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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평점 :
책을 읽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밋밋한 블로그에 몇 자 끄적이는 게 고작이지만 때로는 작가 코스프레라도 하려는 듯 갖은 인상을 쓰면서 몇 시간씩 궁상을 떨며 앉아 있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내 굳은 머리에서 기발한 주제가 생각나거나 참신한 문장이 저절로 써지는 건 물론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표정으로 무작정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졸음에 굴복하거나 낮 동안 차곡차곡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턱을 강타하는 바람에 작가 코스프레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허무하게 끝나곤 한다. 나는 짐짓 아쉬운 표정으로 잠자리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주인이 떠난 빈 블로그엔 희미한 달빛만 밤새 일렁거린다.
내가 블로그에 쓴 잡다한 글 중에 간혹 읽을 만한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달빛이 내게 슬몃 찔러준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천명관의 새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몰라도 작가는 이번 작품을 아주 쉽게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장편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아주 쉽게 읽어냈던 것처럼 작가 또한 가볍게 써내려 간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소설은 우리가 어디선가 한번쯤 들었음직한 조직폭력배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 울트라, 깡구, 공업용, 뜨끈이, 루돌프 등 삼류 양아치 냄새가 물씬 나는 등장인물들의 현실감 있는 대사와 적절히 섞인 욕설이 어느 영화의 대본처럼 읽는 이에게 친숙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번 소설에 실린 이야기는 모두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워들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소설에 맞게 윤색을 하긴 했지만 주로 뒷골목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주워 모았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작가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어디선가 다 주워들은 이야기이겠지요." (p.286 '작가의 말' 중에서)
이야기는 인천 연안파의 두목인 '양 사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양 사장은 어창에 갇혀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전설적인 폭력배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고, 싸움을 통한 새로운 영역의 확장은 옛말이 되었다. 그의 무용담은 아직도 전설처럼 떠돌고 있지만 말이다. 소설을 읽는 나는 양 사장 스스로가 이미 자기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지만 그를 바람막이 삼아 돈벌이를 하고 있는 많은 그의 수하들에 의해 떠밀리듯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나 않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소설의 마지막에 집 나간 고양이를 찾기 위해 잠옷 바람으로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를 헤매는 양사장의 모습이 그려지는 걸 보면 조직폭력배나 평범한 남자들이나 남자들의 삶이라는 게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소설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울트라가 아닐까 싶다. 정식 조직원이 되기 위해 연안파에 일이 있을 때마다 동원되는 동네 건달 울트라는 소설에서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단순 무식형의 순수 청년으로 그려진다. 경마의 승부조작을 하기 위해 밤에 조직원들과 몰래 숨어 들어 망치로 경주마의 다리를 때리던 중 울트라는 잘생긴 말 한 마리에 매료되어 그 말을 훔쳐 트럭에 싣고 도망친다. 그 말은 부산의 은퇴한 조폭 손 사장이 주인이었고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종마였다. 손 사장은 자신의 말을 찾기 위해 수하 조직원을 대동한 채 인천으로 향하고 말을 돌려주라는 조직원들의 권유를 무시한 채 울트라는 말과 함께 섬으로 향한다.
보석박람회에 전시된 고가의 다이아를 훔친 세 명의 대리기사 이야기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한탕을 노리고 도박에 빠진 그들은 거액의 빚을 지고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인물들이다. 그러나 다이아를 훔치는 바람에 조직폭력배의 회오리에 휩쓸리게 되고 결국 대리기사의 자리로 무사히 돌아오지만 그들은 다시 도박의 늪에 자발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양 사장의 오른팔이었던 형근도 재미있는 인물이다. 루돌프와 같은 감방에서 생활했던 형근은 곱상하게 생긴 루돌프에게 집적대는 많은 재소자들로부터 루돌프를 지켜주었고 그때의 인연으로 루돌프는 출소 후 형근을 찾아온다. 건달과 동성애자는 결코 합쳐질 수 없는 조합이라고 믿었던 형근은 결국 루돌프에게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최근에는 조직폭력배의 생존 수단도 많이 바뀌었다. 불법 성매매나 불법 도박장 개설, 고리대금을 통한 금품 갈취 또는 지역 소상공인에 대한 협박 등 온갖 불법적인 악행을 서슴지 않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요즘에는 우리나라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해외로 눈을 돌리거나 인테리어와 같은 합법적인 업종에 뛰어들고 있다. 물론 정치권에 줄을 대려는 폭력배들도 여전히 많지만 말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직폭력배도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잇속을 챙기려 드는 권력자들의 행태는 팔구십 년대의 모습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뉴스에서 보는 작금의 현실은 그야말로 삼류 양아치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불법을 저지른 조직의 오야붕을 감싸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는 걸 보면 말이다. 천명관의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에 대한 서평을 쓰다가 괜히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다. 소설의 가독성은 좋았지만 결말 부분을 서둘러 정리한 듯한 느낌이나 작위적인 결론으로 몰고간 듯한 인상은 내가 생각하는 옥의 티였다.