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들 순간들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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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조개로 끓여낸 맑고 담백한 조개탕의 국물을 가만히 음미하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는 행복이란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마치 일상처럼 한 스푼 떠먹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특별하지 않은 주말의 어느 한가한 시간에 배수아의 산문집 <작별들 순간들>을 읽는 것과 같아서 호들갑스럽거나 억지스럽지 않은, 그러면서도 결코 흔하게 느껴지지 않는 일상의 시간 속으로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평범함이 오히려 귀한 가치로 대접받는 현대인의 고양된 삶에서 '독서'란 어쩌면 구시대의 유물처럼 곰팡내 나는 습관처럼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과도하게 고양된 일상의 에너지를 몇 단계 낮출 수 있는 방법 또한 '독서'나 '산책'과 같은 구시대적 유물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보면 현대인의 삶은 뭔가 어긋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게 아닐까.


"오래전 어느 날 당신으로부터 온 편지...... 그 순간 문득 작별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삶의 시간 내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비밀의 의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일생은 그것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다. 우리가 평화롭게 정원의 흙 위로 몸을 기울인 동안, 당신의 몸 위로 빛과 그늘이 어지럽게 얼룩지는 그 순간에도. 작별은 바로 지금, 우리의 내부-숲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었다.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몸을 구부리면서 당신의 목덜미 위를 느리게 기어간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집어올린다. 평화와 고요. 오직 빛과 호흡만이 있는 순간. 지금 당신이 불타고 있다는 증거인가? 글쓰기는 작별이 저절로 발화되는 현장이다. 그 아래 아직 당신의 발자국이 움푹 팬 채로 남아 있는 죽은 딱총나무가 내 눈앞에서 불타기 시작한다."  (p.82~p.83)


지난 15년간 독일과 서울을 오가며 글을 써오고 있는 작가는 자신이 정원이라고 부르는 베를린 인근 시골의 오두막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책에서 작가는 독일 시골 정원에서의 생활을 묘사한다. 작가의 일상일 수도 있는 산책, 여행, 책과 작가들, 글쓰기, 정원 등을 소재로 한 이 책은 한 줄 한 줄을 모두 곱씹어 음미할 만큼 아름다운 문장으로 꾸며졌지만 이야기의 분명한 주제나 결론으로 독자를 이끌지는 않는다. 다만 감각적인 묘사와 눈에 보이는 듯한 상황 설정으로 인해 작가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에 빠져드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단지 시야에서 잠시 보이지 않았을 뿐. 아아, 따뜻한 바닷가에서 『파도』를 읽는 여름은 두 번 다시 가능한 것인가. 만약 그런 여름이 다시 온다면, 우리는 마침내 평화가 왔다고 착각할 것이다. 단 한 번도 있지 않았던 평화, 단 한 번도 끝나지 않았던 전쟁,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던 기다림,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암울함은 사실은 지속되는 한 권의 책과 같다고 말했다. 신은 책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p.187)


“누군가 이 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읽기에 대한 글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는 작가는 "나에게 독서란 한 권의 책과 나란히 일어나는 동시성의 또 다른 사건"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작가가 읽는 책과 나란히 일어나는 작가의 또 다른 사건에 대한 기록, 이를테면 작가가 읽는 책에 덧붙여진 동시성의 일상을 아름답게 풀어낸 글이라고 하겠다. '나'와 '베를린 서가의 주인' 두 인물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는 독특한 산문 형식은 어쩌면 '배수아'라는 이름에 걸맞은, 그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그만의 발상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오직 이 정원을 따라서 쓰인 글이다. 어느 날 내가 우연히 도착하게 된, 투야나무 울타리 뒤편의 보이지 않는 정원.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정원의 시간과 동시에 일어난다. 정원의 삶과 나란히 간다. 이 글 속의 그 무엇도 정원보다 앞서거나 나중에 말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파라다이스라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파라다이스의 어원은 고대 이란어로 '울타리로 둘러쳐진 땅'을 의미하므로."  (p.251 '에필로그' 중에서)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뱀과 물>, <에세이스트의 책상> 등 배수아 작가의 몇몇 작품들을 읽어오면서 나는 시나브로 그녀만의 작품 세계에 젖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책들에 덧붙여진 동시성의 나의 일상은 남아 있지 않다. 머릿속 기억이나 일기를 비롯한 어떤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망각이란 경험의 부재와 같은 것인가. 아쉽거나 서글프다는 생각이 새로운 각오나 다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까닭에 나의 삶은 이렇듯 변하지 않고 흐른다. 나는 나의 삶을 제대로 감각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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