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여행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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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사람은 여행에서의 자유를 잃게 된다. 여행이 곧 빡빡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인 도시내기들에게 기실 여행은 자유와 진배없음에도 우리는 종종 자유는 마치 여행에서 거저 주어지는 덤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여행에서의 자유는 덤이 아니라 여행의 전부였음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자유가 없는 여행은 그야말로 '앙꼬없는 찐빵'이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떠나는 여행의 스케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빈 시간'이 핵심이라는 건 모순이 되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지난주에는 연예계 쪽에 몸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이 내가 평일에 머무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 마침 내가 사는 지역으로 출장을 왔다가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찾아왔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시간도 늦고 하여 내게 하룻밤 신세를 진 것이다. 전작이 있었던지 친구는 자신이 사온 소주 몇 잔에 벌써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헝클어진 눈빛과 풀어진 옷매무새의 친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연예계 뒷얘기며 대중이 알지 못하는 그쪽 분야 사람들의 고충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TV를 보지 않는 나로서는 그닥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인지라 대꾸도 없이 그저 간간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나마 관심이 있었던 건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온갖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야만 하는 그들도 관계에서 오는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즐기기는커녕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까닭에 제 스스로 관계를 아예 차단하거나 마음에 드는 몇몇 사람만으로 관계를 축소하는 연예인이 점차 늘고 있다고 친구는 말했다.

 

만남이 일상이자 직업인 그들도 관계맺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이야 오죽하랴 싶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소통의 창구나 속도는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늘었지만 만남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만 호소한다면 과학의 발달이 시나브로 고독을 유발하는 셈이지 않은가. 자발적으로 고독을 선택하고 또 한편으로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호소하게 되는 딜레마. 만남 자체를 즐겼던 게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닌데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괜스레 울적해졌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매일이, 여행>을 읽었던 오늘, 불콰해진 얼굴로 횡설수설 이야기를 이어가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작고 소소한 것에서 자신이 발견한 보석 같은 깨달음을 담담한 필체로 써내려 간 이 책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소중한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여행이란 참 묘한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은 저절로 자신의 몸 컨디션에 중점을 두게 된다. 일상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다. 대개 정신에 중점을 둔다. 그만큼 긴장하고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와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그런 육체적인 피로감이나 혹독한 날씨의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또 산들 부는 상쾌한 바람과 햇살의 감촉도 상실되어 있다. 그저 아름다운 경치가 소리 없이 거기 서 있을 뿐이다." (p.53)

 

작가는 자신이 방문했던 세계 여러 나라의 풍경과 일상으로 복귀해서 만나는 여행지의 추억을 소개하고 있다. 남미의 짙은 녹음과 강렬한 햇살을 되살리는 마테차, 서쪽을 향해 툭 떨어지는 나일 강의 낙조와 밤의 풍경 등 생각지도 않은 지점에서 툭툭 불거져 나오는 작가의 추억 한토막이 나로 하여금 새삼 추억에 젖게 했다. 추억이란 일상이 던져주는 우연과 같은 선물이라는 듯 말이다.

 

하나 신기할 것도 없는 작가의 글이 뭉근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던 이유는 따로 있는 듯했다. 우리가 일상에 치여 서서히 잊어가고 있는 것들, 예컨대 하늘에서 무수히 떨어지는 꽃잎 같은 도쿄의 눈을 질리도록 바라보았던 고요한 새벽이나 비 내리는 거리를 한없이 걸어 머나먼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던 첫사랑의 추억 등이 겨울로 가는 시린 계절을 한결 따뜻하게 해주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6년간이라, 지금의 10년에 해당할 정도로 농밀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좋아한다는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 사람은 매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p.220)

 

소설가가 된 후에도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를 했던 가게의 점장과 10여 년 동안 모임을 가졌던 추억과 암으로 세상을 떠난 점장을 추억하는 작가, 열두 살 나이에 작가와 이별한 사랑하는 개. 작가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관계와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비 내리던 밤 개와 함께 마지막으로 산책을 했던 그 순간을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비 내리던 날, 가장 슬펐던 날, 사랑하는 개의 영혼이 내게 작별을 고하려 왔다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전까지는 앞으로 반년은 버텨 줬으면 좋겠다고 절실하게 기도했지만, 그날 '이제는 더 힘을 낼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헤어지는 건 슬퍼.' 하는 것이, 말로서가 아니라 그냥 절절하게 전해졌다." (p278~p279)

 

어른이 된다는 건 마치 그 모든 고통을 담담히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겨우 견딜 수 없는 것과 아무렇지도 않게 견딜수 있는 것을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뿐인데 말이다. 안 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걸 담담히 받아들일 나이가 되면 저 헐벗은 가로수 나목의 쓸쓸한 풍경도 그저 묵묵히 바라볼 수 있게 될까? 바람이 마른 가지를 크게 흔드는 살풍경한 오늘,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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