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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우리가 환생을 소재로 한 소설에 끌리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환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에 대한 갈망이나 염원 또는 호기심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 더해져서 환생은 그저 누군가가 꾸며낸 상상의 이야기겠거니 생각하던 사람도 결국에는 '나의 삶도 이번 생에서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닐지도 몰라.'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게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최초의 남녀에게 죽을 때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어. 하나는 나무처럼 죽어서 씨앗을 남기는, 자신은 죽지만 뒤에 자손을 남기는 방법. 또 하나는 달처럼 죽었다가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방법. 그런 전설이 있어." (p.181)
사토 쇼고의 <달의 영휴> 또한 환생에 대한 우리의 판타지를 소설로 쓴 작품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달이 차고 기우는 '영휴(盈虧)'로 은유한 이 소설은 자신이 사랑했던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다시 만나서 사랑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주인공 루리의 삶을 주 테마로 하면서도 소설을 한 꺼풀 더 들여다보면 겉모습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건 사랑이라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소설의 도입부는 상당히 복잡하게 시작한다. 영문을 모르는 독자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주인공인 오사나이 쓰요시는 유명 여배우가 된, 오래전에 사고로 죽은 자신의 딸의 친한 고교 동창생이었던 미도리자카 유이와 그녀의 어린 딸 미도리자카 루리를 만나기 위해 도쿄로 나왔지만 지하철역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11시 약속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바람에 약속 장소에는 시간에 맞춰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자신의 딸이었던 오사나이 루리와 이름이 같은 미도리자카 루리는 일곱 살 소녀 같지 않은 말투와 행동으로 주인공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일들을 끄집어내고, 자신이 교통사고로 죽은 주인공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주인공과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도입부를 지나면 이야기는 환생을 계속하게 된 루리의 삶을 좇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시골 출신인 오사나이 쓰요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의 한 사립대에 진학한다. 그를 깊이 사랑했던 한 여인도 그를 쫓아 도쿄로 왔다. 같은 고등학교 2년 후배이기도 했던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긴 채 오사나이가 속했던 클럽에 가입하여 자연스럽게 만남을 이어갔고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에 취직을 한 후에도 두 사람의 교제는 끊어지지 않았다. 장거리 연애를 하던 둘 사이에 갑자기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둘은 결혼하였고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 오사나이 루리가 태어난다. 평범했던 딸은 독한 감기에 걸려 고열에 시달린 이후 다른 사람처럼 변해갔다. 눈치가 빠르고 운전도 척척 잘하는 아내 고즈에와는 달리 오사나이는 둔하고 눈치 없는 사람이었던 까닭에 딸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아내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다.
"오늘 당신이 없을 때 딱 한 번 그런 눈빛으로 나를 봤어. 소름 돋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눈빛이었어. 아키라 군은 어디서 왔니, 하고 물어봤는데, 그랬더니 루리가 내 쪽을 돌아보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거야. 안색을 살피는 눈으로.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눈으로. 이 사람한테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까? 하는. 나쁘게 말하면 생판 처음 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역시 표현이 잘 안 돼. 하지만 지금까지와 다른 건 분명해." (p.36)
루리가 행방불명이 되어 오사나이와 고즈에를 깜짝 놀라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경찰로부터 루리를 인계받은 오사나이는 집을 무작정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게 된 루리를 향해 여행이 하고 싶으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하라고 타이른다. 그 후 루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고 말썽 한 번 부리지 않았다.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루리는 엄마인 고즈에의 차를 타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아내와 딸을 잃은 오사나이는 자신의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고즈에의 친구의 남동생인 미스미 아키히코가오사나이를 찾아오고 그로부터 길고 긴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다.
"18년의 시간이 지나서 다시 시작된 동일한 망상. 환생의 시나리오. 신혼 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아니, 분명 신혼 이후 몇 년이 지나서도 그 생각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미스미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서 아내에게 의심을 받는 횟수는, 오히려 해마다 늘어갔을 것이다." (p204)
스무 살의 미스미 아키히코를 지독히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사키 루리. 승승장구하는마사키 류노스케의 아내이기도 했던 그녀는 아이가 생기지 않자 노골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남편 때문에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비를 피하러 들어간 비디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생 미스미 아키히코를 만난다. 그리고 둘은 가까워진다. 그러나 스물일곱 살의 유부녀인 그녀와 대학생인 미스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다. 어느 날 마사키 류노스케의 선배인 야에가시 씨가 '좀 죽어본다'는 묘한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마사키 루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키 루리 역시 지하철 전동차에 치여 죽는다. 그리고 환생을 거듭하며 사랑을 이루려는 루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토 쇼고의 소설 <달의 영휴>는 사랑을 위해 환생을 거듭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지만 실상은 독자들에게 '사랑은 과연 무엇인가?' 끊임없이 묻고 있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사랑의 열기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가 흔적도 없이 스러지는 게 옳은 것인지, 죽음과 같은 어둠의 흔적을 이겨내고 달처럼 밝은 사랑을 흐트러짐 없이 이어가는 게 옳은 것인지 각기 다른 독자들의 대답을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다. 한 생애를 살면서도 끝없이 흔들리는 사랑의 덧없음으로 인해 우리는 이런 불가능의 판타지를 끝없이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묻던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사랑의 호흡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