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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음, 신준용 옮김 / 애니북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절제의 미학은 마음의 여백과 결합할 때 그 가치가 빛난다. 극도로 절제된 작품도 독자의 이해와 여유로은 마음으로의 초대가 없다면 다 소용없는 짓이다. 독자가 한 줄의 짧은 문장을 읽고 30분, 혹은 하루 종일이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그 문장의 의미를 되새기며 깊은 사색에 빠져들 수 있다면 퇴고의 과정에서 작가가 들였을 혼신의 노력은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예술은 결국 향유하는 자의 가슴에 안주하는 것이니까.
내가 어렸을 때는 '만화방'이 있었다. 석탄 난로 주변으로 낡아빠진 소파들이 줄줄이 놓여 있고 사방의 벽면에는 각종 만화가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이자 바깥 세상의 소식을 전해 듣는 통로로서 만화방의 위세는 대단했다. 하여, 용돈이라고는 변변히 받아본 적 없는 아이들도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친척의 방문으로 깜짝 횡재를 하였거나 길에 떨어진 동전푼이라도 주운 날이면 그 돈이 손에서 녹아 없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숨을 헐떨이며 한달음에 '만화방'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만화방'은 어린 시절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아련한 추억의 장이 아닐 수 없다. 이따금 나는 먼지가 묻은 추억의 유리창을 통해 내 어린 시절의 '만화방'을 바라보곤 한다. 그곳에는 땟국이 줄줄 흐르는 허술한 옷을 입고 손에 침을 발라가며 책장을 넘기는 어린 아이가 있고, 성인이 된 후에도 나는 그 시절의 아이를 그리워하며 때로는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만화를 읽곤 했다.
"내가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어떤 법칙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어느 봄날 오후, 나는 아버지의 이발소 마룻바닥에 앉아 놀고 있다." (p.6)
"따뜻한 봄 햇살의 온기가 한가득 머문 마루,
아마도 그건 어린 시절 중 내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한 한때였으리라." (P.7)
올해 2월 향년 69세의 나이로 고인이 된 다니구치 지로도 성인이 된 이후에 내가 만나 좋아하게 된 만화 작가 중 한 명이다. 1971년 '목쉰 방'으로 데뷔하여 일본 근대문학 거장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와 그 지인들의 생활상을 그린 '도련님의 시대'로 일본 3대 만화상 중 하나인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대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었다. 그랬던 그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어찌하지 못했던 것일까. 만화 작가로서 그는 만화적 과장과 왜곡 따위를 극도로 절제한 사실적이면서도 담백한 작품을 남겼다. 내가 오늘 읽었던 작품은 2005년에 국내에 소개된 <아버지>였다. 질곡의 삶을 살아온 한 가족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일본에서 1995년에 '아버지의 달력'으로 소개되었던 단행본이다.
만화는 주인공 요이치가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요이치는 아버지의 나이와 자신이 고향을 떠나 지내온 세월을 셈해본다. 15년의 세월은 그가 고향을 잊고, 가족마저 등진 채 지낸 세월이었고,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쳤던 아득한 시간이었다. 요이치는 어떡하든 가족과의 대면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다음날 떠나려 했지만 아내 료코의 만류로 고향 돗토리를 향해 등 떠밀리듯 출발한다. 도쿄에서 돗토리현은 비행기로 1시간의 거리였다.
"고향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고향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p.274)
1952년에 있었던 돗토리 대화재로 인해 요이치의 집도 불타버렸고 빈털터리가 된 요이치네는 양조장을 하는 요이치의 외갓집, 그러니까 요이치 어머니인 키요코의 친정에서 돈을 빌려 집을 새로 짓게 된다. 가난했던 요이치 친가와는 달리 양조장을 하며 형편이 넉넉했던 처가로부터 도움을 받은 요이치의 아버지 야마시타는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쉬는 날 없이 일을 했다. 이발사인 그는 출장이발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밖에 모르는 아버지가 못마땅했던 어머니는 요이치의 누나 하루코와 요이치를 데리고 영화관에 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부모님은 결국 이혼을 했고 어머니는 음악을 가르치던 마츠모토 선생님을 따라 돗토리를 떠났다. 유난히 요이치를 아꼈던 그의 어머니가 가족들을 버리고 떠났던 까닭은 일밖에 모르는 무뚝뚝한 아버지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던 요이치는 어떻게 하면 집을 떠날 수 있을까 궁리한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재혼을 했고 도쿄에 있는 대학에 합격한 요이치는 이후로 고향을 찾지 않는다. 그가 사랑했던 애완견 코로가 죽었을 때에도 그는 고향을 찾지 않았다. 요이치가 집을 떠난 후 코로를 극진히 돌보았던 건 그의 아버지였다. 그것은 곧 요이치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움이었다.
"코로의 죽음 앞에서도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살아온 날들이 그런 감정을 조금씩 무디게 했던 것이다." (p.239)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로부터 요이치는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요이치가 방학이면 외삼촌을 도와 아르바이트를 했던 양조장에서의 일을 추억하며 그의 외삼촌 다이스케는 요이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이치가 떠난 후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도.
"니가 정성을 들여서 말을 걸어주면 술도 화답해서 좋은 술이 되는 기다." (p.230)
다니구치 지로의 <아버지>는 웬만한 소설보다 더 묵직한 감동으로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오는 무게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가의 절제된 문장 표현과 사실적인 그림, 돗토리 대화재라는 실재하는 참화를 소재로 하여 한 가족의 수난사를 담담히 그려냄으로써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숨겨둔 그리움의 실체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여백에는 작가가 그려 놓은 소박한 그리움의 무늬가 아롱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