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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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의 시간적 여유만 생겼다 하면 뻔질나게 해외여행을 다니는 친구가 있다. 그런 까닭에 친한 친구들마저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운 것은 물론 전화 목소리를 들었던 게 언제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친구와의 대면이 이렇게 어렵다 보니 그의 아내가 이따금 이쪽 소식을 저쪽에, 저쪽 소식을 이쪽에 전해주곤 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아내는 불평 한마디 없다.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로 만나 졸업도 하기 전에 서둘러 결혼했던 친구는 슬하에 여식을 한 명 두었으나 지금은 취직하여 제 밥벌이를 할 정도로 장성했으니 가장으로서 그의 책임도 반쯤 감해진 듯 보인다. 그런 까닭에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언제나 그 친구에 대한 '유비통신'이 안주처럼 올라오곤 한다. 어디어디에 현지처가 있다는 둥, 돌쟁이 아들이 있다는 둥 근거도 없는 이야기들이 끝없이 생성되곤 한다.

 

"왜 그렇게까지 여행을 다니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서 이제는 여행간다는 말을 가능한 한 주변에 하지 않게 됐다. "뭐 하러 또?"라고 물으면 답할 말이 궁색하기도 하고, 사실 뭘 하러 가는 게 아니다. 목적 없이 있으려고 간다." (p.158)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첫 여행에세이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를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 생각이 났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책의 저자인 이다혜 기자 또한 여행에 있어서는 중독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다혜 기자나 친구가 생계를 작파한 채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오직 여행만 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친구 역시 주어진 직분에 성실히(?) 임한다는 걸 알기에. 그러므로 이 책은 장기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는 아니다. 주말이나 단기간 휴가를 이용하여 짬짬이 떠나는 평범한 여행자에게 꼭 맞는 책이다.

 

"여행의 무엇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지금 나의 대답은 이렇다. 공기가 다르고, 그 안에 있는 게 좋다. 그 나라의 음식 냄새, 사람들의 분위기, 역사의 문화자본 같은 모든 것들이 그냥 그 안에 서 있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느껴진다. 낯선 풍경에 노출되는 것만으로 더 공부하고 싶어지고 호기심이 생기고 정신적으로 건강해진다." (p.263)

 

친구에게 해외여행이 취미로 굳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배낭여행을 간다며 짐을 꾸려 떠나더니 연휴가 다 끝날 즈음해서 귀국했다. 몇 년 전 설연휴 기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 틈만 나면 홀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몇 달 전부터 여행 목적지를 알아보고 준비물이나 교통편, 숙박시설 등 여행에 필요한 일반적인 정보를 꼼꼼하게 알아보는 것도 이니었다. 여행을 떠나기 일이 주 전부터 이용 가능한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는 게 다였다. 말하자면 비행기 티켓에 맞춰 여행지가 결정되는 셈이었다.

 

"내가 여행과 관련해서 유일하게 되뇌는 점이 있다면, "예정대로 되지 않는 일을 받아들일 것." 오로지 그것을 더 여유 있게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p.14)

 

친구는 그나마 건강한 남자 여행자이기 때문에 한국에 남겨진 가족들의 걱정과 근심을 조금쯤 덜어내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저자인 이다혜 기자는 여자 홀로 여행하는 것에 대해서 '혼자 여행하는 독신녀의 건강 염려증'이나 '여자에게 여행이란'과 같은 소제목의 글을 통하여 여성 여행자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는 저자이기에 여행과 독서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그 외에도 부모님과 함께 여행하는 팁, 여행지에 사는 지인의 집에 폐를 끼치지 않고 얹혀 지내는 기술 등 참고할 만한 정보들이 빼곡하다.

 

언젠가 나는 늦은 저녁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여행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를 여행 마니아로 이끌었던 첫 여행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쌓인 스트레스가 워낙 심해서 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며칠 쉬고 나면 그래도 살 만하지 않을까 싶었단다. 그런데 여행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했고 다시 다시 떠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짧은 여행을 두어 번 반복하고 나자 자신이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더란다. 단순히 스트레스 때문에? 사는 게 무의미해서?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등등 자신을 향해 할 수 있는 여러 질문을 다 던져보았다고 했다.

 

"여행 중독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인 가본 땅은 다 밟아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단 무조건 나가고 봐야 하는 인간도 있다. 난 후자 쪽이다. 안 가본 땅에 대한 신비가 적은 편이다. 내가 아는 곳을 더 잘 알고 싶다." (p.114)

 

그러나 친구의 대답은 나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의외의 지점으로 나를 이끌었다. 두어 번의 여행 후 고민하던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었을 때, 가벼워진 마음으로 문득 뒤돌아보니 자신의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말할 수 없이 두려워지더란다. 첫번째 여행을 떠날 때의 스트레스는 비길 바가 못될 정도로 그 두려움은 컸다고 했다. 팔십 년의 인생에서 자신은 이미 죽음 쪽으로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더란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허방을 짚은 듯 아득하기만 할 뿐, 한줌도 되지 않는 시간을 걸어온 듯한데 벌써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여유로운 시간이면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자신은 그것을 잊기 위해서라도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일과 집안의 대소사로 정신없이 지내다가도 모든 게 멈춘 듯 한가한 시간이 찾아오면 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더란다. 자신이 외국을 찾는 건 어쩌면 허무로부터의 도피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낯선 나라에서는 생각을 접고 긴장하며 살 수밖에 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신은 그래서 떠날 뿐 여행 자체를 즐기는 건 아니라고. 나는 친구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들도 많았다. 그것이 삶의 허무일지라도. 여행을 떠나기 위한 구차한 변명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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