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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평점 :
소설의 스토리가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시기에 순하고 착한 소설을 만나게 되면 순간 당황하게 된다. 마치 막장 드라마만
난무하는 요즘에 7,80년대의 밋밋한 가족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재미가
없다거나 지루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적응이 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소설의 분위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책을 손에서 내려 놓을 수 없게
된다.
오가와 이토의 <츠바키 문구점>은 그런 소설이다. 20대 후반의 여자 주인공 포포(하토코)를 중심으로 가마쿠라 사계절의 풍경을
마치 한 폭의 수채화에 담은 듯한 느낌이다. 소설은 가마쿠라의 여름서부터 시작하여 가을, 겨울, 봄으로 이어진다. 가마쿠라의 한적하고 고즈넉한
풍경이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츠바키 문구점'을 제외한 모든 이름이 실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작가는 가마쿠라의 실제
모습에 포포와 주변 인물들을 살포시 얹어 놓은 것이다.
"한때는 선대에 반항하여 대필가라는 운명을 저주하기도 했지만,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전문학교에 들어가 디자인 공부를 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선대가 세상을 떠나고 모든 것이 싫어져서 해외로 방랑을 떠난
동안에도 나를 구원해준 것은 글씨 쓰기 재능이었다." (p.70)
포포는 아기 때부터 대필가인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대필을 천직으로 알았던 할머니는 어린 포포에게도 글씨 쓰기 훈련을 혹독하게 시켰고
그게 싫었던 포포는 살갑게 할머니라 부르지도 않고 '선대'라고만 지칭한다. 여섯 살부터 시작된 습자 훈련을 할머니는 그야말로 혹독하게
시켰고 가족이라고는 할머니밖에 없었던 포포는 어디 마음 둘 데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할머니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머리를 염색하고 신발도 구겨
신는 등 저항을 하던 포포는 졸업과 동시에 해외로 떠돌다가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귀국한다. 그러나 할머니에 대한 미움이 남아 있던
포포는 끝내 병문안도 가지 않는다. 그렇게 포포는 할머니와의 화해를 이루지 못한 채 작별했다.
"모양이 가지런한 것만이 아름다운 글씨는 아니다. 온기가 있고, 미소가 있고, 편안함이 있고, 차분함이
있는 글씨, 이런 글씨를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p.146)
포포가 츠바키 문구점을 다시 열고 대필을 시작하게 된 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대필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아끼던 동백꽃이
문구점과 함께 사라질까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반항기 있는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포포는 그 사실을 몹시 부끄러워 한다. 그런 까닭에
친구들과도 만나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 문구점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대필 상담을 하고, 밥을 챙겨 먹는다. 조용한 나날들이 지나간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옆집에 사는 바바라 아주머니가 유일하다.
대필을 의뢰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또 다른 사랑을 찾아 집을 떠난 아내와의 이혼을 결심한 남자가 지인들에게 자신의 이혼
사실을 알리는 편지, 첫사랑에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어머니를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편지를 써 달라는 아들의 사연
등 대필을 맡겨 온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포포는 삶의 안정을 찾는다. 대필을 하면서 할머니의 가르침을 조금씩 이해해가던 어느 날 이탈리아
청년으로부터 한 보따리의 편지를 받는다.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펜팔을 했던 상대방의 손자가 유품으로 남겨진 할머니의 편지를 들고 온 것이다.
이탈리아로 보낸 할머니의 편지를 통해 포포는 늘 엄격하기만 했던 할머니가 하루도 자신을 걱정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사실과 병원에서도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랐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니까 후회를 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말이죠. 나도 줄곧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느 날 깨달았답니다. 깨달았다고 할까, 딸이 가르쳐주었어요.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하기보다 지금 손에 남은 것을 소중히 하는 게 좋다는 걸요." (p.305)
소설은 마치 포포의 일상을 기록한 그녀의 일 년치 일기인 양 읽힌다. 할머니에게 모질게 대했던 포포 자신의 후회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결국 츠바키 문구점을 열고 할머니의 일을 대신하면서부터 할머니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주변의 인물들과 함께 담담히
그리고 있다. 포포는 대필을 의뢰한 사람들의 진심이 담겨질 수 잇도록 필체와 어투, 필기도구의 종류, 편지지와 편지봉투의 재질이나 문양, 우펴의
도안, 밀봉 방식 등 하나에서 열까지 세심하게 챙긴다. 그 모든 일상에서 포포는 할머니의 진심을 읽는다.
"꽃뿐만 아니라 검게 구불거리는 듯한 그루도, 가는 현 같은 가지도, 살짝살짝 싹트기 시작한 나뭇잎도,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이쪽이 마음을 열면 그만큼 벚꽃도 많은 얘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벚꽃과 점점 친밀해지는 듯한 기분에 마음속으로
벚나무를 꼭 안았다." (p.284)
<츠바키 문구점>은 더없이 맑고 순한 소설이다.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초가을에 원두막으로 부는 순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몸의
곳곳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듯하다. 마음결을 스치는 부드러운 터치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진한 향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내 가슴을 졸이다가
모든 게 일시에 풀어지는 소설도 묘미가 있지만 뭉근하게 녹아드는 이런 소설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손편지가 그리운 계절, 그리움은 그렇게 슬몃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