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일기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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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욕망이나 규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적어도 스스로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에게서 좋은 작품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그가 창조성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가라면 자유는 예술을 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술의 원천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자유로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꼭 일상 생활에서의 자유분방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조차 예술가입네,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미친X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작품활동과 일상생활을 철저히 분리할 필요가 있다. 작품에서조차 근엄한 척, 성인군자인 양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운다면 예술가로서의 그의 생명은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48일 전 나는 교통사고를 겪으며 인간의 목숨은 유리잔처럼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극히 일부로나마 맛보았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기록하고, 나누고, 무엇보다 자신의 생에 남겨진 길을 기쁨을 찾아 떠나는 지도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 순간 느끼고 있다. 이 일기는 그런 차원의 기록이다." (p.75)

 

소설가 최민석의 <베를린 일기>는 읽는 이에게 편안한 웃음을 선사한다. 강요된 깨달음이나 과장된 웃음이 아닌, 날것에서 오는 푸근하고도 편안한 느낌은 글을 잘 쓰려는 작가적 욕망이나 누군가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은 사회적 욕구가 어느 정도 배제된 채 쓰인 글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규칙이나 욕망에서 벗어난 순간, 우리는 억제되었던 동심을 회복할 수도 있고, 일상의 권태를 삶의 위트로 치환하는 방법도 깨우치게 된다. 일기를 쓴다는 건 결국 내 삶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밋밋한 일상에서 서너 개의 기쁨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기쁨은 창조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임을 알기에 일기를 씀으로써 우리는 맨송맨송한 삶을 몇몇 기쁨으로 채워갈 수 있는 것이다.

 

"만만한 곳이 없는 세상이다. 그나마 베를린은 버틸 만한 곳이다. 물론, 소시지와 쌀쌀한 기온과 해가 안 뜨는 어두움과 그로 인한 우울함과, 맛없는 음식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발음과 방을 구하기 위해 서류를 보내고, 줄을 서서 면접을 봐야 하고, 복잡한 지하철과 버스 노선과 느린 인터넷만 잘 견뎌 낼 수 있다면 말이다." (p.158)

 

2014년 가을, 한 예술 기관의 지원으로 2014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베를린 자유대학에 머물렀던 작가는 독자가 선물로 준 다이어리에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고, 매일매일 자신의 SNS에 올렸다고 한다. 독특한 문체로 쓰인 그의 일기는 독자들에게 큰 화제를 모았고, 그때의 일기를 모아 엮은 것이 바로 이 책 <베를린 일기>다. 그의 일기에는 이국땅에서의 고독이나 우울이 물기 묻은 향수나 징징거림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여행자의 낭만이나 지적 허세로 포장되지도 않는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끝없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는 보란 듯이 사진을 첨부한다. 구라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일기는 일정한 형식을 유지한 채 계속된다. 가령 첫 문장은 "이 글은 1유로짜리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쓰고 있다." 등으로 시작해 마지막 문장은 "베를린에서 첫 번째 날이었다."로 끝내는 식이다. 일기의 중간중간에 특정 인물을 소환하여 "OOO만이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를 반복하여 쓰기도 한다. 작가는 원고 청탁도 받지 않은 글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자유롭게 씀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했노라고 고백한다.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 나를 배웅하러 나온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암흑 같은 검은 하늘 가운데 줄곧 비가 내렸다. 나는 그녀가 준 우산을 쓰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그녀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일 안 좋을 때, 제일 우울할 때 오니, 볼 것이 없어,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많이 변한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내 문학의 상징인 빈정댐과 투덜댐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은 잃어버려도 좋다. 그렇게 생각했다. 여든아홉 번째 날이었다." (p.484)

 

그의 일기에는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자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없다. 그날그날의 호구짓이 그저 젊은 날의 낭만쯤으로 읽힌다. 그렇다고 그가 마냥 젊다는 건 아니다. 그가 말하길, "고독은 현재 진행형일 때는 처참하지만, 과거 완료형일 때는 낭만적이다. 이 자발적인 일기가 그 낭만의 증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결국 인생에서 필요한 건 상대에게 웃음 짓는 것, 상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소중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 실천인 것 같다. 어디에 있건, 남은 시간들은 소중히 쓰기로 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백림의 여운은 이제 모두 정리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서울에서의 날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날이었다." (p.492)

 

서울의 공기 질이 인도 뉴델리에 이어 세계 주요 도시 중 두 번째로 대기 오염이 심했다고 하는 오늘, 짙은 회색빛의 하늘을 보며 서울중앙지검으로 향했던 한 여인은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라고 부유하는 먼지처럼 말했다. 그녀의 일기가 "교도소에서의 첫 번째 날이었다."로 마무리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의 하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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