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별것도 아닌 문장에 격하게 공감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말도 아니고 주변에서 이따금 듣게 되거나 어느 시시한 잡지에서도 흔하게 읽을 수 있는 그런 문장도 책을 읽어나가다가 갑자기 멈춰서서는 '그래, 맞아. 정말 그렇지.'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첫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애가 처음 보는 눈에 황홀한 듯 빨려드는 것처럼 말이다.

 

씨네 21 이다혜 기자의 여행 에세이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를 읽다가 문득 시선이 멈추었던 문장은 이랬다.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몰랐는데 나중에 다 없어지고 나서야 깨닫는 자산이 있다. 육체적 젊음이나 시간 같은 게 그렇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저절로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그 나이가 되기 전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무리 반복해서 듣는다 해도 가슴에서 절절히 느껴지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20대의 젊음이 유지되는 시기에는 꼼꼼히 계획하지 않아도 기대했던 것 이상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아무리 촘촘한 계획을 짜더라도 그 중 절반 이상을 하기 힘들어진다.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에 따라 시간의 가치도 달라지게 된다. 시간 내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 전에 나이가 들면 하나의 일을 하면서도 생각이 어찌나 많아지는지 일의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젊은 시절에는 하나의 일을 할 때면 오롯이 그 일에 집중할 뿐 다른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재미는 일부러 멀리 하고 고민만 가까이 하려드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 작정한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그렇게 된다. 검찰이 신청한 국정원 댓글부대의 영장 모두를 기각했던 오모 판사도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도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하는 일 자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모두 다 기각시켜버린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국민들의 비난을 워낙 많이 받는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를 대신해 변명하자면 멍 때리다가 그만... 그랬던 게 아닌가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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