떻게 성당에서까지 생각으로 죄를 지었는지 너에게 언제 이야기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세례를 받았으니까, 병자 성사를 받을 권리도 있다. 비록 교리 문답서에서는 육신의 부활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는 영원한 삶을 믿고 싶다. 마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꽤나 말쑥했던 청년이, 십대의 마틸지에 비해 이렇게나 노쇠한 상태로 영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p.178~p.179)


에우라리우의 길고도 지독한 사랑 이야기는 브라질의 어두웠던 식민지 역사를 동반한다. 유력 정치인 가문의 아들이었던 에우라리우에 비해 백인 농장주와 그의 성적 노리개였던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났던 마틸지, 그녀는 이른바 뮬라토였다. 브라질의 근대사에서 뮬라토들이 대를 거듭해 빈민으로 전락하는 과정과 이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투쟁사,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 등이 에우라리우 개인의 지독한 사랑담과 더불어 장대하게 펼쳐지는 이 소설은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인 듯 친근하게 읽힌다.


"시내에 마틸지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떠도는 게 확실했다. 나를 버리고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식료품 가게와 카페 그리고 이발소에서 사람들이 등 뒤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이 아내의 혹시 모를 숨겨진 애인들을 추측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면, 마치 속고 산 남편에 대한 배려의 차원이라는 듯이 깊은 침묵이 맴돌았다."  (p.207)


딸과 남편만 남겨두고 사라진 아내 마틸지와 떠날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마틸지의 숨겨진 비밀. 그렇게 시작된 죽음의 비밀을 마침내 알고 가슴을 치게 되는 한 남자의 아련한 사랑과 회한이 먹먹하게 전해 온다. 의무가 지배하는 일상의 촘촘한 시간 너머로 휴식처럼 드문드문 비가 내리고 나는 이따금 고양이처럼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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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하는가 - 지금 당신이 가장 뜨겁게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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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원 태풍이 불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기업의 걱정과 불안이 밑바탕에 깔린 결과이지만 갈수록 기업의 이익이 줄어드는 현실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는 현실적 판단이 초래한 자구책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어려움을 비교적 잘 헤쳐 나왔던 대한민국의 경제에 검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청년 취업률이 급격히 감소하는 현실. 그렇다고 노인 인구의 경제적 자립도가 높아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달리 뾰족한 대안도 없으면서 탈 중국을 외쳤던 어느 망상가의 취중 실언이 대한민국 전체를 위기에 빠트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세계 10위를 넘나드는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로 볼 때 어느 한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창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이는 조직 전체의 수준이 이전 정부에 비해 턱없이 낮아졌으면 몰라도...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젊은 직원들 역시 자신의 자리가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에 떨거나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일하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곰곰 생각하곤 한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해 보이지만 좀 더 거창한 다른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 역시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우장춘 박사의 사위이면서 교세라의 창업자이기도 한 이나모리 가즈오의 저서 <왜 일하는가>를 꺼내 읽은 것도 그런 정황과 맞닿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 건, 어쩌면 손에 잡히지 않는 파랑새를 쫓아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환상을 좇기보다는 눈앞에 놓인 일부터 좋아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훨씬 중요하다.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게 되고, 노력을 노력이라 여기지 않으며,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일에 완전히 몰입하면 저절로 추진력도 붙는다. 추진력이 붙으면 성과도 좋게 나타나고, 덩달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도 받게 된다. 주위에서 칭찬해 주면 내가 하는 일이 더 좋아지고 그 일에 더 집중하게 되는 선순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바로 이렇게 우리 인생에 선순환이 시작된다."  (p.90)


'일하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과 경험을 통해 일이 우리 인생에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이 책은 사실 이전에 두어 번 읽었던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면 하시라도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지방대 출신의 가난한 청년이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경험이 책을 읽는 독자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는 이 책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현대인의 일상에 한 줄기 의욕을 불끈 심어준다. 게다가 자신의 일에 진저리를 치던 마음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반발과 원망하는 마음만 키워갈 것인지, 아니면 어려운 요구라도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일지는 오직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도착점도 크게 달라진다. 일도 그렇지만, 인생도 마찬가지다."  (p.190)


65세의 나이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던 저자는 하토야마 총리의 부탁으로 77세의 나이에 파산 직전에 있던 일본항공의 회장에 취임하여 8개월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던 전력이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자신을 성공적인 삶으로 이끌어주었다고 회상한다. 우리나라 말에 '울력'이라는 단어가 있다. 출가수행자들이 절 살림에 보탬이 되고 몸을 쓰면서 망상이나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한 수행의 한 방편으로 쓰였던 집단 노동을 일컫는 말이었다. '여러 사람이 힘을 구름처럼 모은다'는 뜻에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는데 세속에서는 주로 몸으로 하는 일이나 노동을 뜻하지만 불가에서는 중요한 수행의 일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확고한 듯 보인다. 일이란 단순히 생계수단을 넘어 개인의 인격을, 나아가서는 삶 전체를 완성하는 수단이자 방편인 셈이다.


