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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평점 :
세상이 온통 고통이거나 악몽으로 보일지라도 그 자리에서 망연히 붙박인 듯 서 있을 일은 아니다. 그 사이사이의 아주 작은 기쁨이나 희망을 찾아 어렵사리 발을 딛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일이다. 그러다 보면 고통의 색깔은 점점 옅어지거나 완전히 잊혀지게 마련이다. 적어도 삶의 빛깔이 휘황찬란한 무지개빛은 아닐지라도 공포의 신음은 조금쯤 덜 수 있지 않을까. 오르한 파묵의 소설 <검은 꽃>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만큼 경이로운 것은 없다. 유일한 위안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삶의 위안이 되는 글쓰기가 없다면 고통으로부터 잠시 피할 수 있는 도피처나 은신처를 잃는 것과 같다.
강원도에서 책을 읽고 번역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윤미나. 다른 사람의 글을 번역한다는 건 또 다른 창작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그것으로부터 작은 위안을 얻는 것과 번역은 사뭇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독서여행기 <굴라쉬 브런치>는 솔직하다 못해 직설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작가의 여정은 체코의 프라하와 베네쇼프,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와 자그레브, 슬로베니아의 류블라냐와 블레드로 이어진다.
"여행이란 게 원래 시시하다. 성당을 하나 더 보고, 바로크니 고딕이니 꽥꽥거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아는 만큼 더 보인다는 것은 명징한 진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 순간을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지의 소치로 눈부신 건축과 역사를 상한 우유처럼 미련 없이 포기해야 했지만,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오직 시간을 앞으로 밀어내기 위해 걷고 또 걸었던 그 시간도 좋았다. 어차피 여행은 각진 다면체 세상을 내 맘에 맞게 이리저리 둥글리는 작업이 아닐까." (p.86)
애초에 나는 무엇이거나 무엇이기를 바라는 존재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시간의 추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나의 모습과 그 변화를 매순간 확인하고 싶은 나는 무엇이었다가 또 다른 무엇이 되고 싶어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걸 일상에서 벗어날 때마다 수시로 생각하는 것이다. 작가도 그랬던 모양이다. 여행은 몸이 떠나는 게 아니라 나로부터 마음이 벗어나는 것임을 새삼스레 느낀다. 여행지의 고독은 익숙했던 내 몸으로부터 멀어지는 의식과도 같다. 여행의 침묵 속에서 작가도 어쩌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침묵에도 무늬가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고독하거나 지루하거나, 두려움에 짓눌려 있거나 거짓말을 꾸며내는 중이거나.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침묵한다. 지금 이 순간의 침묵은 아무 무늬도 없는 순전한 것이다. 텅 빈 지구에 평화가 수북이 쌓여 있다." (p.109)
여행의 좋은 점은 같은 일상을 살아도 그 일상에 쉽게 중독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의 일상이 마치 개성이 뚜렷한 원시림처럼 개별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반대로 실생활에서의 일상은 아무리 개성이 뚜렷한 일상으로 하루를 채워본들 그날이 그날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작가 역시 프라하의 카를교를 오가고 두브로브니크의 스트라툰 거리를 목적도 없이 걷고,슬로베니아의 류블라냐와 블레드를 슬슬 어루만지면서도 각각의 날들은 더없이 특별했던 날들로 기록한다. 무늬도 없을 듯한 이런 흔한 일상이 여행지에서는 기억의 큰 파도를 넘어 뚜렷한 흔적을 남기곤 한다.
"평소엔 여자라는 신분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많은 경우 그것은 김칫국물이 흐르는 도시락처럼 난감한 현실이다. 늘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고 욕망을 사려야 하고 본심을 감추어야 한다. 대충 여자 흉내라도 내고 다니려면 싸지고 다녀야 할 짐이 가방 하나 가득이다." (p.139)
작가는 프라하를 거닐며 영화 <타인의 삶>,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떠올리는가 하면 두브로브니크에서는 존 레넌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조지프 헬러의 소설 <캐치-22>,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생각한다. 슬로베니아의 블레드에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영화 <남아 있는 나날>, 가리타니 고진의 <세계 공와국으로>를 말한다. 각각의 장소에서 만나는 책이나 영화만 보더라도 그 지역의 분위기를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블레드에서 작가는 어쩌면 여행자의 고독과 우울을 심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고백하는 자들이 어리석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지젝의 말을 인용하여 슬쩍 자기모순에서 빠져나가야겠다. 고백하지 말라. 그것 말고는 여행의 매력을 설명할 길이 도저히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p.242)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서른 시간도 더 지난 지금, 세상은 2018년이라는 시간에 조금 더 익숙해져가고, 2017년의 기억이 차츰 빛을 바래고, 새로 태어난 듯한 사람들이 무작정 희망을 얘기하는 동안 나는 어느 어두운 골방에 누워 삶의 고단함을 견디고 있는 누군가의 신음을 떠올렸다. 문학은, 때로는 음악이나 영화는 자신의 부드러운 입술로 까슬까슬한 삶의 감촉을 느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