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서의 겨울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이상해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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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이따금 더없이 모질고 독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소설가가 다 같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작가가 원하는 극적 반전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훌륭한 주인공일지라도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과감히 밀어버릴 수 있는 준비를 단단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야 눈을 질끈 감은 채 그 끔찍한 장면을 조심스레 열어보겠지만 정작 그것을 쓰는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쩌면 롤러코스트를 즐기는 사람처럼 활짝 웃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독자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게 작가의 역량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엘리자 수아 뒤사팽이 쓴 <속초에서의 겨울>은 신예작가 답지 않은 거침없는 필력과 대담한 묘사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가의 대담함은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그녀의 정체성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여자 주인공이라는 굴레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성적 욕망과 가치관에 그닥 장애가 되지는 않는 듯 보인다.

 

"나는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스타킹은 벗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내 흉터, 어릴 적 갈고리 위에 넘어져 생긴 길고 가는 흔적을 어루만졌다." (p.33)

 

주인공인 '나'는 프랑스계 혼혈이다. 프랑스인 아버지가 엄마를 유혹하여 내가 태어나게 되었지만 정작 나는 아버지를 모른다. 부둣가 어시장의 42호 점포에서 노점상을 하는 엄마를 돌보기 위해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엄마가 있는 속초로 내려왔다. 나는 낡은 펜션에서 일한다. 펜션의 주인인 박씨 아저씨는 일 년 전에 아내를 잃고 혼자가 되었다. 겨울의 속초는 춥고 황량하다. 비수기의 펜션에는 일본인 등산가와 성형수술 후 회복차 묵고 있는 내 또래의 서울 아가씨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묵고 있다. 어느 날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만화가 얀 캐랑이 펜션을 방문한다. 그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화를 그리는 인물이다.

 

"노르망디의 해변들, 전쟁은 그 위를 지나갔어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긴 해도 삶은 계속되고 있죠. 이곳 해변들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기다림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결국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호텔도 짓고 반짝이 전등 장식도 하죠. 하지만 그것들 다 가짜예요.. 그건 두 절벽 사이에 길게 늘어져 있는 줄 같아요. 언제 끊어질지 알지 못한 채 몽유병환자가 되어 그 위를 걷는 거죠. 이곳 사람들은 둘 사이에서 살고 있어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이 겨울 같은!" (p.101)

 

얀 케랑은 펜션의 별채에서 묵게 된다. 나에게는 모델 지망생인 남자친구가 있지만 그와의 관계는 언제나 겉돈다. 거기에는 나의 엄마가 있다. 늙고 병든 엄마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 남자친구인 준오는 나의 엄마를 서울로 모셔오면 되지 않겠느냐 말하지만 나는 엄마가 속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만화가인 케랑은 나에게 이것 저것을 부탁하면서도 내가 만든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케랑의 모든 것이 궁금했던 나는 그의 주변을 끝없이 배회한다.

 

케랑은 아버지의 고향 출신이라는 지역적 연고로 인해 멀어질 수 없는 대상이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성장했던 나는 그가 그리는 만화 속에서나마 그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케랑을 이성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대역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희미해졌다. 그것은 내 손가락 사이에서, 내 시선 아래에서 방황하듯 희미해졌다. 새가 눈을 감았다. 종이 위에는 이제 오로지 푸른색밖에 없었다. 쪽빛 잉크로 뒤덮인 페이지들. 그리고 그 남자, 겨울 속을 더듬어 나아가던 바다 위의 그 남자는 파도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투명하게 표현된 그의 자취는 서서히 여자의 형태를 취해갔다." (p.171)

 

혼혈이라는 작가의 정체성은 소설 속의 '나'를 통하여 그대로 투영된다.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었던 경계인으로서의 삶은 늘 외롭고 고독했을 터, 관광객의 북적임이 사라진 겨울 속초는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으리라. 파리와 서울, 스위스를 오가며 자란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에 가깝지만 처음 출간한 이 소설로 인해 그녀는 스위스의 문학상 로베르트 발저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작가는 일제강점기 이후의 재일한국인들의 애환을 차기작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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