"90년에 걸친 내 삶을 돌이켜볼 때, 앞선 인생 방정식은 삶을 사는 가장 간단하고도 정확한 진리이자, 더 좋은 인생길을 걷기 위해 항상 생각해야 하는 좌우명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소개하고 강조하고 싶다. 올바른 사고방식과 강한 열의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력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살려서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바란다. 그런 자세로 일하면 당신의 인생에는 풍요로운 열매가 열리고, 곧 놀라운 세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p.266)


맑았던 하늘에 조금씩 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구름 사이로 길게 뻗어 나온 가난한 햇살이 공원의 녹음 위를 훑고 지나간다. 우리의 삶도 이렇듯 맑게 빛나던 인생이 한순간에 어두워질 수 있고,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뻗은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각자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왜 일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 당신이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당신의 인생 전체를 결정할지도 모른다. 하늘을 보면 오늘의 날씨를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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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생각 아포리즘 - 0에서 1을 만드는 생각의 탄생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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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는 명언집 혹은 금언집이 유행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금력이 부족했던 출판사에서 여러 유명인들의 작품이나 회고록 혹은 전기 등을 종류별로 출판할 엄두는 나지 않았을 테고, 그들이 했던 몇몇 명언들을 한 데 모아서 책으로 엮어 출간한다면 비용이나 위험도 면에서 훨씬 유리한 측면이 있었을 게다. 더구나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했던 당시에 책을 소비하는 학생이나 가정에서도 원하는 책을 맘껏 사들인다는 건 웬만한 형편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터, 한 권의 책을 읽고 마치 수십 권의 책을 읽은 것인 양 자신의 지식을 뽐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로 여기지 않았을까. 책을 공급하는 측과 수요하는 측의 욕구가 정확히 일치했던 까닭에 명언집이나 금언집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던 것이 급격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매체가 등장했음은 물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주변 환경 탓이었던지 비교적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독서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아 마지않던 책은 이제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진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명언집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듯하다. 역시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인지...


"사실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등 유명한 실리콘밸리 천재들에 관한 책은 전 세계적으로 수천 종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번역과 각색을 통해 작가에 의해 한 번 정제되었기에 진짜 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생각이 아닌 작가의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순수한 오리지널 창조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훌륭한' 아포리즘이란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였고, 그 답을 구현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이 책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p.5 'Prologue' 중에서)


인문학자이자 지식큐레이터로 잘 알려진 김태현 작가는 이미 <백 년의 기억, 베스트셀러 속 명언 800>, <스크린의 기억, 시네마 명언 1000>, <타인의 속마음, 심리학자들의 명언 700>, <지적교양 지적대화, 걸작 문학작품 속 명언 600>, <세상의 통찰, 철학자들의 명언 500> 등 이와 같은 명언 집을 다수 출간한 적이 있다. 이 책 역시 그와 같은 연장선상의 한 권일 수도 있겠지만 <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생각 아포리즘>은 책을 읽는 일반 독자들이 AI가 핵심이 될 미래에 대해 사유하고 대비하거나 실리콘밸리 천재들의 통찰과 사고방식을 통해 챗 GPT 열풍을 불러일으킨 샘 알트만과 같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0677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구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People at different stages of their lives are doing different things, and they're using Google."  (p.243)


PART 1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거인들의 통찰', PART 2 '실리콘밸리의 미래 설계자들의 통찰', PART 3 '실리콘밸리 혁신가들의 통찰' 등 총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이 책은 애플 창립자인 스티브 잡스를 비롯하여, 빌 게이츠, 래리 페이지, 제프 베이조스, 팀 쿡, 에릭 슈미트, 샘 알트만, 수전 워치츠키, 젠슨 황 등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금세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내로라하는 실리콘밸리 천재들의 명언을 담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명언집들이 그러하듯 우리가 작심하고 외우지 않는 한 어느 한 구절도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필사 혹은 깊은 사유와 같은 시간 할애의 과정이 빠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을 통째로 외울 수는 없다 할지라도 맘에 드는 몇몇 구절을 깊이 생각하고 옮겨 적어보는 것쯤이야 많은 수고가 뒤따르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0943 저는 여러분이 두 가지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본능에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세요.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방향을 빠르게 바꿔야 합니다.

