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모를 것이다 - 그토록 보잘것없는 순간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정태규 지음, 김덕기 그림 / 마음서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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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병을 앓아온 사람이 쓴 책은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간다. 확고한 믿음이 가는 것은 물론 한 문장 한 문장, 낱글자 하나하나에 주목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들곤 한다. 뿐인가, 책을 읽은 후 어수선한 마음을 진정시키거나 가슴에 남은 글귀를 생각하느라 책을 읽을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쓰곤 한다. 줄잡아 며칠은 걸리는 셈이다. 그 며칠의 시간으로 책에 대한 모든 것들이 메지 지어지는 건 물론 아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홀로 있는 시간에 이따금 책을 떠올리거나 되새김질 하듯 곰곰 책 속의 글귀를 음미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전문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김혜남 작가의 책이 그랬고 지금은 고인이 된 위지안, 랜디 포시, 폴 칼라니티의 책이 그랬다.

 

최근에 읽은 정태규 작가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소설가이자 국어 선생님이기도 했던 그는 지금 루게릭병을 앓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마치 미치 앨봄의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 모리 슈워츠 교수와 흡사하다. 후학을 양성하는 선생님의 신분이었던 것도, 같은 루게릭병을 앓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점이 그렇다.

 

"그렇다. 삶이란 어차피 저마다 고통의 몫을 짊어지고 가는 좁은 오솔길이 아니던가. 명부에 내 육신은 없을 것이다. 굽이굽이 살아온 나의 오솔길만이 적혀 있을 뿐. 망가진 육신을 원망하기보다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긍정하면서 묵묵히 걸어갈 일이다. 길이 길을 안내할 때까지." (p.83)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와이셔츠의 단추를 단춧구멍에 끼울 수 없었던 어느 날, 작가의 나이는 쉰네 살이었다고 한다. 젊다면 젊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고 해도 크게 욕 먹지 않을 그런 나이였다. 많은 교사들이 유행처럼 명예퇴직을 하던 그해에 작가 또한 명예퇴직을 신청했고,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아 작가는 굳어가는 몸을 이끌고 학교에 나갔었다고 회고한다. 병의 진행을 지연시키기 위해 무리해서 운동을 하고 치료를 위해서 살던 곳 부산에서 서울로 그 먼 길을 오가야 했던 세월을 작가는 이 책에 기록하고 있다.

 

"루게릭병이 내 몸에서 근육을 모두 앗아가도 절대 빼앗아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신이다. 신이 내게 정신과 육체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정신을 선택할 것이다. 내 정신이 곧 내 소설이고, 소설을 쓸 때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p.69)

 

작가는 안구 마우스를 사용하여 컴퓨터의 글을 읽고 자신의 글을 쓴다고 한다. 책의 2부에 실린 단편소설 '비원'은 루게릭병 확진을 받은 뒤에 쓴 소설이고,또 다른 단편소설 '갈증'은 안구 마우스를 이용하여 꼬박 한 달이 걸려 쓴 작품이라고 했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두 남녀의 만남을 그린 '비원'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페이스북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작가는 자신의 소설집 <청학에서 세석까지>에 실렸던 단편소설 '모범 작문'을 페이스북에 다시 연재하여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고도 한다.

 

"또한 소설은 힘이라고 생각했다. 진실한 영혼이 경박한 현실에 지쳐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는 힘이 소설이고, 그러한 영혼을 응원하며 조용히 펄럭이는 깃발이 소설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학교는 생계를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p.25)

 

1부 '영혼의 근육으로 쓴 이야기 - 병상에서', 2부 '모범 작문 -소설', 3부 그대 떠난 빈집의 감나무 되어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은 눈 깜박임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정태규 작가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침묵의 함성처럼 들린다. 그 외침은 고통에 대한 거부나 원망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근사한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한 소설가의 갈증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소설 쓰기에 필요한 것은 진정한 외로움이다. 저 세상의 부조리와, 우리 인생의 부조리와, 저 우주의 부조리에 당당하게 홀로 대면하고 선 자의 외로움. 그런 외로움이 진정한 소설을 낳는 것일 게다." (p.241)

 

글을 쓴다는 건 현실이나 실제와 같은 원재료에 감정이라는 양념을 적당히 섞어 버무리는 일이다. 대중의 입맛에 맞는, 보편적인 글을 쓰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맛집이라면 저마다 그들만의 비법 양념을 지닌 것처럼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에 더하여 자신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특별한 감정이 있어야 할 터이다. 죽음이 가까운 시기에 그 특별한 감정을 발견한다는 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랴. 나는 그의 책에서 용기를 배운다.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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