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 아침달무늬 1
유희경 지음 / 아침달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외로움이 더해지면 더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렇다. 본디 시는 묵독을 목적으로 쓰인 글이 아니기에 시는 오히려 고독을 방해한다. 시는 오직 낭독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의해 최초로 읊어진 시는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발현된 소리는 폭발하듯 터지는 활화산이 되고, 뉴런과 뉴런 사이를 연결하는 시냅스처럼 나와 너 우리를 연결하는 촉매가 된다. 그러므로 연대와 공감이 없는 사회에서 시는 가치를 잃고 생명을 잃는다. 관계의 단절은 복원력이 없다. 그것은 오직 스러져 갈 뿐이다.

 

외롭거나 쓸쓸한 사람들은 시보다는 소설을 읽는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서의 관계의 단절이 소설 속에서는 오롯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 복원된 나와 너의 관계는 참혹한 현실의 고독을 말없이 어루만진다. 그들은 독서를 통한 조용한 위무가 그들에게는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혜택이라 여긴다. 어쩌면 그럴지도... 다시 시로 돌아가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가자. 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지 못하지만 한 줄 시구를 읊는 너와 나의 목소리가 사랑이 되고, 고독한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을 적신다.

 

유희경의 시집 <당신의 자리 - 나무로 자라는 방법>을 읽었다.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의 주인장이자 문화기획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서점에서 여는 시 낭독회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시인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낭독의 중요성을 그는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로 데뷔했던 그는 익숙한 언어로 익숙한 리듬의 시를 쓴다.

 

뿌리

 

눈물이 너무 많은 나의 고모는

손등을 쓰다듬어 별을 쏟는다

하지만 고모 그냥 그림자인걸요

어떤 후회가 우리를 흔들겠어요

돌멩이가 몸을 굴리는 방식으로

의지에는 작은 계산들이 숨어 있다

좁은 어깨를 견주어보는 사람들처럼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하지만

멀리서 걸어오는 누군가의 기척

귀를 기울여보아도 그것뿐

지나지 못하고 있다

이게 다 家系의 내력이었다

 

'잠시 어떤 시간이 지나가'는 유희경의 시에는 '천천히 깜빡이며 흩어진 내부를 통과하는' 당신이 있고, 아버지와 함께 호두나무를 심던 오래된 추억이 있고, 우리가 찾아야 할 몇 개의 비밀이 오도카니 놓여 있다. 우리는 어쩌면 '당신이 비운 자리 옆에서/ 빛을 가지고 놀고 놀던' 어떤 나무였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고 했던 어느 소설가의 주장처럼 이 봄, 한 편의 시를 읊는 너의 목소리는 어쩌면 넝쿨장미 흐드러진 이 계절마저 앞질러, 다가올 가을의 어느 모퉁이에서 천천히 오는 나의 시간을 기다리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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