I think it is very important for you to do two things: act on your temporary conviction as if it was a real conviction; and when you realize that you are wrong, correct course very quickly."  (p.329)


사실 어떤 명언집이나 아포리즘도 우리들 삶에 더없이 유익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열정과 창의력, 추구하는 목표를 향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협력 및 지식의 공유, 두려움 없는 도전과 실패에 대한 용인력, 빠른 판단과 실행력 등 실리콘밸리 천재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나 시사점은 같은 분야가 아닐지라도 더없이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평생의 경험에서 얻은 그들의 가르침을 어떠한 노력도 없이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 책 속의 아포리즘을 마음 깊이 수용하고 인생의 가르침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했던 말의 의미를 몇 날 며칠 고민하고 관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제부터 쏟아지던 빗줄기는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삶의 의미를 깨닫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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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 당신과 문장 사이를 여행할 때
최갑수 지음 / 보다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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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며칠을 앓았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하면서 다녔는데 마스크를 벗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감기 몸살이 찾아왔다. 볼이 빨갛게 열이 오르고 두통과 약간의 어지럼증을 동반한 채로 병원에 들렀을 때, 나와 비슷한 증상의 환자들이 병원 대기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현실이 조금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순번을 기다려 진료를 받고 처방전을 손에 든 채 병원을 나섰을 때는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 후였다. 몸이 아파서 며칠 병가를 내야겠다는 사실을 회사에 알린 후 정적이 내려앉은 숙소로 돌아와 굳게 닫힌 문을 열자 밀렸던 피로감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간신히 약만 챙겨 먹은 나는 저녁도 거른 채 침대에 쓰러져 며칠을 앓았던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때로는 변덕스럽고 요란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 한 번씩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욕보다는 이렇게 구질구질한 경험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해야만 내 삶이 완결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끼니를 챙겨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졸음을 몰아낸 몸이 허기를 느낄 때마다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냉장고 속 남은 과일을 건져 먹었다. 그렇게 며칠을 앓았던 나는 겨우 추스른 몸으로 출근을 했고, 여진처럼 이어지는 후유증에 쉽게 잠식당하곤 했다. 갈수록 떨어지는 의욕과 몸살 후유증으로 인해 독서는커녕 텔레비전을 보는 것조차 멀리한 채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기면증 환자처럼 말이다. 열흘 이상의 시간 동안 나는 여행작가 최갑수의 에세이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를 겨우 읽었을 뿐이다.


"죽음을 몇 달 앞둔 여든한 살의 테라스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 같은 건 들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돌아가봐야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는 걸, 최선을 다해봐야 그다지 바뀌는 것이 없다는 걸 그때쯤이면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고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플 것이다. 즐거움과 사랑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인데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놓치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p.85~p.86)


내가 아팠던 순간에도 지구의 시간은 꾸준히 흘러 화려했던 벚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르게 핀 이팝나무 가로수의 몽실몽실한 꽃망울이 도로변을 환하게 빛낸다. 내가 아침마다 오르는 등산로에도 아카시아꽃의 진한 향기가 산 전체를 들썩이게 하고, 손바닥만큼 펼쳐진 상수리나무의 나뭇잎마다 바람에 날린 송홧가루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다. 이만큼의 시간을 살아냈구나, 하는 뿌듯함보다 손을 놓은 채 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허전함으로 다가온다. 손가락 사이로 휑한 바람이 분다.


"세월이 간다. 하루에 하루씩 꼬박꼬박 가고 있다. 후지와라 신야 영감을 읽다 눈에 띄는 한 구절. "이 세상 살아 있는 생물들은 모두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한 적이 있었던가. 일에도 사랑에도 여행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시월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191)


여행작가라는 직업이 무색하게도 한동안 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는 작가는 일상의 곳곳에서 여행을 떠올렸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다고 했다. 자신이 밑줄을 그었던 여러 문장들 중에서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문장들을 뽑아내어 작가의 시선과 글을 더해 사진과 함께 완성한 이 책은 침대 머리맡에 두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읽었던 구절을 곰곰 되새기며 멀리서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에도 귀 기울이게 되는, 자주 안 쓰던 마음 관절을 움직이게 하는 그런 책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인생은 고달프고 지루한 것이에요. 간간히 슬프고 고통스럽구요. 더 간간히 즐겁고 기쁘고 감동스럽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인생을 우리가 꾸역꾸역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인간이란 쉽게 잊어버리는 동물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라고 생각합니다만)."  (p.348)


