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책, 모비 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을 생각할 때면 '내 영혼에 축축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11월이 있다.'는 소설 속의 한 문장이 떠오르곤 한다. 자기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달라는 사람 그가 했던 말이다. 소설에서 그는 포경선 '피쿼드'호에 승선하여 흰 고래 '모비 딕'을 쫓는 항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인물이며 독자들에게 세상이라는 가면 너머의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엄혹한 삶의 현실을 밑바닥까지 체험했던 이슈메일은 파멸을 향해 내달린 '피쿼드'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 되어 동료의 죽음을 대가로 얻은 삶의 비밀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한다. 24만 단어, 전체 134장의 장대한 서사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작가 허먼 멜빌을 대신하는 이슈메일의 철학적 사유가 더해짐으로써 더욱 매력적인 소설로 읽혀진다. 게다가 음울하고 유약한 성격의 이슈메일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은 얼마나 매혹적인지...

 

"이슈메일은 소설의 정서적 철학적 중심이 될 삶에 대한 태도를 떠올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기묘한 뒤죽박죽 사태 속에서 때로 야릇한 순간이 찾아온다. 우주 전체를 광대한 규모의 농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때다. 농담의 속뜻을 어렴풋하게밖에는 파악하지 못하고 이 농담이 누구도 아닌 자기를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이슈메일은 이런 삶의 태도를 "자유롭고 느긋한, 순한 무법자 철학"이라고 부른다." (p.25)

 

너새니얼 필브릭의 <사악한 책, 모비딕>은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저자가 끔찍이도 좋아하는 소설 <모비 딕>을 주제로 자신이 쓴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미국의 성서라고도 불리는 <모비 딕>을 저자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4년에 처음 접한 후 지금까지 최소 여남은 번은 더 읽었다고 고백한다. 너새니얼 필브릭은 <모비 딕>을 얼마나 아꼈던지 저자 허먼 멜빌의 우상이자 문학적 영감을 제공했던 '너새니얼 호손'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넣었던 것으로도 모자라 '피쿼드'호가 출항했던 낸터킷 섬의 실제 주민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정도면 <모비 딕>의 애독자라기보다는 시쳇말로 '덕후'에가까운 게 아닌가. 그럼에도 저자는 <모비 딕>에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나는 『모비 딕』을 가장 최근에 읽었을 때에야 페달라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시인해야겠다. 페달라와 마닐라에서 온 노잡이들은 그냥 지옥 같은 장식물로 갖다놓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에이해브를 에이해브로 만드는 핵심 요소였다. 어떤 지도자도, 아무리 미치광이라고 해도 내부 조언자나 계속 부추기고 다그치는 사람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p.41)

 

소설 <모비 딕>의 해설서이기도 한 이 책은 저자가 반복하여 읽었던 자신의 애장도서에 대한 헌사이자 그가 소설에서 끊임없이 찾고 발견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기록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작가 허먼 멜빌의 경험과 많은 자료, 이를테면 고래잡이와 태평양에 관련된 수많은 학술 논문들과 기록들 그리고 셰익스피어, 밀턴, 베르길리우스의 여러 책들을 통하여 완성된 <모비 딕>은 초기 비평가들의 호의적인 비평에도 불구하고 멜빌이 일흔두 살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미국에서 고작 3715부가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모비 딕>의 진가를 알게 된 여러 사람들에 의한 찬양이 시작되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모비 딕』은 앞날을 위해 쓴 책이다. 현재의 불같고 혼란스러운 열정에 저항하는 사람, 높이 나는 캐츠킬 독수리의 영혼을 가진 사람을 그리면서, 멜빌은 불가사의하게도 1851년 미국에 절박하게 필요했으나 거의 10년이 지나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던 정치가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p.97)

 

우리는 간혹 원작보다 더 매력적인 어느 서평가의 글에 매혹되어 그제야 비로소 원작을 읽기도 한다. 그때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원작을 탐험하는 독자는 서평가가 마련해 준 해설서를 지도 삼아 원작의 곳곳에 숨겨진 비밀 동굴을 탐험하게 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모험을 떠났을 때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비밀 동굴에서 독자들은 큰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삶의 비의를 깨닫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 의해 우리가 소위 고전이라 칭하는 대개의 문학 작품이 거친 세월의 풍화에도 불구하고 푸른 생명력을 부여받고, 오랜 시간 새로운 독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멜빌은 『모비 딕』에서 이슈메일이 지지한 입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은 것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회의와 천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직관, 이 조합으로 신자가 되지도 불신자가 되지도 않고, 양자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회의와 희망을 뒤섞는 데서 오는 구원, 짧고 터무니없고 부조리한 삶 앞의 온화한 극기심, 이것이 내가 『모비 딕』을 읽는 이유다." (p.130)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부푼 희망을 안고 내가 읽었던 오래전의 <모비 딕>은 누렇게 변색된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망각의 더께가 이끼처럼 쌓이고 있다. 그러나 고전의 생명력은 나의 대에서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너새니얼 필브릭과 같은 탐서가가 존재하는 한 나의 아들 세대로, 또 다시 아들의 아들 세대로 면면히 이어질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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