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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소설은 한 권의 철학서처럼 읽어내야 한다는 걸 말이야. 때로는 그렇더군. 스토리의 전개와 논리의 개연성에 집중하면서 읽는 흔한 소설 독법으로는 뭔가 덜그덕거리는 이질감이 느껴져서 지금 읽고 있는 소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지레 들곤 하지.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래. 소설의 문장을 한 줄 한 줄 읽어갈 때마다 나는 마치 어떤 의식에 앞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진행되는 절차에 집중하는 것처럼, 편견이 깃들지 않는 맑은 의식을 유지한 채 하나의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천천히 깨우쳐가는 재미에 빠져들게 돼. 우리가 소설에서 취하는 흔한 감동이나 교훈과는 거리가 있지. 그럴 때 스토리의 전개는그닥 중요하지 않거나 번외의 경기처럼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야.
"사람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 뒤에 숨어 있는 의도로 죄를 짓는 것일세. 내가 연구한 법질서, 종교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거대한 옛 법질서는 그것을 알고 있고 또 알려주네. 배신, 비열한 행동, 심지어는 최악의 살인을 저지르고도 죄가 없을 수 있어. 행위는 진실이 아닐세. 그것은 언제나 결과에 지나지 않아." (p.145~p.146)
헝가리 출신의 대문호 산도르 마라이가 쓴 <열정>도 그와 같은 소설 중 한 권이지. 소설의 구조는 사실 말하기도 어색할 정도로 단순해. 어린 시절부터 24년 동안 쌍둥이처럼 붙어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진 지 41년 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 그들이 주고 받은 대화를 쓴 게 소설의 전부야.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나는 차라리 한 인물에 내재된 상반된 성격의 페르소나로 해석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
"인간의 마음속에는 개인적인 흥분이나 이기심 저편에 우정의 법칙이 살고 있네. 그것은 절망적으로 갈구하면서 서로의 품안으로 뛰어드는 남녀의 정열보다 강하며, 실망이라는 것을 모르네. 상대방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지." (p.181)
귀족 출신의 헨릭과 하급 관리 집안의 아들인 콘라드. 그들은 사관학교에서 열 살때 만나 서로 친구가 되었고 성인이 된 후 같은 부대에서 병영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헨릭 집안의 성에 수시로 드나들 정도로 가깝게 지냈어. 그러나 기질은 서로 크게 달랐지. 유쾌하고 관대하며 사교성 많은 헨릭과는 달리 예술적 기질이 강한 콘라드는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어. 소설에서 헨릭도 말하고 있지만 콘라드는 군인이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던 셈이야.
"그러나 자네 영혼의 밑바탕에는 갈등, 자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고 싶은 동경이 숨어 있었어. 인간에게 그것보다 더한 시련은 없네. 현재의 자기와는 달라지고 싶은 동경,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인간의 심장을 불태우는 동경은 없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세상에서 차지하는 것하고 타협할 때에만 삶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일세." (p.172)
콘라드가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리라고 헨릭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듯해. 그러나 콘라드는 그렇게 떠났고 남겨진 헨릭은 그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동기를 끝없이 생각하지. 떠나기 전 날, 사냥터에서 자신을 겨눴던 콘라드의 총구, 불륜을 의심하게 했던 헨릭의 부인 크리스티나의 수상한 행동들. 콘라드가 열대 지역으로 떠나고 8년 후 크리스티나는 병으로 죽고, 홀로 남은 헨릭은 고독 속에서 끝없이 생각하지. 삶의 진실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고독이라는 것도 참 묘하네. 그것도 정글처럼 이따금 위험과 놀람에 가득 차 있어. 나는 온갖 고독을 알고 있네. 삶의 질서를 아무리 엄격하게 좇아도 헤어날 길 없는 권태. 그 뒤를 잇는 갑작스러운 폭발. 고독도 정글처럼 불가사의하다네." (p.133)
"세월이 흐르고, 내 주변의 삶이 황혼에 접어들었지. 책과 회상들이 쌓이면서 농축되었네. 책마다 한 알의 진실이 들어 있었고, 그것에 대해 회상은 인간 관계의 진실한 본성은 아무리 애써도 알 수 없고, 또 그런 것을 인식하더라도 더 현명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어. 그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조건 없는 성실과 신의를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것일세. 여러 가지 사건들로 보아 이 친구가 신의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도 마찬가지이지." (p.144)
75세의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난 헨릭과 콘라드. 소설은 사냥꾼으로부터 콘라드의 방문을 알리는 편지를 전해 받는 노장군 헨릭으로부터 시작하지. 죽음이 그들을 영원히 갈라놓기 전에 진실을 알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헨릭은 흥분된 듯 묘사돼. 커다란 성채에서 홀로 남았던 헨릭은 오랜 세월 동안 지난날을 회상하며 고독 속에서 보냈으니 그의 흥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
"인간이란 원래 그렇다네. 자신의 행위가 치명적이라는 것을 처음 순간부터 알면서도 그만 두려 하지 않아. 인간과 운명, 이 둘은 서로 붙잡고 서로 불러내서 서로를 만들어간다네. 운명이 슬쩍 우리 삶으로 끼어든다는 말은 맞지 않아. 그게 아니라 우리가 열어놓은 문으로 운명이 들어오고, 또 우리가 운명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청하는 걸세. 근본 심성이나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불행을 행동이나 말로 막아낼 수 있을 만큼 현명하거나 강한 사람은 없네." (p.219~p.220)
인용이 너무 많았지? 하지만 산도르 마라이의 작품에 열광하는 나로서는 소설 한 권을 다 옮겨 적는다 해도 오히려 부족함을 느꼈을지도 몰라. 1948년 공산주의 체제의 조국 헝가리를 떠나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을 전전하던 작가는 41년이라는 긴 망명행활을 뒤로한 채 1989년 2월 89세의 나이로 망명지 캘리포니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 "지나치게 오래 사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다"라고 일지에 썼다고도 전해져. 주인공 헨릭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었어.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고. 암튼 나는 지금도 여전히 하고픈 말이 많아. 서둘러 마치지 않으면 어쩌면 밤을 샐지도 몰라. 밖에는 유난히 달이 밝아. 전날 내린 봄비로 대기가 맑아져서 그렇겠지.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뜻깊은 밤이 되길 바래. 잘 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