어제 가볍게 비가 지나간 오늘의 하늘은 무척이나 투명하다. 연속되는 지구의 시간은 이렇듯 변화무쌍하고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는 변화의 순간들을 매번 놓치곤 한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탱하기 위해서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보다 웬만한 변화쯤이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내는 게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둔갑력은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재능을 한껏 키우고 활짝 꽃 피우게 하는 가장 큰 힘'이라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처럼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민함보다는 둔감함일지도 모르지만 신록이 짙어지는 이맘때쯤에는 하나하나의 변화가 새롭기만 하다. 무기력하던 나의 몸이 겨울을 지나 봄처럼 가볍게 깨어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에도 어쩌면 그런 순간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봄처럼 가볍게 깨어나는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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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들 순간들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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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조개로 끓여낸 맑고 담백한 조개탕의 국물을 가만히 음미하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행복이란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마치 일상처럼 한 스푼 떠먹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특별하지 않은 주말의 어느 한가한 시간에 배수아의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을 읽는 것과 같아서 호들갑스럽거나 억지스럽지 않은, 그러면서도 결코 흔하게 느껴지지 않는 일상의 시간 속으로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평범함이 오히려 귀한 가치로 대접받는 현대인의 고양된 삶에서 '독서'란 어쩌면 구시대의 유물처럼 곰팡내 나는 습관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과도하게 고양된 일상의 에너지를 몇 단계 낮출 수 있는 방법 또한 '독서'나 '산책'과 같은 구시대적 유물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보면 현대인의 삶은 뭔가 어긋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오래전 어느 날 당신으로부터 온 편지...... 그 순간 문득 작별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삶의 시간 내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비밀의 의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일생은 그것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다. 우리가 평화롭게 정원의 흙 위로 몸을 기울인 동안, 당신의 몸 위로 빛과 그늘이 어지럽게 얼룩지는 그 순간에도. 작별은 바로 지금, 우리의 내부-숲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었다.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몸을 구부리면서 당신의 목덜미 위를 느리게 기어간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집어올린다. 평화와 고요. 오직 빛과 호흡만이 있는 순간. 지금 당신이 불타고 있다는 증거인가? 글쓰기는 작별이 저절로 발화되는 현장이다. 그 아래 아직 당신의 발자국이 움푹 팬 채로 남아 있는 죽은 딱총나무가 내 눈앞에서 불타기 시작한다."  (p.82~p.83)


지난 15년간 독일과 서울을 오가며 글을 써오고 있는 작가는 자신이 정원이라고 부르는 베를린 인근 시골의 오두막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책에서 작가는 독일 시골 정원에서의 생활을 묘사한다. 작가의 일상일 수도 있는 산책, 여행, 책과 작가들, 글쓰기, 정원 등을 소재로 한 이 책은 한 줄 한 줄을 모두 곱씹어 음미할 만큼 아름다운 문장으로 꾸며졌지만 이야기의 분명한 주제나 결론으로 독자를 이끌지는 않는다. 다만 감각적인 묘사와 눈에 보이는 듯한 상황 설정으로 인해 작가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에 빠져드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단지 시야에서 잠시 보이지 않았을 뿐. 아아, 따뜻한 바닷가에서 『파도』를 읽는 여름은 두 번 다시 가능한 것인가. 만약 그런 여름이 다시 온다면, 우리는 마침내 평화가 왔다고 착각할 것이다. 단 한 번도 있지 않았던 평화, 단 한 번도 끝나지 않았던 전쟁,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던 기다림,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암울함은 사실은 지속되는 한 권의 책과 같다고 말했다. 신은 책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p.187)


“누군가 이 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읽기에 대한 글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는 작가는 "나에게 독서란 한 권의 책과 나란히 일어나는 동시성의 또 다른 사건"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작가가 읽는 책과 나란히 일어나는 작가의 또 다른 사건에 대한 기록, 이를테면 작가가 읽는 책에 덧붙여진 동시성의 일상을 아름답게 풀어낸 글이라고 하겠다. '나'와 '베를린 서가의 주인' 두 인물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는 독특한 산문 형식은 어쩌면 '배수아'라는 이름에 걸맞은, 그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그만의 발상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오직 이 정원을 따라서 쓰인 글이다. 어느 날 내가 우연히 도착하게 된, 투야나무 울타리 뒤편의 보이지 않는 정원.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정원의 시간과 동시에 일어난다. 정원의 삶과 나란히 간다. 이 글 속의 그 무엇도 정원보다 앞서거나 나중에 말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파라다이스라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파라다이스의 어원은 고대 이란어로 '울타리로 둘러쳐진 땅'을 의미하므로."  (p.251 '에필로그' 중에서)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뱀과 물>, <에세이스트의 책상> 등 배수아 작가의 몇몇 작품들을 읽어오면서 나는 시나브로 그녀만의 작품 세계에 젖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책들에 덧붙여진 동시성의 나의 일상은 남아 있지 않다. 머릿속 기억이나 일기를 비롯한 어떤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망각이란 경험의 부재와 같은 것인가. 아쉽거나 서글프다는 생각이 새로운 각오나 다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까닭에 나의 삶은 이렇듯 변하지 않고 흐른다. 나는 나의 삶을 제대로 감각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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