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소담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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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흔히 말하길 나이들면 감동이 줄어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해본다. 감동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거나 우리가 가상의 세계, 이를테면 상상 속에서 지어낸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 사실을 조금식 깨닫게 되는 까닭에 호들갑을 떨며 감동한 척 행동하는 그런 유치한 일에는 숫제 흥미가 없어졌거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관심과 이목을 끌어야 하는 젊은 시절에는 별것 아닌 일에도 일부러 과장된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그런 일을 여러번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행동에 자신조차 속아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게 마련이다. 그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는 마땅히 감동해야 하는 어떤 상황에서 조건반사처럼 그렇게 행동했던 게 아닐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원하는 게 없어진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안도해도 좋을지 어떨지 사야카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원하는 게 많은 인생도 피곤하고 성가실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하나도 없는 인생은 어떨까." (p.83)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주인공 미노루가 읽고 있는 소설의 스토리를 이 소설 속에 중간중간 삽입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는 미노루가 겪는 일과 읽고 있는 소설의 다음 내용에 대해 동시에 궁금해하게 된다. 마치 2권의 소설을 한꺼번에 읽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게 꼭 장점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닌 듯싶다. 소설과 현실 세계를 교묘히 섞음으로써 쉰의 나이에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주인공 미노루의 현실 인식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소설과 소설 속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또는 소설 속 현실보다는 미노루가 읽는 소설의 스토리에 더 집중한 채) 책을 읽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기사는 어떻게 된 일인지 책 읽는 버릇을 물려받은 듯한 하토가 걱정이다. 지금도 옆방에서 다다미 위에 다리를 쭉 뻗고 벽에 등을 기댄 자세로 두꺼운 어린이 책을 읽고 있다. 책에 몰두하는 딸이 나기사에게는 현실을 (또는 엄마를?) 거부하고, 자신의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기사와 둘이 있을 때 미노루가 그랬던 것처럼." (p.112)

 

주인공 미노루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으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 특별한 목표도 없고 그렇다고 모험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다. 그가 즐기는 유일한 취미는 독서다. 미노루와 사귀었던 나기사는 책에만 집착하는 그의 모습에 질리고 만다. 결국 나기사는 딸 하토를 낳은 후 미노루와 결별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나기사는 미노루가 지불하는 하토의 양육비마저 거절한다. 그렇다고 부녀간의 만남조차 가로막는 것은 아니다. 미노루의 재산은 미노루의 친구이자 세무사인 오타케가 전적으로 관리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재산을 늘렸던 부모 세대와는 달리 미노루와 그의 누나인 스즈메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닥 즐겨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그러다 보니 스즈메는 일본을 떠나 독일에서 머물고 미노루 또한 연신 책에 빠져든다. 성향도 비슷하고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미노루와 스즈메는 남매 이상으로 가깝다. 틈만 나면 스카이프로 통화를 하고 싶어하는 스즈메와 그런 누나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귀찮아 하지 않는 미노루.

 

"지금 스카이프 할 수 있어? 하는 스즈메의 문자가 날아왔을 때, 미노루는 저녁을 벌써 먹고 잠옷 차림으로 침대의자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응. 잠깐 기다려. 그렇게 회신을 보내고 컴퓨터를 켠 다음 스카이프를 실행한다. 연결되는 짧은 시간에도 그만 책으로 눈을 돌리고 만다." (p.311)

 

미노루 주변에 배치된 인물들은 단조롭다. 사진작가인 스즈메가 독일에서 상을 받았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문을 연 소프트아이스크림 가게 '슈프레 파크'의 정직원인 유마, 미혼모인 유마가 출산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된 유마의 친구 아카네, 미노루의 건물에 세들어 사는 사야카와 치카 커플, 미노루의 학창시절 친구이자 나이가 들어 재회한 준코, 미노루의 옛연인 나기사와 그녀의 딸 하토, 미노루의 친구이자 재산 관리인 오타케, 미노루의 친누나인 스즈메 등이다.

 

나이가 쉰이 되었는데 현실에 무감각하고 책에만 빠져 사는 미노루를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미노루는 자신이 읽고 있는 소설의 배경이 오히려 더 현실감있게 느끼곤 한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일본의 여름을 살면서도 그의 생각은 하얀 눈이 쌓인 북유럽의 어느 겨울에 가 있는 것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현실의 단조로운 일상은 미노루에게 전혀 자극을 주지 못한다. 그가 읽고 있는 미스터리 소설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미노루가 코앞의 미래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미래를 걱정하는 보통의 사람들도 몸은 비록 현실 세계에 머물고 있지만 현실이 고달플수록 우리의 생각은 미래에 자신이 살고 싶은 화려한 별장이나 자신이 꿈꾸는 이상의 한 장면을 헤매게 되지 않던가. 사람들은 미노루처럼 오직 상상의 세계를 탐하면서 현실에서 극단적으로 내몰리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상상과 현실을 빈번하게 오가며 살게 마련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미노루의 친구 오타케 역시 완벽함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과는 달리 재혼한 어린 아내의 일상을 머릿속에서 수시로 그려보곤 한다.

 

작가인 에쿠니 가오리는 미노루의 무덤덤한 일상과 그가 읽는 소설의 드라마틱한 장면을 대비시킴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들 또한 나이듦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도록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소설 속 미노루처럼 현실을 그저 아무런 흥미도 없이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점검해보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감동이 사라진다는 건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삶을 그때 그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시간만큼 우리는 살았으나 살지 않았던 것과 진배없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무덤덤했던 하루가 금세 저물고 있다. 나는 하루를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루를 지우고 있는가. 나는 지금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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